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열삽화집《익숙한그집앞》
[210403-163611]
프롤로그
내 손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만든 그림책 하나를 갖는 것.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품어 온 "꿈" 같은 것이었다.
그 꿈 때문이었을까.
마땅히 살 책이 없으면서도 많은 시간 서점 안을 서성거려야 했고
인사동을 지나면서 괜한 설렘으로 스케치북을 샀던 것도 꽤 여러 번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늦은 밤 시간에 전화를 걸 때가 없거나
긴 시간 동안 사랑을 해 보지 못한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작업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그림 그릴 책상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부리나케 책상을 들여놓았다.
책상 위 한켠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글과 그림을 본다는 건 이제껏 내가 맛볼 수 없었던 기쁨이었다.
그렇게 새벽을 맞아 찬물로 세수하고 나면
가슴 한가운데로 밀려오는 행복을 만나곤 했다.
부끄러움이 먼저 고개를 들기도 하지만
낙서처럼 끼적거린 글과 그림들, 그것들을 묶어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므로 나는 두 가지 소원을 이른 셈이다.
내가 만든 그림책을 갖는 것, 그리고 연주음반을 내는 것.
이제 아주 어려서부터 꾸어 온 꿈을 실현하게 됐으니
앞으로 십여 년 동안은 그다지 해 보고 싶은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녀에게 반할 때(사랑 에서)
내가 그녀에게 운동화를 사 주었다.
그걸 머리맡에 두고 흘끔흘끔 쳐다보느라 잠을 못 잤던 그녀, 나는 그녀에게 반했다.
전화기 속 그녀는 나한테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쉬지도 않고 계속 따졌다.
그런데 스윽 연습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너 적어 놨니? 물었더니 맞다고 했다. 그녀의 준비성에 반했다.
늦은 시간 집 앞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집에서 입던 옷차림 그대로, 화장기 없는 맨송맨송한 얼굴로 나왔다.
나만 볼 수 있는 그녀의 모습에 반했다.
작업하느라 밤을 꼴딱 새우고 다음날 눈을 떴더니 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눈부신 모습에 반했다.
이주일 아저씨가 된 그녀, "콩나물 팍팍 무쳤냐?" 나는 한 번만 더 해달라고 무릎 끓고 빌었다.
그녀의 원초적 유머에 반했다.
노천 카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흉보는데, 그녀와 내가 똑같은 걸 지적할 때 그녀의 독설에 반했다.
예쁜 발에 발찌가 매달려 찰랑거릴 때 그녀의 발에 반했다.
그녀와 설렁탕을 먹으러 갔다. 깍두기를 국물에 타 먹는 그녀를 보면서 그녀의 식탐에 반했다.
우린 수다가 필요한 사람들(외로움에서)
누군가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그 바람이 너무나도 절박할 경우엔,
사실 그 누군가가 아무나여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굳이 말을 걸어 주지 않아도 좋다.
아무 말이 없어도 그냥 나를 이해해 준다는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
어쩌면 횡설수설 두서 없을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을 정도면 된다.
왠지 무슨 말인가 하지 않으면
내 속에 쌓인 말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
우리가 그 감정을 사우나시킬 수 있는 방법은 "수다" 다.
수다는 적어도 외롭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수다를 자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또한 정겹다.
그렇게 우린 누구나 수다가 필요한 사람들이기에
누구의 수다든 들어 줄 여유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도 그 사람의 눈치를 안보고
속 편히 수다 떨 수 있게끔 그 기회를 저금해 두어야 한다.
에필로그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을 하는 동안 봄이란 계절은 송두리째 흘러 갔다.
하지만 작업을 하면서 나의 "실없음" 과 "한계" 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도 같아
모처럼 자신을 들어다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왠만해서는 진지해지지 않는 내가 이번 작업 기간에 평생 진지해질 것들을 다 해 본 것도 같다.
어떤 식이 되었든 이렇게 벗어 보일 수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더 편한 사람이 되는 것.
그렇게 변화된 내가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이 책의 의미를 좀더 값지게 해 주지 않을까 싶다.
- 유희열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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