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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

정채봉-눈을 감고 보는 길/마음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지요

by 탄천사랑 2008. 2. 24.

정채봉의 에세이 - 「눈을 감고 보는 길

 

 

스님, 
하늘빛과 물빛이 시릴 만큼 푸른 가을날의 아침입니다.
이 맑음 속에서 안녕하옵신지요?

지난 여름은 저한테 빈 계절이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냥 산책길에서 만나는 나무들하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면서 서늘바람이 겨드랑 밑을 파고들자 불현듯 바다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남녘에 내려와 있습니다. 
가을 해변의 길손이 되어 한 며칠 떠돌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은 해수욕객들이 떠나 버린 쓸쓸한 해수욕장에 들렀습니다.
한 번쯤 빨래를 했으면 싶은 비치파라솔 아래에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있자니 
모래능선에 빈 목을 내놓고 있는 소주병이 허무한 옛사랑인 양 외로워 보이는군요.
저는 눈을 돌려 좀더 먼데를 봅니다.

아,
우두커니 서 있는 바위섬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만일 어떤 선사께서 절더러 이 바닷가에 온 뜻을 말해 보라면 

저는 저 우두커니 서 있는 바위섬을 가리키고 싶습니다.
저 바위섬에 파도결이 내놓은 수많은 상흔처럼 저 또한 세파에 부딪치면서, 
그리고 더러는 자해에 의해 빗금져 있는 마음의 상처를 소금물에 적시고 싶어 왔노라고요.

스님,
정말이지 저는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바위섬을 닮고 싶었습니다. 
스님께서도 찾아 주셨던 병상에 있었을 때 저는 참 많이도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었지요.
때때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만, 
저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었던 것이라고 이제야 솔직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병실에, 그것도 중환자실에 있어 본 사람들은 압니다. 
얼마나 생각 자체가 괴로운 것인지를.

생각으로 죽음을 짓고 생각으로 지옥을 이루기도 합니다.
생각에 의해 이별을 하며 눈물짓고, 생각에 의해 오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이런 번뇌가 잠을 쫓아 버린 새 하얀 날밤의 고통은 육신의 아픔보다도 더하더군요. 
그러기에 사람들은 생각의 빈 집인 마음을 숨겼다고도 하고, 
마음을 빼앗겼다고도 하며 마음을 잃었다는 표현도 하는 것이겠지요.

스님,
언젠가 저는 아흔 살이신 피 선생님을 찾아뵙고 이런 속내를 펴보인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제 마음은 상처가 아물 날이 없습니다."

그러자 평생 그만큼 순수하게 살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던 선생님께서 


"정 선생, 
  내가 내 마음을 꺼내 보여 줄 수가 없어서 그렇지 
  천사의 눈으로 내 마음을 본다면 누더기 마음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저 바다 가운데 서 있는 바위섬에 파도 자국이 없을 수 없듯이 
이 세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중에 빗금 하나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바라기는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바위처럼 아린 상처나 덧나지 않게 소금물에 씻으며 살 수밖에요.

오늘은 제 넋두리가 길어졌습니다. 
소슬한 가을바람 탓이라고 생각하시고 미소로써 저의 무안을 씻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내 청안 누리시기를 빕니다.  (p30)
※ 이 글은 <눈을 감고 보는 길>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정채봉 - 눈을 감고 보는 길
샘터(샘터사) -  1999.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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