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 2008. 04. 28. 」
나의 길
금강을 따라 공주에서 부여를 잇는 '백제큰길' 이정표 아래로 화물차 한대가 쏜살처럼 지나 멀리 사라진다.화물차 사라진 그 길을 따라 부여로 오다가 문득 '길'의 운명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나오는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가 차창 밖 봄바람에 흩어진다.
사람들은 모두 제 갈 길을 간다.유년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는 부모와 함께 커가지만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면 본격적으로 제 길을 걷는다.누구는 취직을 하고,어떤 이는 유학을 떠나고,더러는 더 많은 세상을 공부하기 위해 백수로 남고….사연도 가지가지다.각자의 길을 가다가 결국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의 길과 작별한다.
세상은 넓고 길은 많다.어릴적 학교 가던 아카시아꽃 활짝 핀 동구밖 오솔길에서 아이들은 어른의 꿈을 키우고,유라시아를 관통하는 시베리아 횡단로에서 정복자는 대륙의 역사를 바꿨다.세상의 길에는 인생과 철학이 있다.베토벤은 본의 하이리겐슈타드 근처의 울창한 숲 산책로에서 사색하며 '전원교향곡'을 작곡했고,도스토예프스키는 몰락해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바강변을 걸으며 '죄와 벌'을 구상했다.돌이켜보면 길의 역사는 인류문명의 시작과 궤를 같이했다.로마공화정의 갈리아 총독 카이사르는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너 새로운 로마제국시대를 열었고,마젤란과 콜럼버스의 인도양 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은 중세 유럽의 전환점이 되었다.로마에서 시작해 페르시아와 장안을 거쳐 경주와 나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는 새로운 동서양의 문물과 문화 교류의 길을 이어 문명사의 한 획을 그었다.
역경을 헤친 예술가의 길은 어떠했을까.세잔과 모네 같은 인상파는 유럽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피카소와 마티스의 정열은 20세기 미술애호가의 눈을 즐겁게 했다.젊은 날 가난한 화실과 정신병동을 들락거리면서 불후의 명작을 남긴 고흐는 고독한 짧은 생애 속에서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확립하고 파리 근교 와즈의 밀밭 너머 푸른 하늘로 사라졌다.불우한 근대사의 질곡 속에서도 도쿄유학생 이중섭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을 은박지 그림으로 승화시켰고,조선 화강암 같은 투박한 서민의 고단한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박수근은 암울한 시대의 편린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나는 어떤 길을 걸어 왔는가.때로는 벽에 부딪치고 때로는 극복하며 꾸준히,그리고 묵묵하게 화가의 길을 걸었다.앞으로 새로운 세상의 '루비콘강'을 건너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나는 나의 길을 사랑한다.
글 - 최 선 호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화가 http://www.choisunho.com
출처 - 한국경제 2008.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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