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 - 그건 사랑이었네」
120살까지의 인생 설계
작년에 종합병원에서 종합 건강 검진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검진 결과를 전화로도 통보해 준다고 해서 전화를 했더니
담당 의사가 면담을 해야겠으니 다음 주 월요일에 병원으로 오라는 거다.
'으음, 왜 오라는 거지? 일부러 보자는 걸 보니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해.'
그 순간부터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온갖 나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만약 얼마 못 산다고 하면 억울해서 어쩌지?'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이 정도면 살 만큼 산 거지. 여태껏 건강하고 재미있게 산 것에 감사해야지.'
'억울하지. 못 다 핀 꽃 한 송이.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억울해도 할 수 없잖아. 사는 날까지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다 가는 수밖에.'
이렇게 머릿속으로 무수한 자문자답을 하다가 급기야는 벌떡 일어나
'10년 안에 꼭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써놓았던 일기장을 찾았다.
그걸 참고하여 한밤중에 본격적으로 개정판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만들어 보았다.
<종목별 리스트>
* 예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아직까지 못 한 일. 백두대간 종주 / 각 대륙의 최고봉 등정 /
배 타고 지구 세 바퀴 반 돌기 /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 100인 파워 인터뷰.
* 새로 하고 싶은 일. 구호 현장에 기반을 둔 인도적 지원에 관한 정책 연구 / 세계의 성지 순례 /
세계의 국립 공원, 특히 북미의 국립 공원 여행 / 학교나 연구소에서 체계적인 후진 양성
* 더 배우고 익혀야 할 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강의하고 글 쓰기 / 현장 구호 요원 후진 양성 /
단소, 중국어, 스페인어 좀 더 잘하기.
* 꼭 가보고 싶은 나라. 쿠바, 브라질, 그리스, 모로코, 알제리, 리비아, 예멘, 스칸디 네비아 반도 3국.
위의 일들을 나이대에 따라 배치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아직 체력이 왕성할 오십 대에는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
육십 대는 경험과 지식이 무르익었을 테니 후진 양성과 글쓰기,
칠십 대는 다리 힘은 없지만 정신 세계가 풍성할 테니 영성의 시기,
팔십 대 이상은 보너스로 사는 시기니까 가진 것을 잘 나누어 주는 시기로 정해보았다.
<나이별 리스트>
* 50대. 구호 현장 최전선에서 일하기 / 백두대간 종주 / 각 대륙의 최고봉 등정 / 배 타고 지구 세 바퀴 반 돌기..
* 60대. 후진 양성, 후진 교육 / 강의, 글쓰기에 전념하기 / 못 다한 오지 여행 /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 100인 파워 인터뷰
* 70대. 성지순례 / 세계의 국립공원 여행.
* 80대 이후. 조용히 책 보며 지내기 / 가진 것을 몽땅 나누어 주기.
이런 일들을 하려면 평소에 건강한 육체, 정신,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거다.
그래서 만들어 본 리스트.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평상시에 해야 할 일 리스트>
* 매일매일 자기.
* 매일 성경 읽고 묵상하고 일정한 시간에 기도하기
* 운동 및 아침 식사.
* 정리 정돈(특히 일기장, 편지, 사진)
* 하루에 한 사람 이상에게 안부 전화하기.
휴, 지금 목록에 있는 것만 다 하려 해도 120살까지는 살아야 할 텐데,
담당 의사가 내 목숨이 딱 1년 남았다고 하면 어쩌지? 어쩌긴, 그동안 제일 벼르던 일부터 해야지.
그러면 오래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백두대간 종주와 세계 최고봉 등정을 해야겠다.
좋아하는 산에서 인생을 차분하게 돌아보고 정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
어쨌든 종횡무진 씩씩하게 다닐 거다.
죽을 날짜 받아 놓았다고 지지리 궁상을 떨며 침대에서 죽음을 맞을 수는 없다.
6개월 남았다면 세계 성지순례를 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하고 같이 가고 싶다.
그래서 하느님의 숨결을 좀 더 가까이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느끼고 싶다.
또 그동안 날 위해 기도해 준 분들에게 은혜의 기도 빚도 갚고
모든 이의 마음의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해 간절한 기도도 올리고 싶다.
하느님께 인생이란 무대에서 좋은 배역을 맡겨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리면서
인생을 마감하는 건 훌륭한 마무리라고 생각한다.
딱 한 달 남았다면?
그렇다면 돌아다니지 말고 책을 써야겠다.
그 책에는 사랑에 대해서만 쓸 거다.
하느님에 대한 나의 사랑, 시대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조국, 가족, 친구,
이성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랑을 잘 정리하고 싶다.
그 책을 통해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덕분에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려주고 싶다.
온갖 시나리오를 썼다 지우면서 기나긴 주말을 보내고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담당 의사는 위산과다에 약한 탈진 증세가 있고 뇌혈관 장애의 염려도 남아 있으니 부디 조심하라며,
전화로 말하면 그냥 흘려들을 것 같아서 직접 만나자고 했단다.
그러고는 이제 본격적인 볼일을 본다는 듯 A4 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우리 딸이 왕팬인데, 사인 한 장 해주실래요?
선생님 사인만 받아다 주면 이번 시험 공부 열심히 하겠다네요. 하하하."
허걱, '시한부 인생' 해프닝은 담당 의사의 고등학생 딸 학업 진작용 사안을 해주는 것으로 싱겁게 끝났지만
그 학생 덕분에 일기장 구석구석에 적어놓고 누군가에게 흘려 이야기했던 그 많은
하고 싶은 일들을 한데 모아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마치 컴퓨터 바탕화면에 중구난방으로 깔려 있던 파일들을 상황별, 나이별 폴더에 넣고
제목까지 붙여 일목요연하게 만들어둔 것 같다고 할까?
제대로 얼개를 갖춘 인생 설계도를 손안에 넣은 기분이었다.
이 설계도만 있으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구잡이로 헤매지는 않겠지, 하고 싶었는데
기억 나질 않아 못 했다고 억울해할 일은 없겠지, 생각하니 마음이 놓었다.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고 사는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이 제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가라는 뜻이라면 내 대답은 예스다.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제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은 많고도 많다.
세상에는 계획과 열정과 노력만으로 안 되는 일도 많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루는 24시간 뿐이고 에너지와 돈도 한정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가장 하고 싶은 일에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을 총동원하여 집중한다면
적어도 그 일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달나라에 가고 싶다는 식의 허황된 일만 아니라면 말이다.
내 또래 사람들은 내 리스트를 보면서 도대체 그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이 뭐가 그렇게 많냐고,
죽기 전에 반의반의 반도 못할 거라고 말하곤 한다.
나이 들면 이런 구체적인 계획이 오히려 사람을 주눅 들고 기죽게 하는 거라는 사람도 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가끔 이거 할 거다, 저거 할 거다 수없이 이야기하고 다닌 일을 못 했을 경우
얼마나 민망하고 창피할까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잠깐의 망신이 두려워서 하고 싶은 일을 지례 포기하고 계획마저 세우지 않을 수는 없다.
나도 나이가 주는 물리적인 한계는 인정한다.
이런 야멸찬 계획을 세워둔 나 역시 작은 글씨 읽기가 점점 힘들어질 테고
깜빡깜빡 하는 일도 점점 많아질 테고, 산을 오를 때 쉬어가는 횟수도 잦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은 불편함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하는 결정적이며 치명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실체가 있는 한계라면 극복할 방법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글씨가 안 보이면 안경을 쓰면 되고 깜빡거리면 외우는 대신 잘 적어두면 되고,
산에는 시간을 충분히 두고 가면 되니까.
이 나이에 계획하는 일 자체가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큰 이유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싱싱했던 젊음이 사라진다는 두려움,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을 잃어간다는 두려움,
경제적으로 곤란을 당할 거라는 두려움,
주위에 남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두려움....,
이것이 나이 드는 두려움의 정체라면 나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지금 정도의 체력으로 평생 살면 좋겠다는 욕심은 있지만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잃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없다.
애초부터 나는 외모가 경쟁력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일 거다.
'미인 프리미엄'을 한껏 누렸던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얘기겠지만,
몇십 년 만에 여고 시절 같은 반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학교 다닐 때도 군계일학으로 빼어나게 예 뼜는데 여전히 눈에 번쩍 띄는 미인이었다.
우리는 근처 찻집으로 갔다.
어둡던 바깥에서 환한 실내에 들어오니 이 친구가 농담처럼 하는 말,
"여긴 너무 밝아서 주름이 다 보이겠다. 구석에 가서 앉자."
구석 자리에서 차를 마시면서도 자기를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라며
마치 주름이 보이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과민 반응을 보였다.
이 친구, 지금도 매일같이 미인 소리 듣고 살 텐데 뭐가 저리 불안할까?
헤어져 돌아오면서 세상 참 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들 나이 들어 생기는 얼굴 주름이 반갑겠느냐마는 미인 프리미엄이 없는 나는
그 친구처럼 그런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나를 믿고 의지하는 형제들 외에 모든 인간관계의 청량보다도 더 든든한 친구가 하나 있다.
나이 들면 느슨해진다는 모든 인간관계를 대신하고도 남을 그 친구 때문에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서 나는 완전히 자유롭다.
그 친구가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도 물론 그렇게 할 거다.
단 하나 걱정이 있다면 그 친구가 나보다 먼저 죽으면 어쩌나 하는 거다.
그 친구는 수녀였으니 잘 견뎌내겠지만 나는 그녀를 잃은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는 나이 드는 것이 정말 하나도 두렵지 않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있나. 나도 사람인데.
내가 정말로 무섭고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후지게 나이 먹는 것이다.
내가 절대로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지 하는 모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내가 왕년에는'을 말머리 삼아 옛날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사람,
자기 생각과 경험이 세상 전부이고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다.
나이 들수록 자신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니까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자기 경험이 세상에서 유일한 것인 양 절대화, 일반화하는 것은 정말 들어줄 수가 없다.
나는 특별히 이 점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세계 오지 여행과 긴급구호 활동 자체가 매우 특별하고도 드문 경험이므로
그것을 절대화하거나 일반화할 소지가 너무나 다분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자기 손에 있는 것을 쥐고만 있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움켜쥐고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추하고 초라하며 딱해 보인다.
명색이 구호팀장이었는데, 그렇게 나이 들면 절대로 안 된다.
그래서 난 '주자학파'가 될 생각이다.
내가 가진 경험이든 돈 이든 시간이든 에너지든 기꺼이, 아낌없이 나눠 '주자'는 주자학파!
내가 생각해도 멋진 이름이다.
이 일을 어떻게 즐겁게 할 것인지는 좀 더 고민해 볼 작정이다.
닮지 말아야 할 이 두 가지 모습을 늘 염두에 두면서 내 식으로 나이를 먹고 싶다.
죽을 때까지 뭔가를 배우고 끊임없이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을 업데이트 하며 살고 싶다.
마지막 순간까지 성장을 멈추지 않는 바람의 할머니가 되고 싶다.
일본의 소노 아야코라는 사람은 삼십 대에 '이렇게 나이 먹지는 말자'라는 내용으로
<계로록戒老錄>을 써서 공전의 베스트셀러이자 최장기 스테디셀러를 기록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자기가 칠십 대에 이르러 살펴보니
어느새 자신이 그 책에서 그토록 경계한 노인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더란다.
삼십 대부터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책이 널리 읽히는 바람에 보이지 않는 시선의 감시까지 받은 사람도 이렇다는데,
나 같은 사람은 말해 무엇하랴.
그러니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정기적으로 업데이트 하면서 나이가 잘 들어가고 있는지도 함께 점검해 봐야 한다.
이런 일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이번처럼 가상 시한부 인생을 살아보는 게 딱인데......,
그 의사에게 특청을 넣어볼까?
이번처럼 가끔씩 나를 긴장시키고 겁먹게 해달라고,
그때마다 사인 한 장씩은 군말 없이 해드리겠다고. (p41)
※ 이 글은 <그건 사랑이었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한비야 - 그건 사랑이었네
푸른 숲 - 2009. 07. 06.
[t-10.08.28. 230801-1714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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