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전집 13 - 눈길」
3
해가 훨씬 기운 다음에야 콩밭을 가로질러 노인의 집 뒤꼍으로 뜰을 들어서려다 보니,
아내는 결국 반갑지 않은 화제를 벌여 놓고 있었다.
“이 나이에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좋은 세상을 살겄다고 속없이 새 방 들이고 기와 지붕을 덮자겄냐…
집 욕심 때문이 아니라 나 간 뒷일이 안 놓여 그런다….”
뒤꼍에서 안뜰로 발길을 돌아 나서려는데,
장지문을 반쯤 열어 젖힌 안방에서 노인의 말소리가 도란도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날씨가 선선한 봄가을 철이나,
하다못해 마당에 채일(차일)이라도 치고들 지내는 여름철만 되더라도 걱정이 덜하겄다마는,
한겨울 추위 속에서나 운 사납게 숨이 딸깍 끊어져 봐라.
단칸방 아랫목에다 내 시신 하나 가득 늘여 놓으면 그 일을 어쩔 것이냐.”
이번에도 또 그 집에 관한 이야기였다.
노인을 어떻게 위로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아내는 노인의 소망을 더 이상 어떻게 외면할 수가 없도록 노골화시켜 버리고 싶은 것일까.
답답하게 눈치만 보고 도는 그 나에 대한 아내의 원망은 그토록 뿌리가 깊고 지혜로왔더란 말인가.
노인의 이야기는 아내가 거기까지 유도해 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노인은 이제 그 아내 앞에 당신의 집에 대한 소망을 분명한 목소리로 털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당신의 소망에 대한 솔직한 사연을 말하고 있었다.
노인의 그 오랜 체념이 습관과 염치를 방패삼아 어물어물 고비를 지나가려던 내 앞에
노인의 소망이 마침내 노골적인 모습을 드러내 온 것이었다.
노인의 소망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면 그렇게 분명한 대목까지는 만나게 될 줄을 몰랐던 일이었다.
나는 마치 마지막 희망이 무너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노인의 설명에는 나에게는 마침내 분명해진 것이 있었다.
노인이 갑자기 그 집에 대한 엉뚱한 소망을 지니게 된 당신의 내력이었다.
노인은 아직도 당신의 삶을 위해서는 새삼스런 소망을 지니지 않고 있었다.
노인의 소망은 당신의 사후에 내력이 있었다.
“떠 돌아들어 살아오긴 했어도,
난 이 동네 사람들한테 못할 일은 한 번도 안 해 보고 살아 온 늙은이다.
궂은 밥 먹고 궂은 옷 입고 궂은 잠자리 속에 말년을 보냈어도
난 이웃이나 이 동네 사람들한테 궂은 소리는 안 듣고 늙어 왔다.
이 소리가 무슨 소린고 하니 나 죽고 나면 그래도 이 동네 사람들,
이 늙은이 주검 위에 흙 한 삽, 뗏장 한 장씩은 덮어 주러 올 거란 말이다.
늙거나 젊거나 그렇게 내 혼백 들여다봐 주러 오는 사람들을 어찌할 것이냐.
사람은 죽어 이웃이 없는 것보다 더 고단한 것도 없는 법인디,
오는 사람 마다할 수 없고 가난하게 간 늙은이가 죽어서라도
날 들여다봐 주러 오는 사람들한테 쓴 소주 한 잔 대접해 보내고 싶은 게 죄가 될 거나.
그래서 그저 혼자서 궁리해 본 일이란다.
숨 끊어지는 날 바로 못 내가 묻으면 주검하고 산 사람들이 방 하나뿐 아니냐.
먼 데서 온 느그들도 그렇고…
그래서 꼭 찬바람이나 막고 궁둥이 붙여 앉을 방 한 칸만 어떻게 늘여 봤으면 했더니라마는…
그게 어디 맘 같은 일이더냐.
이도 저도 다 늙고 속없는 늙은이 노망길 테이제….”
노인의 소망은 바로 그 당신의 죽음에 대한 대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알 만한 노릇이었다.
살림이 망쪼나고 옛 살던 동네를 나와 떠돌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제나 당신의 죽음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 해 오지 않던 노인이었다.
동네 뒷산 양지바른 언덕 아래다 마을 영감 한 분에게
당신의 집터(노인은 당신의 무덤 자리를 늘 그렇게 말했다)를 미리 얻어 놓고
겨울철에도 날씨가 좋으면 그곳을 찾아가 햇볕 바래기를 하다가 내려온다던 노인이었다.
노인은 이제 당신의 죽음에 마지막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더 노인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발길을 움직여 소리 없이 자리를 피해 버리고 싶었다.
한데 그때였다.
쓸데없는 일에 공연히 감동을 잘하는 아내가 아무래도 견딜 수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전에 사시던 집은 터도 넓고 간 수도 많았다면서요?”
아내가 느닷없이 화제를 바꾸고 나섰다.
별달리 노인을 달랠 말이 없으니까,
지나간 일이나마 그렇게 넓게 살던 옛집의 기억을 상기시켜서라도 노인을 위로하고 싶어진 것이리라.
그것은 노인도 한 때 번듯한 집 살림을 해 온 기억을 되돌이키게 해서 기분을 바꿔 드리고 싶어서이기도 했겠지만,
그 외에도 그것은 또 언제나 가난한 살림만을 보고 가게 하는 부끄러운 며느리 앞에
당신의 자존심을 얼마간이나마 되살려 내게 할 가외의 효과도 있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당분간 다시 자리를 피할 필요가 없어지고 있었다.
“옛날 살던 집이야, 크고 넓었제.
다섯 칸 겹집에다 앞뒤 터가 운동장이었더니라…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남의 집 된 지가 20년이 다 된 것을….”
“그래도 어머님은 한 때 그런 좋은 집도 살아 보셨으니 추억은 즐거운 편이 아니시겠어요?
이 집이 답답하고 짜증나실 땐 그런 기억이라도 되살려 보세요.”
“기억이나 되살려서 어디다 쓰게야.
새록새록 옛날 생각이 되살아나다 보면 그렇지 않아도 심사가 어지러운 것을.”
“하긴 그것도 그러실 거예요.
그렇게 넓은 집에 사셨던 생각을 하시면 지금 사시는 형편이 더 짜증스러워지기도 하시겠죠.
뭐니뭐니 해도 지금 형편이 이렇게 비좁은 단칸방 신세가 되고 마셨으니 말씀예요….”
노인과 아내는 잠시 그렇게 위론지 넋두린지 분간이 가지 않는 소리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오가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는 그 아내의 동기가 다시 조금씩 의심스러워지고 있었다.
아내의 말투는 그저 노인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노인을 위로해 드리기는커녕 심기만 점점 더 불편스럽게 하고 있었다.
노인에게 옛집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은
당신의 불편스런 심기를 주저앉히기보다 오늘을 더욱더 비참스럽게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집을 고쳐 짓고 싶은 그 은밀스런 소망을 자꾸만 밖으로 후벼 대고 있었다.
아내의 목적은 차라리 그쪽에 있었던 것 같았다.
아내에 대한 나의 판단은 과연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방이 이렇게 비좁은데 그럼 어머니,
이 옷장이라도 어디 다른 데로 좀 내놓을 수 없으세요?
이 옷장을 들여놓으니까 좁은 방이 더 비좁지 않아요.”
아내는 마침내 내가 가장 거북스럽게 시선을 피해 오던 곳으로 화제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바로 그 옷궤 이야기였다.
17,8년 전, 고등학교 일 학년 때였다.
술버릇이 점점 사나와져 가던 형이 전답을 팔고 선산을 팔고,
마침내는 그 아버지 때부터 살아 온 집까지 마지막으로 팔아 넘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K시에서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던 나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아 보고 싶어
옛 살던 마을을 찾아가 보았다.
집을 팔아 버렸으니 식구들을 만나게 될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달리 소식을 알아 볼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스름을 기다려 살던 집 골목을 들어서니 사정은 역시 K시에서 듣고 온 대로였다.
집은 텅텅 비어진 채였고 식구들은 어디론지 간 곳이 없었다.
나는 다시 골목 앞에 살고 있던 먼 친척간 누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누님의 말을 들으니, 노인이 뜻밖에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가 어디냐.
네가 누군디 내 집 앞 골목을 이렇게 서성대고 있어야 하더란 말이냐.”
한참 뒤에 어디선가 누님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노인이
문간 앞에서 어정어정 망설이고 있는 나를 보고 다짜고짜 나무랐다.
행여나 싶은 마음으로 노인을 따라 문간을 들어섰으나 집이 팔린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날 밤 노인은 옛날과 똑같이 저녁을 지어 내왔고, 거기서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일찍 K시로 나를 다시 되돌려 보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노인은 거기서 마지막으로 내게 저녁밥 한 끼를 지어 먹이고 당신과 하룻밤을 재워 보내고 싶어,
새 주인의 양해를 얻어 그렇게 혼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내가 다녀갈 때까지는 내게 하룻밤만이라도
옛집의 모습과 옛날의 분위기 속에 자고 가게 해 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문간을 들어설 때부터 집안 분위기는 이사를 나간 빈집이 분명했었다.
한데도 노인은 그때까지 매일같이 그 빈집을 드나들며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노인은
아직 집을 지켜 온 흔적으로 안방 한쪽에다 이불 한 채와 옷궤 하나를 예대로 그냥 남겨 두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K시로 다시 길을 나설 때서야
비로소 집이 팔린 사실을 시인해 온 노인의 심정으로는 그날 밤 그 옷궤 한 가지 나마
옛집 살림살이의 흔적으로 남겨서 나의 괴로운 잠자리를 위로하고 싶었음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러한 내력이 숨겨져 온 옷궤였다.
떠돌이 살림에 다른 가재 도구가 없어서도 그랬겠지만,
이 20년 가까이를 노인이 한사코 함께 간직해 온 옷궤였다.
그만큼 또 나를 언제나 불편스럽게 만들어 온 물건이었다.
노인에게 빚이 없음을 몇 번씩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가도 그 옷궤만 보면
무슨 액면가 없는 빚 문서를 만난 듯 기분이 새삼 꺼림칙스러워지곤 하던 물건이었다.
이번에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노인의 방을 들어선 순간에 벌써 기분을 불편스럽게 해 오던 옷궤였다.
그리고 끝내는 이틀 밤을 못 넘기고 길을 다시 되돌아갈 작정을 내리게 한 것도 알고 보면
바로 그 옷궤의 허물이 컸을지 모른다.
아내도 물론 그 옷궤에 관한 내력을 내게서 들을 만큼 듣고 이었다.
아내가 옷궤의 내력을 알고 있는 여자라면, 그 옷궤에 관한 나의 기분도 짐작을 못할 그녀가 아니었다.
더욱이 내가 바깥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고 잇는 걸 알고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 콧속을 후비는 못된 버릇이 되살아날 만큼 긴장을 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갑자기 묵은 빚 문서가 튀어나올 것 같은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노인이 치사하게 그 묵은 빚 문서로 나를 궁지에 몰아 넣으려 덤빌 수도 있었다.
- 그래 보라지.
누가 뭐래도 내겐 절대로 빚진 게 없으니까.
그래 본들 없는 빚이 생길 리가 있을라구. -
나는 거의 기구를 드리듯 눈을 감고 기다렸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도 그 무심스러워 보이기 만 한 노인의 대꾸였다.
“옷궤를 내 놓으면 몸에 걸칠 옷가지는 다 어디다 간수하고야?
어디다 따로 내놓을 데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걸 어디다 내놓을 데가 생긴다고 해도
그것 말고는 옷가지 나부랑일 간수해 둘 데는 있어얄 것 아니냐.”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노인은 그리 그 옷궤 쪽에는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옷이야 어떻게 못을 박아 걸더라도, 사람이 우선 좀 발이라도 뻗고 누울 자리가 있어야잖아요.
이건 뭐 사람보다도 옷장을 모시는 꼴이지 뭐예요.”
아내는 거의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옷궤에 대한 노인의 집착심을 시험에 보기 위한 수작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노인의 반응은 여전히 의연했다.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다.
그 옷궤라도 하나 없으면 이 집을 누가 사람 사는 집이라 할 수 있겄냐.
사람 사는 집 흔적으로 해서라도 그건 집안에 지녀야 할 물건이다.”
“어머님은 아마 저 옷장에 그럴 만한 사연이 있으신가 보군요.
시집 오실 때 해 오신 건가요?”
노인의 나이가 너무 높다 보니 아내는 때로 그 노인 앞에 손주딸처럼 버릇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숫제 장난기 한 가지였다.
“내력은 무슨….”
노인은 이제 그것으로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옷궤 이야기는 더 이상 들추고 싶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내도 이젠 그쯤에서 호락호락 물러설 여자가 아니었다.
노인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아내도 그만 거기서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더니
이윽고는 다시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하긴 어쨌거나 어머님 마음이 편하진 못하시겠어요.
뭐니뭐니해도 옛날에 사시던 집을 지켜 오시는 게 최선이었는데 말씀예요.
도대체 그 집은 어떻게 해서 팔리게 되었어요?”
다시 그 집 얘기였다.
그 역시 모르고 묻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내는 그 옷궤의 내력과 함께 집이 팔리게 된 사정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하면서도 그녀는 다시 노인에게 그것을 되풀이시키려 하고 있었다.
옷궤를 구실로 그 노인의 소망을 유인해 내려는 그녀 나름의 노력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태도도 아직은 아내에 못지 않게 끈질긴 데가 있었다.
“집이 어떻게 팔리기는…
안 팔아도 좋은 집을 장난 삼아서 팔았을라더냐.
내 집 지니고 살 팔자가 못 돼 그리 된 거제….”
알고도 묻는 소릴 노인은 또 노인대로 내력을 얼버무려 넘기려고 하였다.
“그래도 사정은 있었을 게 아녜요?
그 집을 지을 때 돌아가신 아버님이 몹시 고생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집이야 참 어렵게 장만한 집이었지야.
남같이 한 번에 지어 올린 집이 아니고
몇 해에 걸쳐서 한 칸씩 두 간씩 살림 형편 좇아서 늘여 간 집이었더니라.
그렇게 마련한 집이 결국은 내 집이 못 되고…
그런다고 이제 그런 소린 해서 다 뭣을 하겄냐.
어차피 내 집이 못 될 운수라 그리 된 일을
이런 소리 곱씹는다고 팔려 간 집 다시 내 집이 되어 돌아올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리 어렵게 장만한 집이라 애석한 생각이 더할 게 아녜요.
지금 형편도 그럴 수밖에 없고요.
어떻게 되어 그리 되고 말았는지 그때 사정이라도 좀 말씀해 보세요.”
“그만둬라.
다 소용없는 일이다.
이제는 거럭저럭 세월이 흘러서 기억도 많이 희미해진 일이고….”
한사코 이야기를 피하려는 노인에게 아내는 마침내 마지막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좋아요.
어머님께선 아마 지난 이로 저까지 공연히 속을 상하게 할까 봐 그러시는 모양인데요.
그래도 별로 소용이 없으세요.
저도 사실은 이야기를 대강 다 들어 알고 있단 말씀예요.”
“이야기를 들어?
누구한테서?” 노인이 비로소 조금 놀라는 기미였다.
“그야 물론 저 사람한테지요.”
노인의 물음에 아내가 대답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밖에서 엿듣고 있는 나를 지목한 말투가 분명했다.
짐작대로 그녀는 벌써부터 내가 밖에서 엿듣고 있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그 집을 팔게 된 사정뿐만도 아니예요.
어머님께서 저 사람한테 그 팔려 간 집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게 해 주신 일도 모두 알고 있단 말씀예요.
모른 척하고 있기는 했지만 저 옷장 말씀예요.
그날 밤에도 어머님은 저 헌 옷장 하나를 집안에다 아직 남겨 두고 계셨더라면서요.
아직도 저 사람한테 어머님이 거기서 살고 계신 것처럼 보이시려고 말씀이예요.”
아내는 차츰 목소리가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렇담 어머님,
이제 좀 속 시원히 말씀해 보세요.
혼자서 참아 넘기시려고만 하지 마시고 말씀이라도 하셔서 속을 후련히 털어 놔 보시란 말씀이에요.
저흰 어머님 자식들 아닙니까.
자식들한테까지 어머님은 어째서 그렇게 말씀을 참아 넘기시려고만 하세요.”
아내의 어조는 이제 거의 울먹임에 가까웠다.
노인도 이젠 어찌할 수가 없는지, 한동안 묵묵히 대꾸가 없었다.
나는 온통 입안의 침이 다 마르고 있었다.
노인의 대꾸가 어떻게 나올지 숨도 못 쉰 채 당신의 다음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내나 나의 조바심하고는 아랑곳도 없이 노인은 끝내 내 심기를 흐트리지 않았다.
“그래 그 아그(아이)도 어떻게 아직 그날 밤 일을 잊지 않고 있더냐?”
“그래요.
그리고 그날 밤 어머님은 저 사람이 집을 못 들어가고 서성대고 있으니까
아직도 그 집이 안 팔린 것처럼 저 사람을 안으로 데려다가 저녁까지 한 끼 지어 먹이셨다면서요?”
“그럼 됐구나.
그렇게 죄다 알고 있는 일을 뭐 하러 한사코 나한테 되뇌게 하려느냐.”
“저 사람은 벌써 잊어 가고 있거든요.
저 사람한테선 진짜 얘기를 들을 수도 없고요.
사람이 독해서 저 사람은 그런 일 일부러 잊어요.
그래 이번엔 어머님한테서 진짜 이야길 듣고 싶은 거예요.
저 사람 얘기 말고 어머님의 그날 밤 진짜 심경을 말씀이에요.”
“심정이나마나 저하고 별다른 대목이 있었을라더냐.
사세 부득해서 팔았다곤 하지마 아직은 그래도 내 발길이 끊이지 않은 집인데,
그 집을 놔 두고 그 아그가 그래 발길을 주춤주춤 어정대고 서 있더구나….”
아내의 성화를 견디다 못해 노인은 결국, 마지못한 어조로 그날 밤 일을 돌이키고 있었다.
어조에는 아직도 그날 밤의 심사가 조금도 실려 있지 않은 채였다.
“그래 저를 나무래서 냉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더니라.
그리고 더운 밥 지어 먹여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재워 가지고 동도 트기 전에 길을 되돌려 떠나 보냈더니라.”
“그래 그때 어머님 마음이 어떠셨어요?”
“마음이 어떻기는야.
팔린 집이나마 거기서 하룻밤 저 아그를 재워 보내고 싶어
싫은 곪고 드나들며 마당도 쓸고 걸레질도 훔치며 기다려 온 에미였는디,
더운 밥 해 먹이고 하룻밤을 재우고 나니 그만만 해도 한 소원은 우선 풀린 것 같더구나.”
“그래 어머님은 흡족한 기분으로 아들을 떠나 보내셨다는 그런 말씀이시겠군요.
하지만 정말로 그게 그렇게 될 수가 있었을까요?
어머님은 정말로 그러게 흡족한 마음으로 아들을 떠나 보내실 수 있으셨을까 말씀이에요.
아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더라도
어머님 자신은 그때 변변한 거처 하나 마련해 두시질 못하셨을 처지에 말씀이에요.”
“나더러 또 무슨 이야길 더 하라는 것이냐.”
“그때 아들을 떠나 보내실 때 어머님 심경을 듣고 싶어요.
객지 공부 가는 어린 아들을 그런 식으로 떠나 보내시면서 어머님 자신도 거처가 없이 떠도셔야 했던
그때 처지에서 어머님이 겪으신 심경을 말씀예요.”
“그만두거라.
다 쓸데없는 노릇이니라.
이야기를 한들 그때 마음이야 네가 어찌 다 알아들을 수가 있겄냐.”
노인은 다시 이야기를 사양했다.
그러나 그 체념기가 완연한 노인의 어조에는
아직도 혼자 당신의 맘속으로만 지녀 온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 거 같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그런 나의 기미를 눈치채고 있었다 하더라도 노인만은 아직 그걸 알지 못하고 있었다.
노인의 말을 그쯤에서 그만 중단시켜야 했다.
아내가 어떻게 나온다 하더라도 내게까지 그것을 알게 하고 싶지는 않을 노인이었다.
내 앞에선 더 이상 노인의 이야기가 계속될 수가 없었다.
나는 이윽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그 노인의 눈길이 닿고 있는 장지문 앞으로 모습을 불쑥 드러내고 나섰다.
4
위험한 고비는 그럭저럭 모두 지나가고 있었다.
저녁상을 들일 때 노인은 언제나처럼 막걸리 한 되를 가져오게 하였다.
형의 술버릇 때문에 집안 꼴이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노인은 웬일로 내게 술 걱정을 그리 하지 않았다.
집에만 가면 당신이 손수 막걸리 한 되씩을 미리 마련해다 주곤 하였다.
- 한잔 마시고 잠이나 자거라.
그러면서 언제나 잠을 자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 이 날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정 내일 아침으로 길을 나설라냐?”
저녁상이 들어왔을 때 노인은 그러게 조심스런 목소리로 나의 내심을 한 번 더 떠왔을 뿐이었다.
“가야 할 일이 있으니까 가겠다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노인에게 공연히 짜증 기가 치민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노인은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래 알았다.
저녁하고 술이나 한잔하고 일찍 쉬거라.”
아침부터 먼 길을 나서려면 잠이라도 일찍 자 두라는 것이었다.
나는 말없이 노인을 따랐다.
저녁 겸해서 술 한 되를 비우고 그리고 술기를 못 견디는 사람처럼 일찌감치 잠자리를 펴고 누었다.
형수님이 조카들을 데리고 잠자리를 찾아 나가자 이날 밤도 우리는 세 사람 합숙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위태로운 고비는 그럭저럭 거의 다 넘겨 가는 셈이었다.
눈을 붙였다. 깨고 나면 그것으로 모든 건 끝나는 것이었다.
지붕이고 옷궤고 더 이상 신경을 쓸 일이 없어진다.
노인에게 숨겨진 빚 문서가 있을까.
하지만 이날 밤만 무사히 넘기고 나면 노인의 어떤 빚 문서도 그것으로 영영 휴지가 되는 것이다.
- 잠이나 자자.
빚이고 뭐고 잠들면 그만이다.
노인에게 빚은 내가 무슨 빚이 있단 말인가…. -
나는 제법 홀가분한 기분으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술기 탓인지 알알한 잠 기운이 이내 눈꺼풀을 덮어 왔다.
그러게 얼마쯤 아늑한 졸음기 속을 헤매고 난 때였을까.
나는 웬일인지 문득 잠기가 서서히 엷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어렴풋한 선잠기 속에 도란도란 조심스런 노인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날 밤사이로 갑자기 웬 눈이 그리도 많이 내렸던지 잠을 잤으면 얼마나 잤겠느냐마는
그래도 잠시 눈을 붙였다가 새벽녘에 일어나 보니 바깥이 왼통 환한 눈 천지로구나…
눈이 왔더라도 어쩔 수가 있더냐.
서둘러 밥 한술씩을 끓여다가 속을 덥히고 그 눈길을 서둘러 나섰더니라….”
나는 다시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어찌된 일인지 노인이 마침내 그날 밤 이야기를 아내에게 가닥가닥 털어놓고 있는 중이었다.
“처지가 떳떳했으면 날이라도 좀 밝은 다음에 길을 나설 수 있었으련만,
그땐 어찌 그리 처지가 부끄럽고 저주스럽기만 했던지…
그래 할 수 없이 새벽 눈길을 둘이서 나섰지만,
사오 리나 되는 장처 차부까지 산길이 멀기는 또 얼마나 멀더라냐.”
기억을 차근차근 더듬어 나가고 있는 노인의 몽롱한 목소리는
마치 어린 손주 아이에게 옛 얘기라도 들려주고 있는 할머니의 그것처럼 아늑한 느낌마저 깃들고 있었다.
아내가 결국엔 노인을 거기까지 유도해 냈음이 분명했다.
"이야기를 한들 네가 어찌 다 알아들을 수가 있겄냐…."
낮결에 노인이 말꼬리를 한 가닥 깔고 넘은 기미를 아내가 무심히 들어 넘겼을 리 없었다.
그날 밤(아니 그날 새벽)아내에겐 한 번도 들려 준 일이 없는 그날 새벽의 서글픈 동행을,
나 자신도 한사코 기억의 피안으로 사라져 가 주기를 바라 오던 그 새벽의 눈길의 기억을
노인은 이제 받아 낼 길이 없는 묵은 빚 문서를 들추듯 허무한 목소리로 되씹고 있었다.
“날은 아직 어둡고 산길은 험하고,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도 차부까지는 그래도 어떻게 시간을 대어 가 수가 있었구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의 머리 속에도 마침내 그날의 정경이 손에 닿을 듯 역력히 떠올랐다.
어린 자식놈의 처지가 너무도 딱해서였을까.
아니 어쩌면 노인 자신의 처지까지도 그 밖엔 달리 도리가 없었을 노릇이었는지 모른다.
동구 밖까지만 바래다 주겠다던 노인은 다시 마을 뒷산의 잿길까지만 나를 좀더 바래 주마 우겼고,
그 잿길을 올라선 다음에는 새 신작로가 나서 때까지만 산길을 함께 넘어 가자 우겼다.
그럴 때마다 한 차례씩 애시린 실랑이를 치르고 나면 노인과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날이라도 좀 밝은 다음이었으면 좋았겠는데,
날이 밝기를 기다려 동네를 나서는 건 노인이나 나나 생각을 않았다.
그나마 그 어둠을 타고 마을을 나서는 거이 노인이나 나나 마음이 편했다.
노인의 말마따나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내가 미끄러지면 노인이 나를 부축해 일으키고,
노인이 넘어지면 내가 당신을 부축해 가면서, 그렇게 말없이 신작로까지 나섰다.
그러고도 아직 그 면소 차부까지는 길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결국 그 면소 차부까지도 노인과 함께 신작로를 걸었다.
아직도 날이 밝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우리는 어찌 되었던가.
나는 차를 타고 떠나가 버렸고, 노인은 다시 그 어둠 속의 눈길을 되돌아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거기까지 뿐이었다.
노인이 그후 어떻게 길을 되돌아갔는지는 나로서도 아직 들은 바가 없었다.
노인을 길가에 혼자 남겨 두고 차로 올라서 버린 그 순간부터 나는 차마 그 노인을 생각하기 싫었고,
노인도 오늘까지 그 날의 뒷 얘기는 들려 준 일이 없었다.
한데 노인은 웬일로 오늘사 그날의 기억을 끝까지 돌이키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장터 거리로 들어서서 차부가 저만큼 보일 만한 데까지 가니까
그때 마침 차가 미리 불을 켜고 차부를 나오는구나.
급한 김에 내가 손을 휘저어 그 차를 세웠더니,
그래 그 운전수란 사람들은 어찌 그리 길이 급하고 매정하기만 한 사람들이더냐.
차를 미처 세우지도 덜하고 덜크렁덜크렁 눈 깜짝할 사이에 저 아그를 훌쩍 실어 담고 가 버리는구나.”
잠잠히 입을 다문 채 듣고만 있던 아내가 모처럼 한 마디를 끼어 들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다시 노인의 이야기가 두려워지고 있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 다음 이야기를 가로막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럴 수가 없었다.
사지가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온몸이 마치 물을 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몸을 어떻게 움직여 볼 수가 없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달콤한 슬픔, 달콤한 피곤 기 같은 것이 나를 아늑히 감싸 오고 있었다.
“어떻게 하기는야.
넋이 나간 사람마냥 어둠 속에 한참이나 찻길만 바라보고 서 있을 수밖에에야…
그 허망한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할 수가 있을거나….”
노인은 여전히 옛 얘기를 하듯 하는 그 차분하고 아득한 음성으로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한참 그러고 서 있다 보니 찬바람에 정신이 좀 되돌아오더구나.
정신이 들어 보니 갈 길이 새삼 허망스럽지 않았겄냐.
지금까진 그래도 저하고 나하고 둘이서 함께 헤쳐 온 길인데
이참에는 그 길을 늙은 것 혼자서 되돌아서려니…
거기다 아직도 날은 어둡지야…
그대로는 암만해도 길을 되돌아설 수가 없어 차부를 찾아 들어갔더니라.
한 식경이나 차부 안 나무 걸상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려니 그제사 동녘 하늘이 훤해져 오더구나…
그래서 또 혼자 서두를 것도 없는 길을 서둘러 나섰는디,
그때 일만은 언제까지도 잊혀질 수가 없을 것 같구나.”
“길을 혼자 돌아가시던 그대 일을 말씀이세요?”
“눈길을 혼자 돌아가다 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지 않았겄냐.
눈발이 그친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
“그래서 어머님은 그 발자국 때문에 아들 생각이 더 간절하셨겠네요.”
“간절하다뿐이었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어머님 그때 우시지 않았어요?”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노인의 이야기는 이제 거의 끝이 나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는 이제 할 말을 잊은 듯 입을 조용히 다물고 있었다.
“그런디
그 서두를 것도 없는 길이라
그렁저렁 시름없이 걸어온 발걸음이 그래도 어느 참에 동네 뒷산을 당도해 있었구나.
하지만 나는 그 길로는 차마 동네를 바로 들어설 수가 없어
잿등 위에 눈을 쓸고 아직도 한참이나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었더니라….”
“어머님도 이젠 돌아가실 거처가 없으셨던 거지요.”
한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아내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듯 갑자기 노인을 추궁하고 나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울먹임 때문에 떨리고 있었다.
나 역시도 이젠 더 이상 노인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나마 노인을 가로막고 싶었다.
아내의 추궁에 대한 그 노인의 대꾸가 너무도 두려웠다.
노인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불빛 아래 눈을 뜨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사지가 마비된 듯 가라앉아 잇는 때문만이 아니었다.
졸음기가 아직 아쉬워서도 아니었다.
눈꺼풀 밑으로 뜨겁게 차 오르는 것을 아내와 노인 앞에 보일 수가 없었다.
그것이 너무도 부끄러웠기 대문이었다.
아내는 이번에도 그러는 나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여보,
이젠 좀 일어나 보세요.
일어나서 당신도 말을 좀 해보세요.”
그녀가 느닷없이 나를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그녀의 음성은 이제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래도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뜨거운 것을 숨기기 위해 눈꺼풀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내처 잠이 든 척 버틸 수밖에 없었다.
음성이 아직 흐트러지지 않고 있는 건 오히려 그 노인뿐이었다.
“가만 두거라.
아침 길 나서기도 피곤할 것인디 곤하게 자고 있는 사람 뭣하러 그러냐.”
노인은 일단 아내의 행동을 말려 두고 나서
아직도 그 옛 얘기를 하는 듯한 아득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당신의 남은 이야기를 끝맺어 가고 있었다.
“그런디 이것만은 네가 잘못 안 것 같구나.
그 때 내가 뒷산 잿등에서 동네를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던 일 말이다.
그건 내가 갈 데가 없어 그랬던 건 아니란다.
산 사람 목숨인데 설마 그때라고 누구네 문간방 한 칸이라도 산 몸뚱이 깃들일 데 마련이 안됐겄냐.
갈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침 햇살이 활짝 퍼져 들어 있는디,
눈에 덮인 그 우리집 지붕까지도 햇살 때문에 볼 수가 없더구나.
더구나 동네에선 아침 짓는 연기가 한참인디 그렇게 시린 눈을 해 갖고는
그 햇살이 부끄러워 차마 어떻게 동네 골목을 들어설 수가 있더냐.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서 그럴 엄두가 안 생겨나더구나.
시린 눈이라도 좀 가라앉히고자 그래 그러고 앉아 있었더니라….” (p135-168)
- 끝 -
이청준 - 눈길 (이청준 전집 13)
문학과지성사 - 2012.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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