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집)최순희 - 캥거루들의 행진/캥거루들의 행진 」
[210104-165426-2]
도무지 일어날 기척이 없다. 도대체 큰애는 언제 일어날 건가?
“어 당신 요새 성질 참느라고 수고 많네. 내가 그랬으면 천둥 몇 번 쳤을 텐데.”
“그걸 말이라고 해. 참느라 사람 죽겠는데!”
5시만 되면 일어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녀로서는 요즘 최대한의 인내로 참고 있다. 아침도 안 먹이고 운동하러 나가기도 그렇고 갑갑해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11시, 천 여사는 드디어 자신이 더 지겨워 아들을 깨웠다. 일중이 부스스 눈을 떴다. 헝클어진 머리, 텁수룩한 수염, 움푹 들어간 눈, 꺼칠하게 야윈 얼굴, 야위니 콧대만 얼굴에 서 있는 것 같다. 긴 목에 툭 튀어나온 목울대며 꼴이 말이 아니디. 울화가 치밀다가도 아들 얼굴만 보면 가슴 한쪽이 뜨끔하게 아프다. 다른 건 못 해줘도 아들 얼굴에 살집부터 좀 붙여야겠다. 누구 아들인데, 한의원 데려가서 보약을 좀 지을까, 돈이 얼마나 들까. 컴퓨터 여자한테 알아보고 가야지. 입고 있는 낡은 회색 T가 아들을 더욱 헐렁하게 만든다. 보기 싫게 중년 태가 풀풀 난다. 장가를 갔으면 벌써. 나가서 산뜻한 티도 두 장 사야겠다.
“어깨 좀 활짝 펴라.”
“밥 생각 없는데. “
“혼자서 만날 끼니 제대로 안 먹어 이렇게 말랐잖니. 늙은이 모양 축 늘어져서 이게 뭐니? 밥이라도 같이 먹자.”
“예 좀 푹 쉬고요,”
에구구 지가 무슨 일 했다고, 꼬박 사흘을 내리 잠만 자고서. 그 전에도 아들은 집에만 오면 잠귀신이 붙었는지 잠만 잤다. 일중이 내려왔다. 서울 살던 큰아들 일중이 내려왔다. 저 차에 노트 컴퓨터, 책, 옷이며 신발을 싣고 왔다. 십 년도 넘게 살은 살림이 자가용 한 대에 달랑이다. 다 버린 모양이다. 하기야 쓸 만한 게 뭐가 있으려고.
“너,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아들은 대답 대신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물건들을 들어다 저 방으로 날랐다.
아들이 옴팍 노는 정말 몰랐다.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신발이 뒤엉긴 손바닥 현관에서부터 좁아터진 원룸 방안 꼴은 가관이었다. 싱크대엔 씻지 않은 냄비와 그릇들이 포개져 있는가 하면 빈 라면 봉지들이 어지럽고 바닥에는 잡지와 신문, 구인지가 널려있다. 담배꽁초도 재떨이에 넘친다. 어찌 이렇게 어질러놓고 사는가? 사내 냄새가 홀아비 냄새가 풀풀 넘쳐난다. 환기를 않아 질퍽하게 배인 역한 냄새에 하마터면 구역질이 넘어올 뻔하였다. 담배 냄새도 장마 때 물기처럼 스며들어 눅진하게 달라붙어 있다. 이불과 베개는 세탁기 구경도 못 했는지 땟국이 질질 흘렀다.
“이렇게 놀고 있냐?”
머리도 수염도 깎지 않아 텁수룩한 모습의 큰아들은 어색하고 민망스러운 표정만 지었다. 서울에 친목계원 딸 결혼식 참석차 혼주 버스로 왔다가 소식 뜸한 아들 얼굴이라도 보려고 찾았더니 이 꼴을 하고 산다. 물론 튼실한 직장 다녀서 돈 잘 벌고 잘 산다고는 생각 않았지만 세상에 이런 꼬락서니 일 줄이야. 옛날에 아들이 대학 졸업하고 처음 직장 다닐 때는 하숙집을 청산하고 천 여사가 새 원룸도 얻어주고 하여 자주 서울을 왕래했다. 반찬이야 장아찌야 바리바리 가지고 가서 냉장고를 채우고 반들반들 정리해주고 왔다. 그러다 직장이 바뀌고 이리저리 이사하고 방을 옮기더니 천 여사가 서울 한번 가겠다면 아들은 자신이 곧 내려온다면서 한사코 말렸다. 아들은 설 추석 명절과 여름휴가에 내려왔다. 용돈은 구경도 못 했지만 지난 추석에는 갓 출고된 새 차를 몰고 왔기에 그래도 저 쓸 만치는 버는가 싶어 조금 마음도 놓이고 하여 사십 줄 아들 결혼 독촉하지 않았던가. 입으로 튀어나오려는 이놈이 놀고먹을 나이는 아직 아니지. 라는 말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언제부터 논거야?
어째 이런 궁상을 하고서 차라리 집에 내려와라!”
그 말이 이렇게 씨가 될 줄이야, 아들은 참말로 짐을 싣고 내려와 버렸다. 본디 일중은 심성이 곱고 착했다. 동생들에게 무어든 양보했다. 그 시절 천 여사 부부가 식당에서 온종일 일하고 늦게 오면 일중이 동생들 먹이고 씻기기를 다 했다. 무엇을 시켜도 예, 하고 다녀왔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 착한 큰아들하고 칭찬했다. 운동이란 운동은 다 하고 건들건들하던 싸움 대장 둘째 이중이, 곱상한 얼굴에 멋이란 멋은 다 내는 말썽꾸러기 셋째, 큰애는 말썽 한번 없이 중. 고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엄마 말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아들이라고. 일중이 서울 명문사립대에 재수 끝에 붙어줘서 그야말로 천 여사 콧대를 얼마나 높게 세워줬는지 모른다, 매달 초삼일을 안 넘기고 하숙비며 잡비를 지극정성 송금했다. 은행 창구에서 등록금 낼 때마다 옆에 사람들 다 보이게 납부금 용지를 흔들며 서울 명문사립대는 등록금이 지방대 비하며 엄청 비싸다고 엄살을 떨었다. 군대 다녀온 아들은 복학하여 남들 이년이면 마칠 대학을 왠지 일 년 반을 더 다녔다. 아들은 고생하고 살아온 부모를 생각해서인지 해외 유학도, 은근히 바랐던 대학원 진학도 입에 비치지 않았다. 아들은 군대에 다녀오고부터 겁이 많아지고 불안해 보였다. 휴가 때 밥 먹으라고 잠을 깨우면‘옛! 알겠습니다!' 하고 스프링 튀듯이 놀라 발딱 일어나 거수경례를 붙여 부부가 화들짝 놀랄 지경이었다. 군대 마치면 나아지려니 했는데 아들은 그 후에도 옛 하겠습니다! 하고 군대식으로 대답하여 천 여사는 아들을 부를 때 평소 보다 목소리를 낮춰 불렀다. 경영학과 출신의 아들의 첫 직장은 국내 제일의 전자회사여서 천 여사의 눈이 이마빡에 붙을 지경이었다. 연수와 실습 기간이 끝나고 아들이 집으로 내려왔다. 아들은 검은 가방에 넣어온 컬러광고지를 잔뜩 펼치었다. 영업을 잘 하여 실적을 많이 올리며 승진이 빠르다고 전에 없이 흥분되어 설명했다. 천 여사는 어느 때부터 맘만 먹고 망설이고 있던 거실의 오래된 TV를 큰 TV로 김치냉장고, 에어컨, 전화기까지 몽땅 아들에게 샀다. 형들보다 먼저 결혼한 셋째에게도 컴퓨터와 김치냉장고를 사게 하여 거금 천만 원도 넘게 아들의 실적을 올려주었다. 셋째네 산 돈도 잔소리 백번은 하고 결국 천 여사가 갚았다. 아들은 승진도 못 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천 여사는 약아빠진 서울 인간들이 본성이 착한 아들을 이용만 하는 게 분하여 악담을 퍼부었다. 천 여사가 골똘히 생각해보니 큰애의 착하고 고운 심성에는 영업직이나 일반회사는 아닌 것 같다. 공무원이 적격이지. 서울 있을 때 노량진 학원에 다니라고 할 것을, 진작 그쪽으로 밀 걸 후회가 되었다. 그때는 회사랍시고 다니지 않았던가. 식탁에서 아들과 마주했다. 쯧쯧, 숟가락질도 어째 다부지지 못하고 저리 허술할까. 이그, 세상없이 착해빠져서 저 입에 들어가는 것도 다 뺏기지. 입만 당기라고 준비한 갖가지 쌈 채소는 손도 안 대고 동탯국만 휘젓는다.
“너도 이렇게 지내기가 답답하지? 좀 갑갑하겠냐.”
“······”
“너, 공무원 한번 도전하는 게 어떠냐?
나이 제한도 풀렸다면. 암만 봐도 공무원이 제일 땡이더라.
좀 편하냐.
다닐 땐 봉급 나와 보너스 나와 잘 살고 퇴직해선 연금이 얼마나 많은데.
외삼촌도 고모네도 연금 받아서 해마다 해외 여행가고 잘 먹고 잘살더라.”
“······”
“너 공부는 잘 했잖니! 늦었지만 학원 끊어 죽어라 악심 먹고 시작해봐.
누가 아냐, 네가 공무원 할 팔자라서 딴 직장은 그리 옴이 붙은 건지.
붙기만 해봐라 네 혼사도 단박 성사될게고, 만날 인물 좋고 학벌 좋다고 하다 그놈의 직장 때문에 깨졌지 뭐.
제일 비싼 학원 끊어라.
뒤 다 대줄 테니 걱정말고 알았지?”
아들은 공무원 고시학원에 등록했다. 천 여사는 아들이 밤낮 드러누워 있지 않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가자 막혔던 억장이 좀 펴졌다. 아들은 일요일엔 온종일 꼼짝을 않았다. 아침 식사도 거른다. 화장실도 가지 않는다. 도무지 기척이 없다. 오늘도 변천만 씨가 나갈 준비를 한다. 허씨 가게 출근이다. 남의 장기 뒤에서 구경하는 게 뭐가 재미있다고 매일 출근 도장을 찍누. 하기야 심심하겠지. 작년까지만 해도 원룸 건설공사장에서 더러 부르더니 요즘은 늙었다고 그러는지 기별이 없다. 잠바를 걸치고 나가려는 남편에게 천 여사가 말한다.
“당신 나중에 철물점 들려 세면대 아래 S자 배관 하나 사 오시구려.
저기 맨션에 그게 탈 났다고 귀찮게 전화질이네.
영수증에 배관만 적지 말고 수리비까지 적어오라고.”
“알았어. 돈 줘.”
“허 참 누가 돈 떼먹나, 엊그제 용돈 줬잖아. 그거 몇 푼 한다고.”
“나 돈 없어.”
“돈이 어디 갔는데, 걸어 나갔어?
새끼 치러 나갔어? 깨지는 장기판에서 또 잃은 거야?”
천 여사 눈꼬리가 단박 이마빡으로 쭉 째져 올라간다. 검은 눈알이 툭 튀어나오려 한다.
“잃을 돈이나 주고 그런 소리 하든지. 사실은 큰애 줬어.”
“큰애 주다니?”
“어깨 축 처져 있는 게 뵈기 싫어서. 그 돈 얼마 된다고, 기죽을까 봐 쓰라고 줬어.”
“에구구, 이 칠칠한 양반아 당신 앞가림이나 하지 내가 미쳐.
큰애는 내가 학원비랑 다 대주고 있다구.
큰애는 서울 전셋돈 한 푼도 안 내놨단 말이야.
내가 뼈 빠지게 벌어 목돈으로 걸은 전셋돈, 월세가 밀려도 제하고 몇천은 손에 쥐었을 텐데 한 푼도 안 내놨다 말이야.
내 속이 확 뒤집어지지만 그걸로 저 용체나 쓰겠지 하고 말 않고 있는데.”
“이 사람아, 2년마다 전세 달세 옮겨 다니느라 얼마나 남았으려고?”
“대학 들어가고부터 아니, 졸업하고도 부쳐준 돈이 얼마인지 당신이 알기나 해?
난 몰라.
아들한테 얻어 쓰든 받아쓰든 맘대로 해.
내가 돈을 낳아 낳느냐고! 집구석에 내 등골 빼먹을 인간들만 득실득실하니 내가 어찌 살아 어휴!”
천 여사는 가슴을 탕탕 치며 획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천 여사는 오늘 못 볼 것을 보았다. 계모임이 있어 참석하여 아귀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다들 노래방으로 갔는데 천 여사만 바삐 중앙병원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남편이 배가 아프다고 전화를 한 것이다. 웬만하면 참던지 약 사 먹고 말지 계모임 나간 아내에게 전화할 사람이 아닌데, 먼저 병원에 가라고 하고 자신도 바삐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고 생전 안 타는 택시지만 길에 널린 게 택시였는데 별꼴로 택시가 안 보였다. 발걸음이 모텔 앞을 지나려 할 때 택시가 한 대 멈췄다. 얼른 가서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택시에서 내리는 사람이 일중이 아닌가. 허벅지를 다 드러낸 짧은 치마 긴 머리 여자를 데리고서. 잘못 봤나 싶어 눈을 후딱 닦고 다시 봐도 일중이다. 천 여사는 자신도 모르게 모텔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여자는 아들의 팔에 달랑달랑 매달린다. 아들은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남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모텔로 들어갔다. 가슴이 뛰고 숨이 벌렁거렸다. 혈압이 푹푹 고속차로 오른다. 아들 나이가 몇인가! 마흔을 넘겼다. 여자를 찾고도 남을 나이다. 문제는 여자이다. 직업 여자이겠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등신! 연애도 못 하는 등신! 나쁜 병이라도 걸리면 어쩌누, 힘이 빠져 허술한 발길로 찾아간 병원에서 변천만 씨는 급성맹장염 수술을 받고 있었다.
둘째 이중이 제주에서 아침 비행기로 집에 왔다. 혈색도 좋고 패기가 넘친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가 보기 좋다.
“형, 우리 사무실에 와.
우리 기획부동산에선 노력한 만큼 번 다우.
당찬 젊은 여자들 입술이 닳도록 전화기 붙들고 늘어져 건수 올려 큰돈 만지지.
형은 명색이 명문대 경영과 출신에 영업 경험도 있겠다, 간판으로 내걸어도 조오치!”
“내가 뭐 제주도까지 가려고!”
일중은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고 변천만 씨는 소파에 누워 아들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다.
“엄마, 이번에 제주 큰 목장을 사려고 하거든.
몇십만 평이야. 부동산에서 서로 살려고 난리야 난리.
그거 매입만 되면 횡재거든.
쪼개서 나눠 팔아도 몇 곱은 벌어. 그래서 통하는 기획사 몇 놈 손 잡고 인수하려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어.
요는 실탄이 문제지.”
“그런데 지금 한류 바람에 중국 인간 일본 인간들이 군침 흘리고 있다니까.
중국 걔들 서울이고 제주고 단체관광이 장난이 아니거든. 좋은 물건 보이면 걔들이 싹쓸이한다니까.
그뿐인가 제주에 군침 흘려 벌써 땅 많이 샀다니까.
소식통에 의하며 그런 큰 땅을 사서 멋진 호텔도 짓고,
부대시설도 완전 저희 차이나 식으로 조성해서 본토 관광객 저희가 다 받겠다는 거야.
비단이 왕서방 정신이지.
어쨌거나 거금 쥐고 대드는 걔들보다 선수 쳐야 하거든.
물론 되팔아야지.
본토 놈이고 섬 놈이고 따질 것 있나. 많이 올려주는 쪽에 넘기는 거지.
시청 세무서 쪽에 연줄 없이 일 못 하지. 다 인맥이지.
한 번만 구르면 땅값이 하늘로 저절로 뛰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
“엄마, 창고 가건물 있는 땅 처분해서 빨리 돈 좀 마련해주셔.
오래 안 가.
이번 건수 올리며 그 땅보다 큰 땅 사드리지. 아무튼 몇 장은 엄마가 마련해주시우.
내 손에 있는 물건 좀 싸게라도 던지고 실탄 준비해야지.
아, 엄마 목말라 냉장고에 마실 것 있나?”
“이놈아 어미 얼굴만 봤다 하면 돈타령이냐?
내가 돈을 낳나 낳느냐고?”
그녀의 입에서 끝내 고함이 터져 나왔다.
“너 사고치고 뒷바라지 몇 번이냐.
싸움질하고 껄렁대다 공인중개사 시험 된 게 대견해서 기획사 차린 돈 누가 댔냐?
참한 아가씨 붙잡아 결혼이나 해라.”
“우리 엄마 또 리바이벌하는 레퍼토리 나오시네.
이번 건하고 결혼한다니까.”
삼중이 왔다.
며느리는 안 오고 6살 손녀만 데려왔는데 커다란 여행용 백을 끌고 왔다.
베이지색 셔츠에 딱 붙은 청바지를 입은 삼중이 늘씬하다.
“애 엄마는? 어디 가냐?”
손녀를 품에 안으며 물어도 셋째는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뭔가 꺼림칙하다.
“엄마 당분간 우리 진아 좀 돌봐주세요.”
“얘가 뭔 소리하누?
진아를 왜 나보고 보래. 진아야 저 가방에 뭐가 들었니?”
“할머니 내 옷. 엄마가 할머니 집에 있으래.
난 싫어 잉잉 엄마 보고 싶어 잉잉.”
“난 바빠 애 못 봐.
그리고 너희 집에 묶음 세트로 사는 장모는 진아 보면 탈 나냐?”
“진아 엄마가 있어야 장모님이 와서 애 봐주시지.”
“진아 엄마가 없다니 집 떠나 어디 간다는 거야 뭐야?”
“야 임마, 네들 사고 쳤지?
위장 이혼 꼬리라도 잡혔냐?”
이중이 말하자 삼중이 저 형을 향해 껌뻑껌뻑 눈짓했다.
“뭔 소리야?
무슨 일 났어?”
“엄마 아니 아니야.
그보다 피시방 내놨어. 커피 코너 할까봐.”
“커피 코너를 하든 포장마차를 하든 너희가 알아서 하는 거지 왜 내게 말해?”
“딱 목 좋은 커피 코너를 봤는데 피시방이 안 빠지잖아.
엄마가 좀 돌려줘.”
“뭐!
이놈아 내가 돈을 낳나 낳느냐고?”
천 여사는 셋째 등을 아프도록 세게 내려쳤다.
손녀 진아가 말갛게 쳐다보고 있다.
“엄마, 목 좋은 곳이라 급하다니까.”
“야, 내가 더 급하거든.
넌 가계 빠지면 하면 되잖아.”
“형은 뭐 그리 급해서.
어차피 혼자 하는 일도 아닌데 적당히 하는 척하면 되지.”
“이 자식이 말 되는 소리를 해라,
혼자 하는 일 하고 기획부동산 연합하고 같냐?”
형제는 어릴 적 땅따먹기하다 자기 땅 다 뺏긴 그때처럼 성이 나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모두 일어나.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어서!”
“점심, 식당에, 어떤 식당에 갈 건데?”
“집에 반찬 없어.
큰집 가자 일어나. 삼중아 네 형 나오라고 헤라.”
“그럼 그렇지.
울 엄마가 식당 가겠냐. 큰집에 우리 식구가 우르르 다 가자고?”
“식구가 우리 식구지 어디 객식구 있냐.
가면서 네들 인사하러 간다고 전화하면 되지.”
“그래 가자 가.
큰집에 고모 집에 밥 얻어먹는 거 뭐 새삼스런 일도 아니지.”
소파에 누워있던 아직 병색을 벗지 못한 남편이 쯧쯧 혀를 찬다.
“나이 든 형수님 생각은 손톱만도 않지.”
“형님 생각하니까 애들 데리고 인사 가는 거지.
두 분이 자시는 상에 숟가락 몇 개 더 얹으면 되잖아.
형님 움직이니까 큰집 가지 형님 비실비실하며 애들이 가겠냐고?”
“오뉴월 핫바지 생각하듯 엄청 생각하네.”
“당신 뭐랬어? 들리지도 않잖아.”
“저번 아버지 제사 때도 미꾸라지처럼 빠지고선.”
“또 그 얘기야.
말했잖아.
우리 오사모 (오중대 를 사랑하는 모임) 그 모임은 안가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1만 원 내고 오사모회원만 되며 모임 날에는 호텔에서 근사한 식사에 기념품 선물에 시도 때도 없이 관광 보내주지,
칙사대접인데 어떻게 빠져.”
“오라 내년이 국회의원 선거라서 당신 치마에 요롱소리 나겠네!”
“요즘 집구석에 들앉아 있는 여자는 어떤 여잔지 당신이 알기나 해?
딱 두 종료거든.
몸 아픈 여자하고 성질 더러운 여자하고. 자 얘들아 어서 일어나 가자구.”
그들 여섯 식구는 줄레줄레 집을 나섰다. 천 여사는 화가 나서 내내 구시렁거리며 걸었다. 이놈들아 우리는 몽당숟가락 한 개 없이 살림 시작했다. 우리는 이 세상 막일이란 막일은 다 해봤다. 네들 아버지 옛날에 똥지게 지고 똥차 따라 다녔어. 내가 다니던 함바 식당 주인 병나서 넘어지는 바람에 식당 세 얻어 어린 네들 집에 두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허리 휘도록 일만 했다. 식당하여 번 돈으로 주택 사서 살다 파니 돈 처지더구나. 야밤중까지 구정물에 손 담그는 것보다 그게 돈 벌더라. 아파트 분양받아 피 오지게 붙여 팔고 재건축 딱지 사서 팔고, 경매로 넘어온 주택에서 세입자 야박하게 쫓아냈지. 남의 눈에 피눈물 내고 사모님 소리 들었다. 형제간에 밥 한번 안 사고 벌벌 떨며 모았건만 이젠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다. 나는 그저 내 손에 든 현찰만 좋아해서 연금도 보험도 하나 안 들었지. 곶감 빼먹듯 새끼들 빼가고 푹 줄은 돈, 그 돈 불리려고 주식에 손댔다 피 같은 내 돈 다 까먹었다. 그게 골병이 되어 고혈압에 당뇨까지 얻었지. 옛날에는 넘어져도 돈다발 베개였는데, 돈도 눈이 밝아 들어 올 때가 있고 나갈 때가 있더라.
“사부인, 여기로 잠시 내려오시오.
이것들이 시방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모르겠소!”
수화기 너머로 삼중의 장모가 핏대를 올린다.
변천만 씨가 쳐다본다.
“사부인이 성질나 난리네.
자기 딸한테나 퍼붓지 나한테 뭔 긴소리 짧은소리 하누?”
삼중의 집에서는 큰소리가 현관 밖에까지 들렸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삼중은 장모에게 멱살 잡혀 있고, 며느리는 염색한 노랑머리가 뜯겨 수세미가 되어 있었다. 아가씨들보다 더 달라붙은 탱탱한 빨간색 쫄바지를 입은 삼중의 장모가 얼마나 설쳤는지 꼬불꼬불한 긴 파마머리가 얼굴을 휘덮고 왼쪽 귀에만 치렁한 귀걸이가 달려있다.
“사부인 잘 오셨소!
이것들이 무슨 개수작하고 있는지 사부인은 아시오 예?”
“대체 뭔 일인데 이렇게 열이 올라서 이러신데요?”
“그래 네들 사실대로 똑바로 말해라.
내가 미치고 말지!”
“엄마 그, 그게·····.”
삼중이 더듬거리다 얼굴을 돌린다.
“진아야, 너가 말해봐라.
뭔 짓을 하였기에 사부인이 이 난리를 치시누?”
“어머니 그거요 별것 아니고요.”
“뭐 별것 아니라고, 그럼 어떤 게 별거여?
이년, 확 죽여 버릴라!
사부인, 내 딸년이 어떤 다 늙은 영감하고 붙어 있습디다.
그것도 대구에서. 내가 눈이 확 뒤집혀서 이렇게 집으로 끌고 온 거요.
지 새끼는 나한테 맡겨두고 기가 차서. 변서방 니가 말해봐라.
그래 내 딸을 죽어가는 영감한테 식모살이 보낸 거여?”
“장모님 그건 제가 그런 게 아니라요.
진아 엄마 그렇지.”
“아니긴 뭐가.
우리 둘이 의논한 거는 맞잖아.”
며느리가 남편을 향해 눈을 흘긴다.
천 여사 핏대가 확 치올랐다.
“얘. 네 또 명품 사들였니?
가방이야 옷이야 화장품이야 재여 놓고 있으면서 또 저질렀구나.
도대체 명품 욕심 어디가 끝이야?
식모 살아 명품 빚 갚으며 때깔 오지게 좋겠다.”
“사부인, 왜 내 딸만 나무란대요?
명품은 변서방이 더 찾습디다.
중고 수입차에 골프채에 지갑에 구두에.
돈이나 잘 벌면서 그러면 밉지나 않지.”
“내가 못 살아!
네들하고 인연을 끊고 살아야지.
결혼 때, 나이 어려 번 거 없다 하여 24평 아파트 한 채 사줘, 살림 다 차려주어 노래방 차려주어 할 만치 해주었다.
난 더는 모른다.
식모를 살든 가정부를 살든 너희 맘대로 살아.
난 가마.”
천 여사가 현관을 나가려 하자 삼중의 장모가 장대같이 앞을 막았다.
“사부인, 꼭 내 딸이 다 말아먹은 것처럼 말하네요.
서방이 변변찮아 그렇지.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고 여자가 애 키우고 하루 한 끼라도 밥 차려주면 됐지 뭘 더 바래요.
요즘 세상에!”
“요즘 세상에는 명품 안 걸치고 카드 긁어 장모까지 데리고 외국 여행 안 가고,
빚 안 지고 삼시 세끼 집에서 밥 먹으며 그래 벼락 맞는 세상이랍디까?”
“사내가 돈 잘 벌며 왜 아침저녁 따신 밥 해먹이자 않겠어요?
다듬잇돌보다 야문 사부인이나 반반한 거 하나 없지
길에 다니는 개새끼도 명품가방 목에 건다고 요즘 명품가방 안 가진 젊은 것이 있는지 아시고 말씀하시지.”
“흥, 빚 안 지고 살면 명품가방에 묻히고 명품으로 저 몸뚱이 휘감아도 내가 말 않지요.
나는 돈 없으며 간장하고 밥 먹고 옷 벗고 살지라도 이날까지 십 원 한 장 빚지고는 안 살았어요.
옛날 물 귀할 때 물 한 동이로 다섯 식구 이틀도 살았어요.
평생 월부도 한번 안 해본 나한테 툭하면 어미가 돈 낳는 줄 알고 조르지 않으며 나 말 안 합니다!”
부아가 치민 천 여사도 냅다 고함을 질렀다.
진아 엄마가 훌쩍이며 툴툴거렸다.
“엄마도 잘 한 거 없어.
왜 만날 돈 뜯어 가는데? 파마 값 내라, 옷값 내라, 화장품값 내라 내가 뭐 엄마 봉인가.
아직 젊은데 벌어 쓰려고는 않고 뜯어가지.
겨우 산 명품가방도 만날 들고 다니고 반지도 목걸이도 엄마가 하고,
옷도 나는 아끼는데 동네 계에 가면서도 꼭 그걸 입어야 직성이고, 고스톱은 왜 만날 치는데?
지겨워!
엄마 생활비랑 빚져서 내가 신용불량자 됐잖아.
아파트 전세 이거라도 지키려고 우리 위장 이혼한 거고. 가계도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됐고.”
“내 빚 갚으려고 그랬단 말이야.
그 영감, 살 날 얼마 안 남았어.
돈은 많은데 살갑게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결혼해서 자기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주고 돌봐주면 재산 반은 주겠대.
그래서 갔어.
빚 갚고 백수 엄마하고 살려면 돈 있어야 하잖아.”
“뭐 뭣이라?”
천 여사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삼중이 얼른 붙잡아준다. 위장 이혼? 늙은 영감, 병신 같은 연놈들! 이것들이 어쩌고 어째! 빨간 바지 삼중이 장모가 반색한다. 카랑카랑 째지던 목소리가 어느새 봄바람같이 속삭이며 딸의 눈물도 닦아준다.
“얘야, 그 영감 재산이 얼마나 되는데?
그라고 확실히 재산 반 넘겨준다고 공증이라도 받았냐?
유서라도 받아 놓던가.
얼렁뚱땅 넘어가면 절대로 안 되지.”
“영감 죽고 나면 우리 다시 합치기로 진아 아빠랑 약속했으니 걱정하지 마.”
“내가 무슨 걱정을 해.
그 영감 돈 많고 명 짧으면 좋겠다.
더도 덜도 말고 반년만 살다 가면 딱 좋겠네.
진아는 내가 어린이집도 보내고 미술학원 피아노학원도 다 보내고 봐 줄 터이니 그 영감한테서 내 생활비나 톡톡하게 타서 보내라.
명색이 장모인데.”
천 여사는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왈칵 삼중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놈아!
아파트도 팔아먹어?
다리에 달린 좆 떼고 접시물에 코 박고 죽어라 그만!”
새벽부터 제주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급하단다.
급한 건 저놈이지. 계속 전화질이다.
“엄마 돈, 엄마 돈! 급하다니까.”
“이놈아, 니가 언제 나한테 돈 맡겨놨냐?
돈 돈하게!”
천 여사는 전화선을 빼버렸다.
핸드폰도 꺼버렸다.
한나절이 됐을까 이중이 들이닥쳤다.
“엄마 내가 정말, 급하다니까.
엄마가 사업 망친다고. 오늘 대출 좀 받읍시다.
제발!”
“이놈아,
남은 거라곤 이 집하고 그 땅인데 창고 세받아 우리 생활비 겨우 하고 있는데 그 땅 팔면 어미 아비 입 봉하고 살라고?”
“그것 말고도 있잖아요.
저 아래 맨션하고 시장에 건어물 세준 가게도 있으면서.”
“맨션, 벌써 작은이모가 주인이다.
이모 집이 멀어 내가 봐주고 있을 뿐이지.
언제 팔았냐고? 아이고 내가 돌겠다.
그때 패싸움 작은 사고도 아니고 그것도 주동자로 구속 직전 합의금으로 들어간 돈, 벌써 잊었냐?
니가 친 사고 다 대볼까?
장가들이고 집 얻어줄 돈 다 들어갔다.
사고뭉치가 공인중개사 된 게 기특해서 건어물 가게 팔아 부동산 차려줄 때 그게 마지막이라고 내가 말 했냐 안 했냐?”
“몰라.
그때는 그때고 지금이 급하다니까.
은행에 예금 당분간만 좀 돌려주든지.”
“그래 통장 보여줄게.
무거워서 어디 들고 나오겠냐.”
“돈하면 천 여사인데, 참 엄마 42평 이 아파트 엄마 명의잖아.
대출 좀 냅시다.”
“이젠 어미 아비 쫓겨나 노숙자 되라고, 에잇 나쁜 놈!”
“하도 이사를 해 도와줄 친한 친구가 있나, 번듯한 동창이 있나 다 엄마 때문이지.”
“그래 다 어미 탓이다.
어미 목줄 빼가렴.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
분수대로 살려무나.”
“엄마, 지금 큰일을 성공이냐 망치느냐 판에 무슨 분수를 찾아?”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일중이 슬금슬금 서울 바닥에 처바른 돈이 얼마인데 뿌리도 못 내리고 내려와 백수 신세이고,
이중이 너 이제 근실하게 사는 줄 알았더니 돈 낳는 어미만 찾고,
삼중이 저 뺀질이 같은 놈, 손에 돈만 쥐며 마른 논에 물들어가듯 가뭇없이 사라지고,
옛날에 알토란 아들 셋이라고 자랑했던 내 입이 부끄럽다!”
우편함에 일중의 자동차 할부고지서가 있었다. 아들의 차는 아파트 주차장에 아예 고정주차 상태다. 그걸 주려고 아들의 방문을 열려고 할 때다. 화장실 다녀왔는지 방문이 삐죽 열려 있고 일중이 침대에 누워 폰으로 통화하고 있었다. 아들은 어제와 오늘 학원에 나가지 않았다. 몸이 좀 안 좋다고 어제도 온종일 잠만 잤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아들의 목소리가 제법 시원시원 크게 들린다. 친구 전환가. 그 잘나간다는 서울 선배나 동기들이 혹시 취직자리라도 알아주면 얼마나 고마우랴! 고등학교까지는 집에서 다녔는데도 고향에선 아들은 찾는 친구도 없고 만나는 동창도 없다.
“그래 다들 승진했네.
짜아식들 잘나가는군.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일 없어.
옛날에 내가 영업할 때 두 번 찾아올까 설설 피하는 꼴들이란.”
“뭐 와이프 눈총받으며 팔려줬다고, 노트북 한 개 샀을걸.
내가 뭐 액수 큰 자동차 영업을 했냐?
보험은 들어주는 인간이 없어 6개월 만에 때려치웠지만.
집에 내려와 세상 소식 끊고 사는 게 제일 편안해.
누구? 지성이, 그 자식 잘 나갔잖아.
폐암이라고!
그 자리에 고개 숙이고 있지 이사 자리 넘볼 때 내가 알아봤다,
물불 안 가리고 설치다 저 몸 망가지면 마누라 자식이 무슨 소용이야.
중도를 지켜야지 중도를.”
“야 이 친구야 네가 내 걱정을 왜 하냐.
오지랖 넓게.
네 캥거루 주머니 알아?
새끼 넣어 다니는 그 주머니 속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사전 찾아보라고.”
"우리 파파와 마더 돈 쓸 줄을 몰라요.
돈이라면 벌벌 떨어.
당신 돈 내고는 외식도 못 하셔.
스크루지 영감 정도지.
고기도 먹는 놈이 잘 먹고 돈도 쓰는 놈이 잘 쓴다는 말 있잖아.
인터넷뱅킹으로 자잘한 고지서 대납해주고 내 용돈은 적당히 빼서 쓰지."
“그렇지, 든든한 물주지.
그럼 그게 바로 현대판 화수분이지.
적당히 엎드려 있으면 평생 먹고사는 것쯤은 걱정 안 해도 돼.
야, 그게 아무나 되나, 줄을 잘 서서 나처럼 탯줄을 잘 타고 태어나야 평생연금을 타 먹지 흠흠.
야, 부모 복이라곤 쪼가리도 없는 친구야!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오지게 생고생 많이 해라.”
캥거루 주머니, 화수분, 든든한 물주, 평생연금, 연금! 천 여사는 주춤주춤 아들 방문 앞을 물러 나왔다. 머리가 어질어질 거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숨이 차올랐다. 혈압이 푹푹 오른다. 빙글빙글 어지럼증이 몰려온다. 엉금엉금 기어가서 식탁 위의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는데 아이고! 목구멍이 막혔는지 물이 넘어가지 않고 목젖에 딸까닥 걸리더니 왈칵 도로 넘어왔다. 거실 바닥과 입고 있는 치마가 물을 받았다. 그걸 처연히 바라보고 있자니 베란다로 넘어온 광선에 깨알만 한 것이 미친 듯 춤추고 있었다. 그런데 춤추고 있는 깨알이 자꾸 커지더니 홀랑 벗은 난쟁이 여자가 아닌가. 마치 무당처럼 펄쩍펄쩍 뛰며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었다. 완전 미쳤나 봐! 자세히 보니 여자의 알몸에는 까만 거머리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 빨간 피도 질질 배어 나온다. 목덜미 젖가슴 팔 배 사타구니에도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거머리가 붙은 곳에선 다 피가 난다. 피를 얼마나 빨았는지 배때기가 탱탱하여 바닥에 툭 떨어지는 거머리도 있다. 몸서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여자는 춤이 아닌 거머리들을 떼어내려고 발악적으로 펄쩍펄쩍 뛰고 있다. 여자가 뛰며 뛸수록 여자의 몸이 커지는데 악!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가.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거실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다. 거머리들을 떼어내려고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소파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이고 아-얏! 부딪친 머리만 아픈 게 아니라 온 전신이 아팠다. 그 순간 빛보다 빠르게 스치는 생각에 천 여사는 자신의 이마를 딱 때렸다.
아, 그래 연금이 있다지. 주택연금도 있고 토지연금도 있다고 했어! 나도 남들처럼 연금 받으며 노후를 편하게 기죽지 않게 살 테야. 거머리들한테 다 뺏기기 전에, 내 앉은 자리까지 다 앗아가도 우리 노후 책임질 녀석은 한 놈도 없지.
천 여사는 비틀비틀 일어났다. 안방으로 갔다. 장롱을 활짝 열고 장롱 깊숙이 넣어둔 부동산 등기필증 서류들을 챙겨 커다란 가방에 넣었다. 주민등록증도 인감도장도 챙겼다.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고 얼굴은 콤팩트로 대강 두들기고 루주를 발랐다. 머리칼이 엉망이라 모자를 찾아 썼다. 아반떼 차키를 꽉 거머쥐었다.
“이놈들아 내가 돈을 낳나 낳아.
아직 네 엄마 안 죽었다.
내가 누군데, 나 천강자야!”
그녀는 쾅 현관문을 닫고 성큼성큼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밝은 햇살이 상큼하게 그녀를 비춰준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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