「중앙SUNDAY - 2013. 08. 25.」
안병주 1930년 서울 출생. 근대 유학자로 유명한 안인식 선생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서당에서 유교경전을 배웠다. 경기중·고를 거쳐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재직했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장을 지냈다. 장자 연구의 대가로 꼽힌다. 퇴계 이황의 철학에도 조예가 깊어 국제퇴계학회장과 퇴계학연구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장자 원전을 번역하면서 자유롭게 읽어 온 내용을 한 가지 뜻으로 확정해야 하니 한 글자, 한 글자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나를 괴롭혔다”며 “1~2년 만에 끝날 것으로 생각한 번역이 8년 걸렸다”고 회고했다. 85년 유교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고 87년에는 전두환정부의 4·13 호헌조치에 항의해 성균관대 교수들과 함께 시국선언을 냈다. 88년 우리 전통문화를 전승·개발하자는 취지에서 사단법인 전통문화연구회를 발족시켰고, 99년엔 여성학 연구자들을 유교학회에 초청해 유학과 페미니즘의 접점을 모색했다. 그는 기조발제문에서 “남녀 평등의 가치를 유교에 수용하면 유교의 진리는 영원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다들 힐링을 외치지만 진정한 마음의 치유는 얻기 어려운 시대. 고전을 통해 참된 삶과 행복의 비결을 연구해온 유학계의 태두 안병주(80·사진)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유학자 미산(嵋山) 안인식(安寅植) 선생의 아들인 안 명예교수는 어릴 적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뒤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했다. 전통과 근대 한학 연구를 겸비한 원로 유학자인 그는 “행복은 오히려 근심하고, 슬퍼하는 속에서 오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스트레스를 극복하면서 맛보는 행복감(엔도르핀)이 보통이 아니라고 역설하면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권했다.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대개 마음이 약하지만 악한 사람들은 마음이 강해 오래 사는 경우가 많다”며 “악과 싸울 능력을 가지면서 착해야 한다. 권선징악(勸善懲惡)하려면 강해져야 한다”고도 했다. 안 명예교수와의 만남은 지난 주말 삼청동의 한 고즈넉한 화랑에서 이뤄졌다.
-부처님은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했다. 행복이란 게 과연 있는 것인가.
“맹자는 ‘사람이란 우환 속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으나 안락에 빠지면 죽는다’고 했다. 행복은 찰나적인 쾌락과는 다르다. 행복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땅값이나 주식골동품값이 오를 때, 책을 읽고 상승감이 올 때, 자식이 잘되었을 때, 신에 귀의하여 종교적 희열을 느낄 때 행복이 각기 다르다. 맹인 여성이 건축가 가우디가 세운 집을 만지고 행복의 미소를 지을 때처럼 행복은 다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톨스토이가 쓴 『인간에게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라는 작품이 말해준다. 지주가 농부에게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달려 원위치에 오면 그 땅을 거저 주겠다’고 한다. 농부는 더 많은 땅을 가지려고 심장이 터지도록 뛰다 죽고 만다. 농부를 땅에 묻던 하인은 ‘인간에게 필요한 땅은 2m밖에 되지 않는데’라며 혀를 찬다. 행복은 지족(知足), 즉 만족할 줄 알고 탐욕을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
-톨스토이 이야기를 더 해달라.
“톨스토이의 사상은 전쟁 부정과 지족의 철학이다. 그는 노자철학에 심취하여 노자의 『도덕경』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노자는 ‘탐욕의 노예가 되지 말고 만족하라’고 말한다. 도덕경 29장엔 ‘심한 행동을 하지 말고, 사치하지 말고, 거만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쓰여 있다. 58장엔 ‘행복 속에 재앙이 숨어 있고, 재앙 속에 행복이 숨어 있다’고도 했다.”
-인연에 대해선 어떤 철학이 있나.
“‘인(仁)’과 ‘서(恕·용서)’가 중요하다. 仁은 ‘사람(人)이 하나가 아니고 둘(二)’이라는 뜻이다. 恕는 ‘마음(心)이 같아야(如) 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다. 인연에 대해선 동서를 초월한 황금률이 있다. 성서에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누가복음 6장 31절)고 돼 있다. 어진 사람은 자신이 일어서고 싶으면 남도 서도록 돕는다. 논어는 ‘남이 내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 좋은 인연을 만들고 행복해지려면 우선 남을 배려해야 한다.”
-배려란 무엇인가.
“40년간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수학자 C W 엘리엇 교수는 ‘남을 배려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도록 하라’고 했다. 仁의 실천과 같은 것이다. 도쿄대 총장을 지낸 가야 세이지(茅誠司) 교수는 졸업식 축사에서 ‘가능한 친절하자. 친절이 사회적 습관이 되도록 하자’라고 말했다. 여기서 시작된 ‘작은 친절 운동’은 2008년 288만 명이 참가하는 전국적 캠페인이 됐다. 습관적인 작은 친절은 행복한 미소를 만들어낸다. 작은 친절이 두루 사회에 퍼져야 정의와 행복이 실현된다.”
-인간은 행복감을 느꼈다가도 금방 불행하다고 말할 만큼 변덕스러운 존재인데.
“노자는 행복이란 걸 ‘화’와 ‘복’을 포괄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도 있다. 행복이라 생각한 게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행복했을 때 거만하게 행동하지 말고, 함부로 남을 대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근심하고, 슬퍼하는 가운데 즐거움이 생긴다. 100세 이상 산 분들의 책을 보면 ‘스트레스는 약간 있는 게 좋다’고 한다. 약간의 스트레스를 극복하면 엔도르핀이 나오는데 그 행복감이 보통이 아니라는 얘기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는 것보다 헤어지는 게 더 어렵다는데.
“춘추전국시대 무장 악의는 ‘군자는 헤어질 때 험한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했다. 생각과 이상이 달라 헤어질 뿐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사람을 만나는 데는 한 시간, 사랑하는 데는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는 말도 있다.”
-청년기와 장년·노년기를 살면서 주의해야 할 점은.
“젊을 때엔 혈기(血氣)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여색(女色)을 경계해야 하고, 장성해선 혈기가 한창 강해지므로 싸움을 경계해야 한다. 늙어선 일반적으로 원만하고 성숙한 존재가 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늙을수록 욕심이 커진다. 노년이 되면 뭔가를 얻거나 가지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0세 시대’가 됐다. 나이 든 뒤에도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0년 전 큰 병을 앓고 난 뒤 깨달은 게 있다. 책 읽는 습관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래 살면 좋지만 치매나 중풍에 걸리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이 고생하게 된다. 따라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00세 넘은 사람이 치매에 안 걸리려고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나도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 러시아어 공부를 했다. 죽는 순간 옆에 책을 놔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내 나이가 80을 넘겼는데도 재미있는 책을 읽다 보면 밤을 새우지만 결코 힘이 안 든다. 독서는 치매 예방에 좋다. 특히 사람 이름이 많이 나오는 역사책을 원문으로 보면 유익하다. 무엇보다 노년에 행복하려면 탐욕을 버려야 한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은 지혜는.
“남남이 한집에서 가정을 이루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부부는 서로를 배려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친구는 자신이 배울 수 있도록 한 계단 높은 이를 사귀고, 부인은 한 계단 낮은 곳에서 맞이하는 것이 가정 평화에 좋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 조상의 슬기다. 결혼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건 사람이 돼야 한다는 거다. 양가 부모를 서로 존중하고, 자식들도 서로 아껴주어야 한다. 부부가 사랑도 하면서 서로 배우려고 노력할 때 이상적인 집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재물이나 권력은 너무 가까이하면 타 죽고 너무 멀리하면 얼어 죽는다고 한다. 옛 성현의 지혜는 어떤가.
“노자의 『도덕경』 44장에 보면 ‘명예와 생명 중 어느 쪽이 더 절실한가? 또는 생명과 재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마음 아픈 것인가? 등등의 질문이 나온다. 권력이나 재물·명예를 몹시 사랑(深愛)하면 반드시 크게 망한다고도 했다.(탐욕은 문제지만 최소한의 물질은 있어야 사는 것 아닌가?) 당연하다. 맹자는 ‘백성들이 산 사람을 먹여 살리고, 죽은 사람의장사를 잘 지내 여한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부를 축적한다기보다는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는 복지국가일 것이다. 민본정치의 목적은 백성의 행복 보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본인의 노력도 중요하다.”
-인생에서 성공을 부르는 요소는 무엇인가.
“성공과 실패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다만 무엇을 이루려면 목적을 향해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맹자는 외국어를 배우려면 그 나라 시장에 가서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그 나라 말밖에 쓰지 못하게 된다는 거다. 즉 무엇을 시도하든 집중해야 한다는 걸 강조한 것이다.”
-인생에서 시련과 좌절을 이겨내려면.
“시련에 빠진 이들은 사마천을 배워야 한다. 궁형(宮刑·고환절개형)을 당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사마천을 일으켜준 건 역사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그가 쓴 『사기』는 130권의 대하 역사서이자 문학 분야에서도 필두로 올라갈 책이다. 맹자도 성공하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한 전제로 시련의 극복을 들었다.”
-‘사주팔자는 신경안정제’라고 주장했다.
“‘운’이라는 건 거역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노력을 통해 운도 바꿀 수 있다는 자기창조적 의식이 있으면 운명을 이겨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사주팔자는 신경안정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좋다면 믿고, 나쁠 땐 조심하면 된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뜻인가.
“인간은 마음 가는 대로 산다. 그러기에 어떤 마음을 먹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은 시련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무너지는 것이다.”
-세상사를 보면 착한 사람이 일찍 숨지고 나쁜 사람이 오래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의지가 강한 사람이 오래 살고, 의지가 약한 사람은 일찍 죽는다.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대개 마음이 약한 사람이 많다. 악한 사람들은 나쁘지만 마음은 강하다. 악과 싸울 능력을 가지면서 착한 것이 중요하다. 권선징악하려면 강해져야 한다. 공자가 고난을 수없이 당했음에도 여유만만하게 살 수 있었던 건 본인이 세상을 바로잡아야 할 천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고 끝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고통을 받는데.
“사물이나 사람이나 똑같을 수 없는 게 숙명이다. 어떤 힘으로도 숙명을 동일하게 만들 수는 없다. 남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없지만 나에게 있는 것이 남에겐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세상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교라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마음에 불행이 찾아올 뿐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의 지혜를 알려달라.
“즐거움과 올바름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 올바른 선택을 한 뒤에는 흔들림 없이 지켜야 한다. 즐거움이란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바쁜 사회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는 사람이 많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맹자가 파문을 당할 뻔한 상황이 있었는데 후대의 사상가 주자는 맹자를 끝까지 옹호했다. 이유는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겐 엄격하고 타인에겐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는 주자의 생각과 맞았던 거다. 퇴계 이황 선생도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엄격했지만 남에겐 관대했다. 일례로 둘째 며느리의 개가를 허락했다. 당시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공(公)을 해치는 사(私)를 없애주기 바란다. 그러려면 지역과 계층·세대를 넘는 대통합, 즉 민족 대통합을 이뤄야 한다. 또 사보다 공을 앞세우는, 능력 있는 인물을 발탁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국민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 할 일이 있다면)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우리 사회 풍토부터 극복해야 한다. 그 책임은 위정자에게 있다. 마오쩌둥은 6·25 전쟁에서 아들을 잃었다. 부하들이 아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자고 했지만 마오쩌둥은 ‘다른 병사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고 일축했다. 결국 지도자 계층이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이 따라가고 행복지수 높은 사회가 실현되는 것이다.”
-인간은 죽은 뒤 무엇으로 남는 건가.
“이 문제에 있어선 노장(老莊)적이다. 마라톤 경주에서 2시간 몇 분이면 다 들어온다. 그런데 경주가 끝났는데도 안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5~6시간 뒤에야 들어온다. 그 때까지 기다려준 이들은 가까운 친지 몇 사람이다. 그 사람들에게 ‘저 사람 착하게 살려고 애쓰고 간 사람이었다’고 생각되면 충분하다고 본다.”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대 철학자 가운데 죽음의 문제를 가장 근원적으로 응시한 이가 장자다. 장자는 죽음을 삶의 종말이라고 보지 않고 새로운 생에 앞선 전생(轉生)의 종말로 보았다. 죽음 뒤의 세계는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평등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우는 가족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 위대한 변화의 작용을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생과 사를 같이 보는 이런 사생관을 가지면 어려운 일이 닥쳐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평생 동양철학을 했다. 독자들에게 글귀 하나를 권한다면.
“상선약수(上善若水)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최상의 선은 남보다 아래로 내려가는 겸허한 삶이다. 물 같은 것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끝없이 내려가면서 만물에게 은택을 주고 베푼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이름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착하게 살다 갔다는 말을 듣기도 쉽지 않다.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다 간 사람’이라 기억될 정도면 그 인생은 괜찮은 인생이다. 올바른 인생은 정직 위에서만 이룰 수 있다(人之生也直).”
대담·글=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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