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 죽음의 수용소(원제: Man's search for meaning)」
카포, 우리 안의 또 다른 지배자
보통 수감자들에게 먹을 것이 아주 조금 있거나 아예 없을 때에도 카포들은 절대로 굶는 일이 없었다.
그들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카포들은 오히려 수용소에 있을 때 가장 영양섭취를 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시하는 병사들보다도, 나치 대원들보다도 카포들이 수감자들에게 더 가혹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았다.
카포들은 수감자 중에서 뽑았다.
수감자 중에서 이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성격을 가졌다고 인정이 되면 카포로 뽑혔고,
기대했던 대로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즉시 쫓겨났다.
일단 카포가 되면 그들은 금세 나치 대원이나 감시병들을 닮아갔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을 판단할 때에는
나치 대원이나 감시병들과 같은 정신의학적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으로 본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각축장
수용소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수용소 생활에 대해 그릇된 생각, 즉 감상이나 연민을 갖기 쉽다.
하지만 밖에 있던 사람들은 당시 수감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과 목숨 그 자체를 위한 투쟁이자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친구를 구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었다.
이제 일정한 수의 수감자를 다른 수용소로 이동시킨다는 공식 발표가 났을 경우를 살펴보자.
그러면 사람들은 그 최종 목적지가 당연히 가스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감자 중 병에 걸렸거나 쇠약해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뽑아
가스실과 화장터가 있는 큰 수용소로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 해당자를 가리는 과정이 곧 개별적인 수감자들 사이에,
혹은 수감자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무차별적인 싸움의 도화선이 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희생자 명단에서 자기 자신의 이름이나 친구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
한 사람을 구하려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수송을 할 때마다 수송인원은 정해져 있었다.
수감자들에게는 모두 번호가 있었고, 그들은 번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때문에 누가 수송이 되느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용소로 들어올 때(적어도 아우슈비츠에서는 그랬다) 수감자들의 신상을 적은 기록은 소지품과 함께 압수되었다.
따라서 수감자들은 가짜로 이름이나 직업을 댈 수 있었으며,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 그렇게 하는 수감자들이 많았다.
수용소 당국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잡혀 온 사람들의 번호였다.
이 번호는 수감자의 살갗에 문신으로 새겨지거나 바지나 윗도리 혹은 외투에 수놓아졌다.
감시병이 어떤 수감자를 벌주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저 그 번호를 힐끗 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 눈초리를 얼마나 무서워했던가! 그는 절대로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곧 수송될 처지에 놓인 수감자들을 살펴보자.
그들에게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고 또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이제 곧 끌려갈 친구의 목숨을 구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래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를 대신할 다른 사람, 즉 다른 ‘번호’를 수송자 명단에 집어 넣는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카포는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을 기준으로 선발한 사람이다.
수감자 중에서 가장 성질이 난폭한 사람에게 이 일이 돌아갔다.
운 좋게 가끔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나치 대원들에 의해 행해지는 이런 카포 선발과는 별도로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시시때때로 자체 선발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이 이야기는 평범한 수감자였던 나 자신의 체험을 기록한 것으로 자랑할 일은 못 되지만,
나는 수용소에서 마지막 몇 주를 제외하고는
정신의학자 노릇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의사 노릇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힌다.
내 동료 중에는 난방이 형편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응급구호실에서 휴지 조각으로 붕대를 만드는 일을 하는 행운을 누린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119, 104번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철로에서 땅을 파고 선로를 부설하는 일로 보냈다.
한번은 도로 밑에 수도관을 묻기 위해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혼자서 굴을 판 적이 있었다.
이 일로 나는 보수를 받았다.
1944년 성탄절 직전에 소위 말하는 '상여배급표' 를 받은 것이다.
이 표는 우리가 사실상의 노예로 팔려간 건설회사에서 주는 것이었다.
건설회사는 수용소 측에 수감자 한 사람당 일정한 액수의 일당을 지불하고 있었다.
회사는 쿠폰 한 장당 50페니히를 지불했는데, 그 표로 대개는 몇 주 후에 담배 여섯 개비를 바꿀 수 있었다.
물론 가끔은 유효기간이 지나 쿠폰을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여하튼 그때 신나게도 무려 담배 열두 개비를 바꿀 수 있는 쿠폰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담배를 수프 열두 그릇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고,
수프 열두 그릇이면 한동안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담배를 필 수 있는 특권은 카포들에게만 주어졌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일정한 양의 담배를 배급받았다.
때로는 창고나 작업장의 감독으로 일한 사람들이 위험한 일을 한 대가로 담배 몇 개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수 없었는데,
단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었거나 아니면
자기에게 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저 '즐기려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였다.
따라서 어느 날 동료가 자기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지탱해 나갈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그 믿음을 잃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는 힘들었다.
도살장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다.
수많은 수감자들이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기록해 놓은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 보면,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 반응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 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의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이다.
첫 번째 단계의 특징적인 징후는 충격이다.
어떤 경우에는 수용소로 들어가기도 전에 경험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 내가 수용소로 들어갔을 때의 상황을 얘기해 보겠다.
1.500명의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며칠 밤과 낮을 계속해서 달렸다.
열차 한 칸에 80명이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소지품을 담은 짐 꾸러미 위에 누워 있었다.
열차 안이 너무나 꽉 차서 창문 위쪽으로 겨우 잿빛 새벽의 기운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모두 이 기차가 군수공장으로 가는 것이기를 바랬다.
그곳에서는 강제 노역이나마 여하튼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차가 아직 슐레지엔에 있는지 아니면 벌써 폴란드 안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고 있었다.
겁먹은 듯한 기적 소리가 기분 나쁘게 울렸다.
마치 파멸에 빠질 운명에 처해 있는 이 불행한 짐 꾸러미들을 불쌍히 여겨
도움을 청하는 울부짖음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기차가 덜컹거리며 옆 선로로 들어갔다.
종착역이 가까워진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 불안에 떨고 있던 사람들 틈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우슈비츠야, 저기 팻말이 있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멈췄다.
아우슈비츠!
가스실, 화장터, 대학살, 그 모든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이름, 아우슈비츠!
기차는 망설이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불쌍한 우리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아우슈비츠라는 끔찍한 현실로부터 구해내고 싶다는 듯이....,
새벽이 되자 거대한 수용소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길게 뻗어 있는 몇 겹의 철조망 담장, 감시탑, 탐조등,
그리고 희뿌연 새벽빛 속에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는
황량한 길을 따라 질질 끌러 가고 있는 초라하고 누추한 사람들의 행렬,
가끔 고함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교수대를 상상해 보았다.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사실 이것만 해도 괜찮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그 후로 점점 더 끔찍하고 엄청난 공포와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리는 역 안으로 들어갔다.
최초의 정적이 고함치는 명령 소리에 의해 깨졌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모든 수용소에서 그 거칠고 날카로운 고함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또 들어야 했다.
그 소리는 마치 희생양의 마지막 비명 소리와 같았다.
하기야 다른 점이 있기는 했다.
그들의 목에서 컥컥거리며 나오는 그 쉰 목소리는 칼에 찔리고
또 찔려서 죽어가는 사람이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애쓸 때 나오는 소리와 비슷했다.
열차 문이 열리자 몇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모두 줄무늬 수의를 입고 머리를 깎았지만 영양상태는 좋아 보였다.
본래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아주 신수가 훤하군, 괜찮은 사람들처럼 보여, 심지어는 웃고 있잖아.
누가 알아, 내가 저 사람들처럼 혜택받는 처지에 있게 될지.'
집행유예 망상
정신의학에 보면 '집행 유예 망상 Delusion of reprieve' 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 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불그레한 뺨과 통통한 얼굴을 한 그들을 보는 순간 우리는 크게 용기를 얻었다.
그 사람들이 수감자 중에서 특별히 뽑힌 사람들이라는 것과,
수년 동안 매일 같이 이 역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책임지는 접대반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과 그들의 짐을 처리했다.
귀한 물건이나 몰래 가지고 들어온 보석도 압수했다.
전쟁 기간 중 마지막 몇 년 동안 아마도 아우슈비츠가 유럽에서 가장 희한한 곳이었을 것이다.
수용소의 대형 창고는 물론 나치 대원들의 수중에도 금, 은, 백금,
다이아몬드와 같은 값비싼 보석들이 흘러 넘쳤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1.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기껏해야 200명 정도 밖에 들어갈 수 없는 가축우리 같은 건물에 구겨 넣어졌다.
우리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바닥에 드러눕기는 커녕 쭈그려 앉아 있을 만한 자리조차 없었다.
나흘 동안 우리가 받은 양식이라고는 5온스짜리 빵 한 개가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이 건물을 책임지고 있는 고참 수감자가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된 넥타이핀을 놓고
한 접대반원과 흥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번 돈의 대부분을 슈냅스라는 술을 사는 데 썼다.
'즐거운 저녁 한때'를 위해 필요한 슈냅스를 사는 데 천 마르크의 돈이 필요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장기수들에게 슈냅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술로 자기 자신을 마취시키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누가 비난을 하겠는가?
그런데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 중에는
나치 대원으로부터 거의 무제한으로 술을 공급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스실이나 화장터에 배치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언젠가는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로 대치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요된 사형집행인의 역할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고,
대신 자기 자신이 그 희생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와 함께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언젠가는 자기에게 집행유예가 내려질 것이며,
만사가 잘 풀릴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곧 눈앞에 펼쳐질 장면 뒤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를 몰랐다.
우리는 짐을 모두 열차 안에 두고 내린 다음 두 줄로 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친위대 장교에게 검열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용감하게도 빵 봉지를 외투 속에 감추는 용기를 발휘했다.
내 줄에 있는 사람들이 한 명씩 장교 앞을 지나갔다.
만약 그 장교가 내 빵 봉지를 발견하는 날에는 엄청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소한 그가 주먹을 날려 나를 쓰러뜨리기라도 할 것이다.
경험을 통해서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교가 가까워지자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똑바로 세웠다.
빵 봉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
드디어 장교와 마주 보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장교는 군복이 꽤 잘 어울리는 마른 체격의 키가 큰 사람이었다.
※ 이 글은 <죽음의 수용소>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빅터 프랭클 - 죽음의 수용소
청아출판사 - 2005. 08. 10.
[t-07.09.19. 210903-16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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