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모 - 빵 굽는 CEO」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입대 후 며칠 동안 나는 밥도 못 먹을 정도로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쉬는 시간에 피는 담배 한 개비가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었다.
그래도 훈련소에서 지내는 동안은 몸이 고단하나 오히려 잡생각이 덜했다.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는 오히려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인지 허탈감이 더해갔다.
'친구들은 지금 신나게 빵을 굽고 있겠지...'
손바닥에 동그란 밀가루 반죽을 올려놓고 조물조물 굴릴 때의 그 말랑한 감촉이 그리웠다.
팽팽히 부풀어 올랐던 반죽이나 오븐 속에서 노릇노릇 제 빛깔을 뽐내던 빵들이 눈에 선했다.
나는 말수가 없어지고 어두워져갔다.
마음속에선 '제대 후부터 잘하면 되잖아!' 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정작 머리는 비관적인 쪽으로만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의기소침하게 내무반에 앉아 있던 나는 다 헤져 굴러다니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주워보니, 표지가 없어지고 군데군데 뜯어져서 무슨 책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낡은 책을 천천히 들춰보기 시작했다.
원래 두세 쪽만 봐도 졸릴 정도로 책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나였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작가는 자기 인생에 대해 한참 너스레를 늘어놓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삼류 영화 단역배우를 하기도 하고 세일즈를 해 연명하던 하류인생.
지긋지긋하게도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는
마침내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기로 했다.
그런데 철로에서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내가 처한 상황이 최악은 아니지 않은가?'
이 의문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기차를 보내버린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절대적 불행이란 없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얻은 중요한 깨달음을 세 마디로 정리했다.
죽음 외에는 벗어날 길이 없는 엄청난 불행 속에 빠졌다고 여길 때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첫째,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라.
둘째, 최악의 경우를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셋째, 최악의 경우를 개선하라.
그러자 죽음만 생각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방법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록 벼랑 끝에 몰려 있었지만,
도움을 줄 사람도 있었고 헤쳐 나가볼 만한 길도 있었던 것이다.
그 대목에서 나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군대가 끝장이라고 생각하며 좌절했던 내 모습이 얼마나 한심했던가.
건강을 되찾았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군대도, 제대 후에 할 수 있는 일도 있었다.
이것이 최악이란 말인가? 웃음이 나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내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경우가 무엇인지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제대 후 손이 굳어져 아무 기술도 배울 수 없고
아무 데서도 받아주지 않는 가운데 술과 담배에 절어 여인숙에서 죽어가는 것' 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정假定에 불과했다.
나는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절망하는가?
왜 그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일까?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최악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부로 나는 담배를 끊었다.
술도 마시지 않기로 했다.
나는 독해졌다.
남들은 군대 와서 담배를 배운다는데 오히려 나는 하루 만에 담배를 완전히 내 인생에서 잘라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제과 · 제빵에 대한 책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밀가루도 오븐도 없는 혼자만의 제과 실습을 계속했다.
어디든 내가 있는 곳이 빵 공장이 되었다.
책을 도마 삼아, 행주나 걸레를 밀가루 반죽이라고 생각하고 연습했다.
틈날 때마다 볼펜이 버터크림 주머니라고 상상하면서 손바닥으로 쭉 훑어 올렸다가 짜고,
또 쭉 훑어 올렸다가 짜는 연습을 반복했다.
이 연습이 최고의 손 감각을 지켜줄 것이라 믿으면서.
외박이나 휴가를 나가면 친구들이 일하는 공장에 가서 그들을 관찰하며 내 감각을 가늠했다.
문제없었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군대에서 읽은 낡아빠진 책 한 권이 내 인생을 구했다.
술과 담배를 떨쳐버리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게 해준 곳,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해준 곳.
나는 오히려 군대 예찬론자가 됐다.
훈련장까지 따라와 등 떠밀어준 친구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낡은 책 한 권으로 인해 나는 독서하는 습관을 몸에 익혔다.
책 읽기가 너무나 즐거워졌다.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뭐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군에 있는 3년 동안 읽은 책만도 어림잡아 200여 권.
세월이 한참 흐른 후,
표지가 떨어져 나갔던 그 책이 바로 전설적인 자기개발 전문가였던
데일 카네기의 전집 중 『행복론 - 걱정으로부터의 자유』였다는 것도 알게 됐다. (p80)
※ 이 글은 <빵 굽는 CEO>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김영모 - 빵 굽는 CEO
김영사 - 2005. 09. 05.
[t-09.11.15. 211103-15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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