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명상의글(종교.묵상.좋은글./평생 힘이 되는 말

1 - 1. 향기가 멀리 간다고 해서 다 아름다운 꽃은 아니야

by 탄천사랑 2023. 6. 27.

· 「황금날개 - 평생 힘이 되는 말」

 



1 - 사랑은 비 갠 후의 햇살처럼 따뜻하다.
향기가 멀리 간다고 해서 다 아름다운 꽃은 아니야 향기가 오래 머무르지 않고 살짝 스쳐 사라져야만 진정한 향기야
무조건 멀리 간다고 해서 진정한 향기가 아니야. 향기란 살짝 스쳐 사라짐으로써 영원히 존재하는 거야   - 폴 고갱.


1 - 1. 향기가 멀리 간다고 해서 다 아름다운 꽃은 아니야
우리 동네에는 <대동 학생 백화점>이라는 꽤 오래된 문구점이 있다. 
10여 년 전부터 복사하러 다니다가 단골이 되었다. 
그곳에 들릴 때면 나는 복사 코너 바로 옆에 있는 우표 코너를 기웃거리며 복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옛날 우표에서 방금 우체국에서 떼어온 듯한 선명한 색깔의 기념우표들 
그리고 다양한 세계 여러 나라의 우표들을 보고 있으면 재미도 있고 시간도 금방 지나가서 좋았다. 
나는 우표 수집을 하지도 않으면서 때때로 야생화 우표나 희귀 동물 우표 같은 걸 몇 장 사들고 오기도 했다.

우표 가게 주인은 동네 어귀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외형을 한 50대 파마 머리 여자이다. 
복사하러 갈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그 여자는 
아이들에게 우표에 대해 이야기해 주거나 옆 가게 복사 일을 거들어주거나 할 때도 있었지만, 
조용히 책을 읽고 있을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책 표지를 보니 뜻밖에도 한국 현대 단편 소설 선집이었다. 
장편소설도 아니고 단편소설이라니. 좀 미안한 말이지만 그 여자가 보는 책을 한 번도 유심히 본 적이 없었다. 
아줌마들이 시간 때우기로 읽고 있는 책이라면 으레 흔한 여성지 거나, 
별 내용 없는 베스트셀러거나, 아니면 남녀의 불륜을 흥미 위주로 담은 대중소설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얼굴아 확 달아오를 만큼 미안했다.

그 후부터 나는 괜히 관심을 보이며 갈 때마다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어떻게 우표를 파시게 됐어요?”

우표를 좋아해 서란다. 
처녀 적부터 우표 모으기를 취미로 했는데, 그러다 보니 우표 파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여자가 좋아졌다.

가끔 잡지에 난 내 글들을 복사하는 걸 보았는지 글을 쓰느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남편도 글 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소설을 쓴다고 하루 종일 집에서 책 읽고 쓰고 뭐 그리고 있는데, 잘 안 되는 모양입디다.”

우리 엄마처럼 따뜻한 경북 사투리를 썼다.
“우표는 많이 팔리나요?”
“많이는요, 뭐. 그저 먹고살고, 애 아부지 용돈이나 담배 값이나 주고 그라지요.”

좋아서 우표를 팔고, 좋아서 글 쓰는 남편에게 담배 값 줄 수 있는 50대 여자. 행복한 사람이다. 
눈앞에서 하얀 목화꽃 몇 송이가 막 터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특별히 더 가까워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복사하러 갈 때마다 조금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전보다 좀 더 오래 우표를 구경하다 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표 코너에 몇 날 며칠 휘장이 둘러쳐진 채 주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아픈 걸까, 
아님 장사가 안 돼서 그만둔 걸까 궁금했지만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꽤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갔을 때 반갑게도 그 여자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의 걱정스런 물음에 여자는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편안한 얼굴로,
“갑자기 우리 아저씨가 죽어 뿌릿어요.  그래서…….”

남편은 그 동안 조그만 계간지에 등단까지 하고는 집에 틀어박혀 좋아라 글만 쓰며 지냈단다, 
그랬는데 어느 날 퇴근해서 들어가 보니 깜깜한 방에 혼자 엎드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자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다.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그러고는 전처럼 코흘리개들이 묻는 말에 이것저것 우표에 대해 설명해 준다.

“돈도 모자라면서 이걸 달라꼬?  야가 생도둑 놈 아이가.”

말만 한번 그렇게 해볼 뿐, 모자라는 돈을 받고도 여자는 푸근하게 웃으며 아이가 원하는 우표를 건네준다. 
무욕無慾의 표정이 맑고 시원한 샘물 같다.

‘좋아서’ 글만 쓰던 남편은 갔지만,  여자는 오늘도 문구점 한 모퉁이에서 여전히 ‘좋아서’ 우표를 판다. 
나는 우표는 사지 않으면서 매번 공짜 샘물만 길어오곤 했다.

바쁜 일이 있어 한참 만에 그곳을 들렀을 때,  또 그 자리엔 휘장이 둘러져 있고 또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문구점 주인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이 뒤늦게야 그이를 쓰러뜨린 것이었을까.
꼭 병문안을 가 봐야지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 작정하고 다시 들렀을 때 나는 뜻밖의 비보를 듣게 되었다. 
그이가 며칠 전에 세상을 떴다는.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문구점 앞을 지날 때면 나는 그이가 그립다.
병원에 있을 때 한 번 찾아가지 못하고 떠나보낸 것이 내내 갚지 못한 빚처럼 가슴을 누른다.

내 마음에 참으로 아름다운 우표를 많이도 붙여주고 간 그이,
이제 그이는 내 가슴에 조그만 우표 하나로 영원히 붙어 있다.  

 

 

 

※ 이 글은 <평생 힘이 되는 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황금날개 - 평생 힘이 되는 말
북 뱅크 - 2006. 12. 15.

[t-23.06.27.  220611-180314-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