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2011. 8. 12.
[허연의 명저산책]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 숨어 있다.
'프루스트 현상(The Proust Effect)'이라는 게 있다.
특정한 냄새나 맛, 소리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기억이 다시 살아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 말은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프루스트의 유명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성인이 돼 가는 주인공이 어느 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는 순간 마음이 기쁨으로 넘쳐 오르면서 예전 기억들이 떠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유명한 장면 때문에 '프루스트 현상'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생겨난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다.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 같은 투로, 귀중한 정수를 채우고, 그 즉시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삶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하였다.'사실 과거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에 있는 게 아니다.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 숨어 있다"는 프루스트 말처럼 지나간 일들은 억지로 떠오르기보다는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갑자기 떠올라 나를 엄습하는 때가 더 많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전체 7편으로 구성된 소설인데 주인공은 나(마르셀)다. 1인칭 고백 형식으로 부르주아 출신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 '나'는 풍부하고 예민한 공상가적인 인물로 사교계를 출입하며 인생의 어두운 이면에 절망한다. 사회적인 명성, 여인에 대한 동경 등에 회의를 느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마들렌 과자를 먹다가 무의식적으로 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자각한다. 시간의 위대함을 알게 되면서 그가 찾아낸 것은 예술적 자아다. 유추하자면 예술만이 시간의 파괴력을 이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코드는 시간성이다. 시간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 이야기들이 모이는 곳은 '스완네 집' 같은 하나의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이 몽환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보니 줄거리를 말하기조차 모호하다. 무슨 기하학 퍼즐을 보는 것 같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시간은 전지전능하다. '나'와 주변 모든 인간들은 시간 앞에서는 그저 덧없이 흘러가는 존재일 뿐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동경했던 사람들이 늙고 초라해진 모습으로 게르망트가 파티에 참석한 모습을 길게 묘사한다. 소설에서 인생은 언제나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일 뿐이다.
시간에 풍화되어 버린 인생을 관조적으로 그리다 보니 소설은 철저하게 역동적인 사건이 아닌 내적 풍경을 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프루스트 소설의 묘한 매력이다. 물론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집중해 읽으면 한 구절 한 구절 잠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교향곡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현대소설의 원전이라고 할 만큼 모든 소설적 실험이 숨어 있다. 무의식에 대한 탐구, 액자 형식의 시도, 회상에 기댄 의식 흐름 기법, 시간성과 공간성을 무시한 소설적 구조 등은 요즘 소설가들도 쉽게 운용하기 힘든 기법들이다. 그 모든 것을 대성당을 짓듯 한 편의 소설에 담아냈으니 그 가치는 대단하다.
프루스트는 천성적으로 병약한 공상가였다. 심한 천식 환자였고, 한때는 지나친 쾌락을 추구하기도 했으며, 어머니 죽음에 충격을 받아 평생 외톨이로 지낸 사람이었다. 그 외톨이가 방에 처박혀 어린 시절 낙원을 회상하면서 10년 동안 매달린 소설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글 - 허연 기자 @ heoyeonism (트위터 계정)
출처 - 매일경제 & mk.co.kr,
[t-11.10.29. 20211020-171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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