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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ㅁ - ㅂ

미우라 아야꼬 - 비는 내일이면 개이겠지

by 탄천사랑 2007. 4. 10.

미우라 아야꼬 전집 -「비는 내일이면 개이겠지

 

 


9월 14일
일요일이다.  아침부터 형부,  아니 그놈의 서재에 있는 책을 싸고 있었다.
언니는 서재엔 한 발자국도 발을 들여놓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럼 부탁한다.”  

 

언니의 일자리는 금방 구해졌다. 
아버지의 친구분이 경영하시는 찻집의 카운터를 보는 일이다.
접대업 같은 것이 언니한테 맞을지 모르겠다.

책정리는 쉽지만은 않았다. 
보들레르, 호리다쯔오(堀辰雄), 카로사, 아이즈야이치(會津八一) 등등 잡다하게 많았다. 
세계문학전집, 미술전집 등도 엄청나게 많았다.
이 정도의 책을 읽고도 그놈이 한 짓은 공금횡령과 아내와 그 여동생을 속이고 사랑의 도피를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왠지 인간이란 것이 정말 한심스러워졌다.

잠깐 쉬면서 몽테뉴의 「수상록」을 넘기는데 그 속에 사진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아, 형부다. 
형부 옆에 5살과 3살 정도의 시원스런 눈매를 한 두 명의 남자아이가 생글생글 웃고 있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서 갸름한 얼굴을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정말 닮았다.”  

 

나는 무의식 중에 중얼거렸다. 
이 남자아이들은 보면 볼수록 형부와 꼭 닮았다.
나는 형부의 배신으로 태어난 두 아이를 유심히 보았다.
사진이 끼워져 있던 페이지에 빨간색 줄을 그은 문장이 있었다.

'지나치게 행복했던 추억이 현재의 불행을 갑절로 느끼게 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형부도 불행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할 마음은 없지만 탓할 마음도 없어졌다. 
사람 마음은 참 이상하다.
단지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고 한 다자이 오사무와 같이 나도 누군가에게 사과하고 싶어졌다.


9월 30일
밖에는 비가 억수로 내리고 있었다.
방과 후에 도서실에서 수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나오히코가 왔다.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리는 그냥 빙긋 웃어버렸다. 
나오히코는 내 옆에 앉았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오늘부터 잘 지낼 것 같은데?” 

 

나오히코는 기쁜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거의 가랑비로 바뀌어 있었다.

“일요일에 이사가.”
“이사? 어디로?”
“아파트야. 언니랑 둘이 살 거야.”

나오히코는 뭔가 묻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괜히 주제넘은 참견이란 생각이 들었던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유우코하고 친하지 않아?”
“응, 친해.”   

 

나오히코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는 덧붙였다.

 

“그런데 너처럼 여러 가지로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제일 중요한 건 네가 옆에 없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고 말이야.”
“뭐야?  그럼 우리는 시험용 친구인가--- .”

우린 소리를 맞추어서 웃었다. 
그렇게 나는 아주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나는 무거운 죄를 지은 경험을 했지만,  나오히코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내일은 날씨가 개일까?”  

 

헤어질 때 나는 나오히코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멈추지 않은 비가 있었니?”  

 

나오히코가 말했다.
그렇다. 
지금까지 개이지 않았던 비는 없었다.
쓰러지면 일어나면 된다.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상처 없는 인생은 부끄럽다.”라고 형부가 말했었다.

이렇게 가르쳐 준 형부에게 나는 상처를 받았다.
그렇지만 열심히 살아가면서 받았던 상처, 
어리석기 때문에 받았던 상처,  이 모든 상처는 인간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보다 상처를 받는 편이 훨씬 좋다.
나는 내 인생에 큰 목표를 가지고 살아갈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는 내일이면 개이겠지.


미우라 아야꼬 - 비는 내일이면 개이겠지
역자 - 이재신
한국장로교출판사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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