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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

미끼와 고삐 - 엉뚱한 여자

by 탄천사랑 2007. 11. 27.

·「조선 - 미끼와 고삐」



 

엉뚱한 여자
"여보, 인아가 그러는데 나더러 엉뚱한 여자래요."

어느 날 아내가 내 귓가에 대고 불쑥 말했다.
인아란 이제 중학교 이학년이 된 우리들의 장남을 뜻하는데 녀석은 학교에 가고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신문을 들여다보다 말고 문득 아내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이 제 어머니한테 엉뚱한 여자라니, 
제 어머니가 무슨 엉뚱한 짓을 저질렀길래 그런 고약한 말버릇을 구사했는지 싶었던 것이다.
"엉뚱한 여자, 무슨 말인지 몰라요?"
"몰라...."

나는 머리를 저었고, 아내는 빙긋 웃은 다음 설명해 주었다.
"엉덩이가 뚱뚱한 여자를 줄여서 그렇게 부른대요. 그러면서 제 엄마 보고 엉뚱한 여자라잖아요. 글쎄."
"그래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덧붙인 아내의 설명에 의하면 
그렇게 자꾸 엉덩이가 뚱뚱해 지다가 아빠가 싫어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까지 하더라나.
어느새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녀석이 가녀린 여자를 좋아하는 취향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그렇고,
중년에 접어든 어머니가 알게 모르게 제중이 불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민하게 눈치채고 충고한 녀석의 그야말로 엉뚱한 염려도 나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중년 고개를 접어들면서부터 아내도 군살이 붙고 체중이 늘어나기는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불어나서 아들 녀석 말대로 엉뚱한 여자가 되었을 정도는 아니고,
마흔두셋까지도 사십 오륙 킬로그램 정도의 처녀 때 체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가
최근 일이 년 사이에 이삼 킬로 늘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내가 보기 싫을 만큼 뚱뚱해진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어느 편인가 하면 나는 아내의 몸에 관한 한 대체로 무관심한 쪽이다.
그녀가 설사 어느 날 갑자기 일백 킬로그램이 넘는 
슈퍼 헤비급의 체중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나는 그다지 놀랄 것 같지 않다.
그만큼 아내의 몸매에 관한 한 관심 밖이라는 뜻인데,
함께 살고 있는 여자의 몸매에 신경을 쓰고 사는 남편이 과연 있을는지 나는 의문일 정도이다.                                                
그렇다고 이런 내 무관심이 아내 이외의 모든 여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몸매가 아름다운 여자처럼 눈을 즐겁게 해주는 또 다른 어떤 것도 있을 성싶지 않다.
아름다운 꽃도, 
설악산 같은 아름다운 자연경관도 여자의 아름다운 몸매에 비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나에게도 비극이라면 비극이랄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 딸년의 몸매이다.
국민학교 중학교 때까지도 제 어머니를 닮아 날씬한 체격이었다 싶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내 기대를 약간씩 배반하고 있다고나 할까.
키가 백육십 이삼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을 뜻 싶으면서 
그 날씬하던 체격이 눈에 뜨일 듯 말 듯 불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내도 딸년도 나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데는 변명할 말도 없다.
그만큼 나는 짧달 막 한 키에 몽땅한 체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래도 나는 딸아이한테 줄넘기를 해라 저녁마다 동네를 한 바퀴씩 뜀박질을 하라고 충고를 한다.
몸매가 예쁜 딸년을 갖고 싶은 충정에서인데 
어떤 때는 딸아이가 아버지의 충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낼 적도 있다.   

하긴 딸아이는 딸아이대로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어디서 들었는지 
저녁을 배불리 먹고 자는 것이 다이어트에 가장 해롭다며 몇 주씩 깡그리 굶기도 하는데,
그런 딸년의  건강이 염려되어 맛있는 저녁상을 차려놓고 아내와 함께 아무리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 밖에도 많지만 생략하겠다.
아무든 딸아이는 딸아이대로 다이어트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틀림없고,
나와 아내는 어느새 애처로운 관찰자가 되어 있는 셈이다.

어느 날 아내는 묵은 웃을 꺼내 갈아 입다가 허리통이 맞지 않아 딸아이 앞에서 무심코 탄식을 했다고 한다.
"애 이거 봐라. 이게 안 맞는다. 어떡한다니?"

그랬더니 딸아이는 콧방귀까지 흥 뀌며 핀잔했다는 것이다.
"엄마만 같으면 난 아무 걱정도 없겠다."

그만큼 딸년은 제 어머니의 몸매마저 시샘을 할 정도인 것이다.
그 이후 아내는 딸아이 앞에서는 조심하는 눈치이지만 
불어나는 체중을 억제하기 위해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고심하는 것이다.
체중이 불어나니까 몸이 전체적으로 우둔해지고,
심폐 기능도 나빠져서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는 것을 느끼며, 갖가지 신경통까지 유발한다는 것이다.

한 때는 연거푸 며칠씩 한증막에 다니고 대중탕에 가도 사우나 독에 들어가 장시간 땀을 빼는 모양이다.
또 동네에서 이웃 부인들끼리 등산 클럽을 만들어 아침마다 산에 다녀오기도 한다.
집 뒤가 바로 북한산 줄기의 비봉碑峰인 우리 동네로서는 조건이 좋은 편이다.

아침 해먹고 아이들 학교에 보낸 다음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이웃 부인들을 불려 약수 담을 플라스틱 물통 몇 개씩을 륙색에 집어넣어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여인들을 내다볼라치면 나는 시나브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엉뚱한 여자, 엉덩이가 뚱뚱한 여자가 되는 것이 그렇게도 싫은가 싶은 것이다.

그렇게 일 년 이상 세월을 보냈는데도 나는 아내에게서 체중을 뺀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며 더 이상 늘지만 않도록 해도 성공이라는 것쯤 나도 알고 있기는 하다.
그래도 나는 놀리듯 이따금씩 묻고는 한다.
"어때 체중 좀 빠졌어? 안 빠졌으면 인아 말마다 나 나 당신 싫어 할 거야."

그럴 때마다 아내는 샐쭉하며 대꾸한다.
"싫어해도 할 수 없지 뭐, 지금 와서 어쩔 거야? 나 버리고 나갈거유?"

그런데 며칠 전 아내가 목욕탕에서 돌아온 다음의 말이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은 좋겠수."
"무슨 소리야?"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무슨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또 속삭이는 것이었다. 
"목욕탕에 있는 때 미는 여자가 날 얼마나 칭찬했는지 알아요?
  어쩌면 처녀 때 몸매 그대로냐고요."
"뭐야? 그 여자야말로 정말 엉뚱한 여자로군."

나는 어이없어 웃었다.  (p294)

 

 

 

※ 이 글은 <미끼와 고삐>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조선 - 미끼와 고삐
해냄출판사 - 1989. 01. 10.

 [t-07.11.27.  20211106-1458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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