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 잡문집」
빨간 청어
청어(ニシン)라는 생선을 꽤 좋아한다.
사전을 펼쳐보면,
청어는 '二審'이나 '二心' 같은 별로 눈에 확 띄지 않는 어휘들과 나란히 늘어서 있는데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청어 초절임은 맥주 안주로 더할 나위 없이 최고다.
청어는 조금 희한한 생선이라 평소에는 자주 먹지 않지만, 이따금 못 견딜 정도로 당겨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청어 메밀국수 같은 음식이 일단 먹고 싶어지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당장 가까운 국숫집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막상 먹고 나서 크게 만족하거나 감동하느냐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고,
결국은 그저 '청어 메밀국수'일 뿐이다.
그런 면이 청어라는 생선의 한계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점일 수도 있다.
청어는 영어로 헤링(herring)이라고 부른다.
예전에 청어같이 생긴 키스 헤링이라는 화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Harring이라는 철자로 청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데도 키스 헤링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반사적으로 청어 초절임이 당겨 곤혹스럽다.
이런 일로 곤혹스러워 하는 사람은 아마도 일본을 통틀어 나 혼자일 테지만.
영어사전을 보면, 일본어사전에 비해 청어에 관한 언급이 상당히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청어는 그만큼 영국 국민의 생활과 관련이 깊은 물고기일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대서양이 '청어 못(herring pond)'이라고 불릴 정도니까.
예를 들어 영어로 '청어처럼 죽었다'는 말은 '완전히 숨통이 끊어졌다'는 의미다.
왜 그럴까? 아마도 대부분의 영국인이 죽은 청어밖에 못 봤기 때문일 것이다.
'청어처럼 thick하다'라는 말은 빽빽하게 밀집해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무리 지어 한꺼번에 물밀듯 몰려오는 데서 비롯된 말이겠지.
일본에서 말하는 '쓰기 아야'는 헤링본, 즉 '청어의 뼈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맨 처음 산 양복이 반 재킷(VAN Jacket)의 헤링본 슈트였다.
셔츠는 물론 흰색 버튼다운, 넥타이는 검은색 니트 타이였다.
아이비스타일이 한창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가 그립다.
청어와 내 인생은 거의 관계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이따금 얽히는 것 같다.
꽤 자주 쓰이는 영어 표현 중에 '빨간 청어(red herring)'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구태여 하자면 '원래 목적인 본론에서 화제를 돌리기 위해 부러 꺼내는,
흥미는 가지만 실제로는 별 의미 없는 내용'이라는 의미다.
전에 번역서를 읽다가
"너, 그거 완전히 레드 헤링이야"라는 문장을 맞닥뜨린 적이 있는데,
모르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꽤 많이 쓰는 말인 데다, 일본어로는 그에 대응하는 표현을 찾을 수 없으니
차라리 그대로 일본어로 도입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너, 그건 완전히 빨간 청어야'라는 식으로.
그렇다면 '빨간 청어'는 왜 그런 의미가 되었을까.
줄곧 모르던 사실인데 지난번에 언뜻 생각난 김에 어원사전을 찾아보았다.
그에 따르면, 옛날 영국에서 여우잡이 사냥개를 키울 때,
여우 냄새가 밴 길목에 훈제 청어를 속임수로 두고 개의 후각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청어 냄새에 의존하여, 쓸데없이 갈팡질팡하지 않고 오로지 한길로 여우만 쫓도록 엄격하게 길들인 셈이다.
그래서 빨간 훈제 청어=목적에서 일탈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것이라는 의미가 된 듯하다.
어원 하나를 새로 알면 조금 똑똑해진 기분이 든다.
실제로 별 도움이 되는 지식은 아니지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은행에 나갔다가 혼자 훌쩍 들어간 맥주집에서
생맥주에 곁들여 청어 초절임을 먹다 보면 기분이 거나하게 좋아져서 볼일 자체를 잊어버릴 때가 있다.
'자,그건 그렇고, 오늘은 뭐 하러 나왔더라?' 이런 것도 분명 '빨간 청어'의 하나겠지.
이런 글을 쓰다보니 문득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하다. (p388)
※ 이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무라카미 하루키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역자 - 이영미
비채 - 2011. 11. 12.
[t-12.05.06. 20210513-17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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