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 신화는 없다」
제8장 – 이 회장도 가정이 있습니까?
아빠의 비결
"이회장도 가정이 있습니까?"
가끔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
참으로 난감하다.
있다고 대답하면 가정이 있는 가장으로서 그렇게 집안을 등한시해도 되느냐는 핀잔을 들을 것이고,
없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과 동떨어진 내용이니 그 문제는 다음에 이야기합시다"라며 넘어가곤 했다.
내 가정은 전적으로 아내가 '경영'하고 있다.
아이들이 넷이나 되지만 나는 3녀 1남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을 한 번도 옆에서 지켜보지 못했다.
줄곧 일과 더불어 살았기 때문에 가족들과 얼굴을 맞댈 시간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현대건설 사장을 맡은 70년대 후반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일 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 나가 있을 때도 많았다.
가족들과 여행도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
아니, 아내와 한 번, 온 가족이 한 번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있기는 하다.
현대건설 사장 발령을 받았을 때
생각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와 고향에 다녀온 일이 한 번 있고,
현대를 언제 떠나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온 가족이 제주도에 며칠 머문 일이 있다.
그러나 두 번 다 나의 일과 관련된 것이었으므로,
순수한 가족여행은 한 번도 다녀오지 못한 셈이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한결같이
"우리 아빠는 너무 자상하세요."라고 말한다.
아이들 담임 선생님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사실 내가 아이들에게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외 출장을 다녀와도 선물 한 번 사다 준 적이 없다.
기내에서 주는 세면도구를 갖다 주는 정도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외국에서 아빠가 사다 주는 선물로 알고 있다가
머리가 커지고 난 후에 그것이 선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아빠는 선물을 사 오지 않는 사람으로 알게 되었다.
이런 내가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버지로 점수를 얻는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아내로부터 받아 두는 아이들 스케줄 표다.
나는 해외 출장이 있을 때면 아내로부터 아이들 몰래 미리 네 아이의 스케줄을 전해 받는다.
소풍 가는 날이나 시험 날짜 시험과목 등은 물론이고
요즘 자주 만나는 친구며, 그 친구의 집안에 대해서까지도 까지고 꼼꼼하게 메모를 해 간다.
(아이들이 이 글을 읽고 '내막'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아빠다. 여기 싱가포른데, 비가 많이 오는구나. 거긴 어떠니?"
이렇게 날씨 얘기를 꺼낸 뒤에 그날 시험 얘기를 한다.
"참, 너 오늘 시험 잘 봤니? 국어하고 수학, 물리, 세 과목 보았지?"
"아니,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나는 웃으면서 수첩을 보고 다음날 무슨 시험이 있는지까지 말한다.
"내일은 영어하고 국사 시험이 있지?"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우리 아빠는 내 시험 시간표까지 다 알고 게실 만큼 내 생활에 관심이 많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셋째 딸한테는 이런 전화를 건 적이 있다.
"내일 소풍 가지?
준비는 다 됐어? 김밥을 싸겠구나. 누가 싸지?"
"김밥은 아줌마가 싸요."
"그래? 엄마 좀 바꿔라."
아내가 전화를 받아도 나는 '애들 김밥 정도는 당신이 싸 줘야지'라는 간섭을 하지 않는다.
날씨와 계절에 관한 가벼운 얘기만 하고 끊는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상상해 본다.
"아빠가 전화로 뭐라고 하시던?"
"응, 아빠가 내일 소풍 잘 다녀오라셔.
그리고 김밥 누가 싸냐고 해서 아줌마가 싼다고 했어"
이렇게 되면 아내는 다른 일을 제쳐놓고 김밥을 싼다.
이건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나중에 집에 가서 확인한 사실이다.
아내에게 직접 김밥을 싸라고 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부부 사이라고 해도 그렇게 직접 말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네 아이 뒷바라지에 교회 봉사활동까지 하느라 최선을 다하고 있는 아내를 꾸짖을 자격이 나에게는 없었다.
더구나 나처럼 남편,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 하는 남자가 무슨 면목으로 그런 얘기를 꺼내겠는가
딸아이에게 '엄마 보고 싸 달라고 해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내는 내가 딸아이에게 왜 그런 걸 물었는지를 훤히 알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나는 전화 한 통화로 내가 바라는 것을 모두 달성한 셈이다.
나는 또 아이들에게 '어떤 친구는 만나지 말아라' 하는 식의 직접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말아라', '안 돼'라는 말을 자주 쓰면 아이들은 듣지 않는다.
오히려 거부감만 커지고, 반복되다 보면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나는 아이들이 사귀면 좋을 친구들 이름을 대면서,
그 친구와 요즘 잘 지내는지, 그 친구의 부모님은 잘 계신지를 물었다.
좋은 친구란 돈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의 아이가 아니다.
정상적인 집안이나 아니냐를 놓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 친구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도 가능한 한 많이 해 준다.
아이가 만나는 애들 중에 나쁜 아이는 이름도 꺼내지 않았다.
자연히 아이는 내가 안부를 묻는 친구하고만 만났고,
그것도 자신 있게 만났다.
간접적인 방법으로 아이로 하여금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를 가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은
'우리 아빠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
내가 어디에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도 다 알고 계실 거야.
나쁜 친구를 만나도 훤히 알고 계실 거야.
나쁜 친구들은 사귀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녀 교육은 관심만 갖고는 안 된다.
세상에 자기 아들딸에게 관심이 없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 관심을 세심하게 전달하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 이 글은 <신화는 없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이명박 - 신화는 없다.
김영사 - 1995. 01. 01.
[t-24.05.14. 20240508-1522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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