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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ㅁ - ㅂ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무라카미 하루키

by 탄천사랑 2007. 10. 7.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 2006. 08. 21.

시마모토는 어린 시절 둘이 같이 들었던 레코더를 하지메에게 선물로 가져왔다.
둘은 음악을 같이 듣기 위해 하코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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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10월 초였지만, 하코네의 밤은 제법 서늘했다. 
별장에 도착하자, 나는 전기를 켜고, 거실 가스난로를 켰다. 
그리고 찬장에서 브랜디 잔과 브랜디를 꺼냈다. 
잠시후 방이 따뜻해지자, 우리는 예전처럼 소파에 나란히 앉아, 냇 킹 콜의 레코드를 턴테이블에 올렸다. 
난롯불이 빨갛게 타서 브랜디 잔에 비쳤다. 
시마모토는 양다리를 소파 위에 올려, 허리 아래로 집어넣듯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 손을 등받이에 올리고, 한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있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다. 
그때 그녀는 남에게 다리를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습관이 수술로 다리가 나은 지금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냇 킹 콜은 『국경의 남쪽』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 곡을 듣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사실을 말하면, 어릴 적 이 레코드를 들으면서, 
 난 국경의 남쪽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하고 늘 이상하게 생각했어.”하고 나는 말했다.
“나도 그래.”하고 시마모토는 말했다. 
“자라나서 영어 가사를 읽어보고, 굉장히 실망했어. 
 그냥 멕시코 노래인 거야.  국경의 남쪽에는 더 멋진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예를 들면 어떤 것이?” 시마모토는 머리를 손으로 뒤로 돌려 가볍게 묶고 있었다. 
“몰라. 뭔가 아주 아름답고, 커다랗고, 부드러운 것.”
“뭔가 아주 아름답고, 커다랗고, 부드러운 것.”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먹을 수 있는 걸까.” 시마모토는 웃었다. 하얀 이를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아마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만질 수는 있을 것 같아?”
“아마 만질 수는 있을 거야.”하고 나는 말했다.
“거기는 아마도가 많은 나라네.”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손을 뻗어 등받이 위에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만졌다. 
그녀의 몸에 접촉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고마쓰 공항에서 하네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접촉한 이후 처음이었다. 
내가 손가락을 만지자 그녀는 얼굴을 조금 들어 나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내려떴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하고 그녀는 말했다.
"뭐야? 그 태양의 서쪽이라는 건?"
"그런 곳이 있어"라고 그녀는 말했다.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을 들어본 적 있니?"
"잘 모르겠는데."
"옛날 어느 책에선가 그 얘기를 읽은 적이 있어. 
 중학생 때였던가? 무슨 책이었는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건 시베리아에 사는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야. 
 상상해봐. 
 네가 농부고, 시베리아의 벌판에서 홀로 외로이 살고 있어. 
 그리고 매일매일 밭을 가는 거야.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북쪽에는 북쪽의 지평선이 있고, 
 동쪽에는 동쪽의 지평선이 있고, 남쪽에는 남쪽의 지평선이 있고, 서쪽에는 서쪽의 지평선이 있어. 
 그것뿐이야.
 당신은 매일 동쪽 지평선에서 태양이 떠오르면 밭으로 나가 일을 하고, 
 그 태양이 머리 위로 올라와 있으면 일하던 손을 멈추고 점심을 먹고, 
 그리고 서쪽 지평선으로 해가 기울면 집으로 돌아가 자는 거예요."   
“그건 아오야마 근처에서 바-를 경영하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인생처럼 들리네.”
“그렇지.”하고 그녀는 말하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약간 고개를 갸웃했다. 
“아주 다르지. 그게 몇 년이고 몇 년이고 매일 계속되는 거야.”
“하지만 시베리아에서 겨울에는 밭을 못 일궈.”
“겨울에는 쉬어. 물론.”하고 시마모토는 말했다. 
“겨울에는 집 안에 있고,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그리고 봄이 오면, 밖으로 나가 밭일을 하는 거야. 

 넌 그런 농부야. 상상해 봐.”
“하고 있어.”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어느날, 네 안에서 뭔가가 죽어버리는 거야.”
“죽는다니, 어떤 것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 뭔지. 
 동쪽의 지평선에서 떠올라, 
 하늘의 정중앙을 지나, 서쪽의 지평선으로 저물어가는 태양을 매일매일 보고 있는 동안, 
 네 속에서 무언가 뚝하고 끊어져 죽어버리는 거야. 
 그리고 넌 땅바닥에다 괭이를 내던지고는 그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서쪽을 향해 걸어가는 거야. 
 태양의 서쪽을 향해. 
 그렇게 뭔가에 홀린 듯이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해서 걷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죽고 말아. 
 그게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야." 나는 대지에 푹 엎드려 죽어 가는 시베리아 농부의 모습을 떠올렸다.
“태양의 서쪽에는 대체 무엇이 있지?”하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난 몰라.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지도 몰라. 
 어쩌면 뭔가가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어쨌든, 그건 국경의 남쪽과는 좀 다른 곳이야.”

냇 킹 콜이 『프리텐드』를 노래하고, 
시마모토도 작은 목소리로 예전에 곧잘 했듯이 거기에 맞춰 노래했다.
++

하지메는 시마모토하게 말했다.
자신의 언제나 굶주려 있고 메말라 있는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시마모토 한 사람밖에 없다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시마모토를 선택하겠다고.

시마모토도 말했다.
태어나서 하지메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본 적 없다고.

다음 날이 되었다.
시마모토는 사라졌다.


※ 이 글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07.10.07.  20211014_16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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