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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일상 정보/사람들(인물.

내가 낳은 아들, 나를 부활시킨 아들/김점선 (화가)

by 탄천사랑 2023. 5. 7.

· 「우먼센스 - 아름다워서 눈물나는 가족이야기」

이미지 다음에서

 

 

나는 단 한 명의 사람을 낳았다. 
건강한 사람을 낳겠다는 결심으로 커피 한 잔, 드링크 한 병도 안 마셨다. 
술, 담배는 물론이고 되도록이면 인스턴트 음식도 멀리했다. 
그렇게 건강한 사람을 낳을 준비를 하면서 살았다.

임신할 준비를 하면서,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남자를 골랐다. 
내가 그림을 열심히 그리려면 단순한 생활을 참아낼 수 있는 남자를 만나야 했다. 
그래서 소박한 남자를 찾았다. 
나는 그림으로 성공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사는 목표였다. 
아주 좋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곧 나의 행복이었고, 
그러려면 반드시 결혼을 해야만 한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것도 아주 가난한 남자와. 그래서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다.

몹시 가난하던 시절, 아기를 가졌다. 
병원에 처음 찾아간 날, 내가 이미 임신 7개월이라는 소릴 들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말했다.

"뭘 믿고 이런 노산에 이렇게 태평입니까?"
"가난이요"하고 말하려다가 묵묵히 있었다.

그때 내 나이 33세였다. 
예수가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면서 죽고 곧이어 부활했다. 
나는 33세에 내 생살을 찢고 한 사람을 낳았다. 
그리고 25년 후에 그 사람 덕에 부활했다. 
오십견의 고통 속에서 아들에게 컴퓨터를 배웠고 나는 '디지털 화가'로 고통으로부터 부활했다.

그런데 그때는, 
왜 이렇게 늦게 병원에 왔냐고 다그치는 의사가 우스웠다. 
마치 의사는 무료진료소를 운영하는 사람 같았고 이 세상에 진료비를 걱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투였다. 
그래서 그가 우스웠다. 
진료비를 수납하지 않으면 쫓아낼 게 뻔한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누가 진료비 걱정을 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말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은 내 힘의 낭비라고 생각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다행히 뱃속 아기는 아무런 이상 없이 잘 자라주었다. 
자연분만했다. 
다만 임신 중독증이 있어서 주사기를 여섯 개나 몸에 꽂은 채 아이를 낳았다. 
산부인과 병원이 없던 옛날 같으면 나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을 것이다.
혈압이 200을 넘는 위기 상황이 왔다. 
남편은 내가 죽어도 항의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그래도 나는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다. 
오직 이를 악물었을 뿐이다.

언니가 첫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여동생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병원에서 아이 낳으면서 욕하고 고함지르는 여자들이 너무 싫더라고 했다. 
언니는 아무리 아파도 소리지르지 않고 품위를 지켰다고 말했다. 
그 순간 '정말 나도 그렇게 참을 수 있을까' 자신을 의심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으려고 병원에 가면서는 자꾸 언니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도 언니처럼 소리를 안 내려고 노력했다. 
의사는 내 혈압이 높아지는데 소리를 안 내니까 내가 의식을 잃어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담당의사가 질문했다.

"아픈데 무슨 생각하셨어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 
고문당하는 유관순!

일 년 동안 아이를 내 젖을 먹여 길렀다. 
난 임신 중에도 수유 때도 목이 마를 때마다 우유를 마셨다.


영원한 공포, 임신! 
그것은 생선 시장에서 보는 이상한 바다동물처럼 징그럽게 낯선 일이었다. 
미숙한 정신계에서 방황하던 젊은 날, 난 임신을 그렇게 느꼈다. 
실질적인 임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몽상적으로는 나도 임신을 원한 적이 있었다. 
중학생일 때, 
그러니까 사춘기의 시작 무렵에 부모에 대한 비판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아이를 낳아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르고 싶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 맘에 안 들게 나를 다룰 때 그렇게 느꼈다. 
아이를 낳아서 지금 내가 받는 고통을 전혀 안 주고 길러내야지 하고 생각했다.

내 맘에 들게 아이를 기르는 사람이 주변에는 한 명도 없었다. 
나는 그들의 돌봄으로 자라면서도 그들을 비판했다. 
그들의 가치관이 싫었다. 
이미 거의 다 자라버린 자신은 반쯤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아이를 낳아서 출발부터 아주 좋게 기르고 싶었다.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인간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섬세한 보살핌, 
예민한 감각으로 우울과 잠재의식까지 읽어내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주면서, 
어린이를 덜자란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신성이 잠재된 미지의 존재로 경건하게 대하는 부모로 살고 싶었다.

바로 내가 그렇게 길러지길 원했는데, 나의 아동기는 그렇지 못했다. 
나의 감성을 무시하는 둔한 어른들 사이에 껴서 산다는 것은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초경도 시작되기 전에 임신부터 원한 셈이다. 
그런데 막상 결혼 적령기에 도달해서는 결혼에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나를 기른 주변의 문화에 문제가 있다는 증표다. 
왜 아주 자연스럽게 아기를 갖고 낳아 기를 생각이 안 드는 인간으로 자라났단 말인가? 
아무튼 전혀 임신할 의사 없이 떠돌던 나를 자극한 일이 두 가지나 일어났다.




어느 가을날, 
길에서 건강한 아들을 데리고 걷는 젊은 예술가 김중만을 만났다. 
그전에 그를 미술인들의 회식 자리에서 만났을 때는 그가 안쓰러웠다. 
한국사회가, 
특히 남성사회가 그들과 다른 문화를 가진 자에게 가하는 고문을 김중만을 통해서 처음으로 목격했다.

김중만은 막 프랑스에서 한국을 방문한 예술가였다. 
문화가 달랐다. 
그 낯설음을 학대로 나타내는 한국 남자들을 보고만 있었다. 

한국 남자 미술인들이 김중만의 머플러를 잡아당기면서 그를 비웃었다. 
'야자'했다. 
김중만은 침묵했다. 
우울한 회식 자리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환한 길에서 걸어오고 있는 김중만 가족을 만났을 때, 그는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었다. 
마누라와 함께 세 살된 아들을 거느리고 김중만은 사간동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그 아이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저렇게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구나!'
'저렇게 자연스럽게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구나!'
'저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우리는 왜 결혼도, 아이를 낳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일까?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결혼을 결심하게 만든 두 번째 사건. 
김상유 선생님은 내가 미술을 전공하기 전부터 존경하는 선생님이었다. 
그의 판화작품을 나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사유화의 시작이라고 본다. 
생각이 들어간 그림! 
생각이 더 중요한 그림!
철학의 시각화! 
철학을 그림으로 풀어낸 그림. 
뭐 이렇게 혼자서 생각하면서 좋아했다. 
그런데 그 김상유 선생님이 나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김점선은 단군 이래 최고의 화가다."

처음 보는 나를 그렇게 칭찬했다. 
나의 초기 그림, 
도롱뇽을 광목에 그린 그림, 
주홍색과 흰색과 검정색으로 된 그림을 보고 그렇게 칭찬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후에는 나를 꾸짖으셨다.

"결혼하지 않고 부모한테 돈 타내서 물감 사는 인간이 화가냐?"

먼저 칭찬하고 나서 꾸짖는 방법에 내가 말려든 걸까? 
아무튼 그 순간 나는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한 달후에 실질적인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6개월 후에는 미혼모가 되었다.

나는 영원히 미혼모로 아이를 키우려고 했다.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호적 같은 걸 안 만들고 원시인처럼 구석기시대 방식으로 아이를 기르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이가 백일이 조금 지났을 무렵, 
남편이 나 몰래 동사무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출생 신고도 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법적인 가족이 되었다. 
남편이 나의 인생관을 침해한 것이다.

남자 아인데 나는 이름을 '순자'라고 지으려 했다. 
역행하고 싶었다. 
씩씩한 남자이름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은 '상욱'이라는 이름으로 동회에다 신고해버렸다.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결혼이구나 하면서 혼자 슬퍼했다. 
더욱이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남편은 '순자'라는 이름으로 너를 부르려고 했다고 아들한테 일러바치기까지 했다. 
아들은 펄쩍 뛰면서 큰일 날 뻔 했다고 아버지를 고마워했다. 
그럴 때 나는 속으로 다시 슬펐다. 
너희들이 내 깊은 뜻을 이다지도 모르다니!

아들이 대학생이 된 어느날 말했다.

"엄마! 
 순자라는 이름이면 멋지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만 말했다. 
'그걸 깨닫는 데 이십 년도 더 넘게 시간이 걸리는구나!'
다시 슬퍼졌다.

내가 선택한 남자와 일생을 살고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데도 이런 슬픔이 늘 가슴 밑바닥을 흐른다. 
섬세한 일들이 소통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직접 소통되지 못하는 느낌들!

그래서 문학이 있고 예술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통해서야 어렴풋이 전달되는 것이다. 
예술은 남들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이해와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슬픔을 겪은 뒤에 이런 느낌을 깨달은 것이다.

아이는 조용하고 품위가 있었다. 
아주 어릴 때도 까불지 않았다. 
뱃속에서도 9개월이 되어서야 놀았다. 
만약 내가 임신에 대한 책을 읽어대고, 
임신에 대해 호들갑을 떨면서, 
호사스럽게 임신 생활을 했더라면 나는 야단법석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놀지 않는다고 생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임신하고도 임신 관련 책을 읽지 않았다.
임신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었다.
다만 그냥 읽어오던 방식 그대로 책을 읽었다.

집 나와서 가난한 남자와 살림을 차렸기 때문에 읽던 책은 전부다 친정집에 있었다. 
책이 읽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가난한 중에 돈을 아껴서, 단 한 권의 문고판 책만을 샀다. 
그것도 아주 큰 서점도 아니고 변두리 작은 책방에서 만삭의 몸으로. 내가 찾는 책들은 거기 없었다. 
기껏 참을 만한 책으로 괴테를 샀다. 
괴테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세상이 그 책 한 권만 남기고 다 물에 잠겨 버린 듯이 괴테의 책을 읽었다. 
잠들기 전에도 읽고 베갯머리에 놓고 잠들었다. 
그러면서 내 뱃속의 사람에게 말했다.

'사람은 이렇게 가난할 수도 있다. 
 고통스럽기도 하다. 
 너도 그런 걸 알아야 한다. 
 인생은 이렇게 다양한 느낌들로 꽉 차 있는 것이다. 
 각오해야 한다!'

태중에서 고통을 당해서 그런지 그 사람은 아기 때부터 의젓했다. 
태중에서 그 사람은 충분한 영양소를 모체로부터 공급받지 못했다. 
너무나 가난해서 먹고 싶은 음식을 그 어미가 먹지 못했던 거다. 
그래도 나는 매일 달걀을 먹으려고 노력했다. 
두세 개쯤 먹는 날도 있었다. 
특이한 해산물도 먹고 싶고 쇠고기로 만든 정성이 깃든 음식도 먹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가난했고 나는 만들 줄도 몰랐다. 
그래서 값싸고 변두리 시장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달걀을 사서 먹었다. 
삶은 달걀을 먹으면서 태중의 사람에게 말했다.

'먹고 싶은 걸 다 먹는 건 품위가 있는 짓이 아니다. 
 달걀은 좋은 단백질이고 완전식품이다.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도 행복으로 알아야 한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나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태중의 사람한테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서 살면서도 잘 얻어먹지 못했다. 
나는 하루 종일 그림 그리는 날이 아주 많았다. 
그러니 식품을 사러 다니거나 요리하는 데 시간을 많이 쓰지 않았다. 
나는 최소한의 음식으로 식탁을 차리고 우리는 아주 거칠고 단순한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식탁에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이 오르는 날은 명절 때 뿐이었다. 
그래서 아들은 친구 집에 가면 늘 놀라워했다.

"웬 반찬이 이렇게 많으냐?"
"왜 이렇게 복잡하게 먹냐?"

이런 질문을 해서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아들이 결혼하니까 며느리가 행복해한다. 

"무얼 만들어도 요리 잘한다고 감탄을 해서 즐거워요!" 

며느리는 이렇게 즐거워한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무릇 소박하게 살아온 자의 행복을 너희들이 감히 짐작이나 하겠느냐?'



임신을 했을 때는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정말 정상적인 인간이 내 속에서 자라고 있기나 한 걸까?'

뭐 이런 걱정이 생길 때마다 동물들을 생각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암놈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새끼를 쑤욱쑤욱 잘도 낳는다. 
 동물의 반은 암놈이고 그들은 수십 수백 만년 동안 쉬지 않고 새끼를 낳아왔다. 
 지금도 수많은 암컷들이 새끼를 낳는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생명체일 뿐이다.' 

뭐 이런 생각을 하면 맘이 편해졌다.

'나는 곰팡이나 병균들 같은 무성생식 하는 단세포동물이나 바이러스가 아니다. 
 나는 새끼를 낳는 고등동물이다.' 

뭐 이런 생각을 하면 지구가 나의 들판처럼 여겨지고 맘이 편해졌다.

임신에 대한 공포나 우려가 느껴질 때마다 
임신이나 출산 관련 책을 찾아 읽기보다는 내가 동물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려고 애썼다. 
아이를 낳아서 기를 때도, 
아이가 아플 때도 그런 책들을 찾아서 읽지 않았다. 
한번도 임신과 육아에 관한 책을 산 적이 없다. 
괴테는 살지언정!

늘 내가 임컷 동물이라는 사실만을 생각하며 자연을 믿었다. 
동물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새끼를 잘도 낳고 산다. 
나도 그저 동물일 뿐이다. 
적어도 생식기나 내장은 동물 그 자체일 뿐이다. 
그래서 생식기나 내장 같은데 해당하는 책은 안 사고 안 읽는다. 
오로지 큰 골만이 인간이다. 
그것을 위해서 난 괴테를 읽는다. 
동물적인 공포가 몰려올 때는 자연이 가진 생명력을 기억하려고 애썼을 뿐이다.

나는 자연의 일부라고만 생각하면 든든했다. 
아이가 설사를 하면 요구르트를 먹이지 약을 찾지는 않았다. 
아이가 감기에 걸려도 요구르트를 많이 먹이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보면서, 아이와 함께 스스로 웃었다. 
그러면 나았다.

나는 늘 내방에서 그림을 그렸다. 
아이는 집안에서 혼자서 놀았다. 
차츰 내 그림들이 팔리면서 가난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아이가 철들기 전에 가난이 물러갔다. 
그래도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그림 그리는 데 썼다. 
음식은 여전히 세 가지 이상을 식탁에 올릴 수 없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나를 도왔다. 
가구나 문짝의 손잡이 같은 게 고장 나면 내가 고치려 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아이한테 말했다.

"문이 고장 났다."

그렇게만 말했다. 
그러면 아이는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고쳐놓았다. 
그런 아이를 내버려 두고 나는 내 그림에 몰두했다. 
어떤 기계나 전자 제품을 사온다. 
현관에 내려놓기만 한다. 
아이가 포장을 풀고 설치하고 작동시킨다.
신제품이 나와도 그렇게 했다.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 되자 컴퓨터와 캠코더와 텔레비전 수상기를 자유자재로 연결하면서 
TV화면을 컴퓨터 모니터에 영화 화면처럼 색을 변조하고 구성을 바꾸어서 띄웠다. 
그때부터 우리는 아이의 도움을 받는 존재로 변화했다. 
아이는 기술고문으로 우리를 도왔다. 
아이는 그 무렵 캠코더로 홈 무비도 만들었다. 
아이가 스스로 조립한 플라스틱 로봇과 손전등 조명과 그림자를 찍었다. 
제작비 이십 원하고 화면에 적힌 자막이 흐르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 가족이 가까운 야외로 드라이브를 나가면 아이는 캠코더로 로드 무비를 찍었다. 
뒷자리에 앉아서 주변 풍경들을 자유롭게 담았다. 
자동차에서 나오는 음악을 배경음으로 깔기도 했다.



아이는 개울에서 헤엄치는 법을 스스로 익혔다.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싫었다. 
내 식으로 기르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어릴때부터 학교는 나쁜 곳이고 집에서 혼자 공부해야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유치원 갈 나이가 되니까 옆집아이가 유치원 간다고 자랑을 해댔다. 
그러니 우리 아이도 가겠다고 졸랐다. 
할 수 없이 유치원엘 보냈다. 
똑같은 일이 초등학교 갈 때 다시 벌어졌다. 
중고등학교도 대학도 다 가고야 말았다. 
내 뜻대로 된 일이 없다. 
나는 혼자 생각하고 도서관에서 참고 서적을 읽는 독자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했었는데.

그래도 과외는 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꼴지해도 좋다는 말을 수없이 아이한테 했다. 
교육기관에 대한 불신과 평가 방식에 대한 불만을 수없이 말했다. 
그래도 아이는 학교에 다녔다. 
아이는 그림도 잘 그리고 만들기도 잘했다. 
화가나 조각가가 되고 싶다고, 연극배우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나는 엄마같이 친구들도 안 만나고 늘 혼자서 그림 그리면서 사는 인생이 싫어! 
 난 그렇게 살 수 없어! 
 나는 사람들하고 우글우글 살고 싶어. 
 직장 상사를 존경하면서 충성을 바치면서 원만한 인간관계 속에서 살고 싶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아무 것도 강요할 수가 없었다.



아들이 자라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화가였다. 
그는 평생을 내 그림을 보면서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내 그림을 길에 뒹구는 돌 보듯이 한다.

내가 오십견이 와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다. 
그 시절, 
죽음에 이르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남편이 죽고 난 직후에 오십견이 온 것이다. 
슬픔과 우울이 합쳐져서 그런 일이 생겼다. 
살아날 방책으로, 몸과 마음을 어떤 일에 집중시킬 방법으로 컴퓨터를 떠올렸다. 
오로지 자신을 구원의 세계로 이끌어 줄 물체로 컴퓨터를 택한 것이다. 
매일 미친듯이 컴퓨터를 파고들었다. 

곧 컴맹에서 탈출했다. 
우연히 디지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아들은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내가 디지털 그림을 그리자 아들은 놀라면서 나를 화가로 인정했다. 
아들에게 가장 익숙한 도구인 컴퓨터를 내가 사용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방식으로 내가 변하고 나서야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맨 처음에 내 디지털 그림을 보고 아들이 말했다.

"우와, 굉장하다!"
"놀랍다!"
"아하! 화가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내 주변에는 맨 컴퓨터 전문가들이고 
 그들이 그리는 그림을 수없이 봐왔는데 엄마는 정말 다르다. 
 장난이 아니다. 
 이게 화가라는 것이구나.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니, 정말 놀랍다. 
 우리 엄마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아들은 감탄하면서 내게 필요한 도구들을 설치해 주었다. 
광 마우스로 그리던 그림을 마우스 펜으로 그리게 되었다.

나는 아들 덕에 컴퓨터를 겁없이 쓴다. 
처음 컴퓨터를 대할 때부터 컴퓨터를 부수어 먹을 각오로 덤벼들었다. 
지금은 내 생애에서 네 번째로 새로 산 컴퓨터를 사용 중이다.

컴퓨터가 맨 처음 나에게 온 날, 
대충 켜는 법만 가르쳐 주고 아들이 갔다. 
그러자마자 나는 원시인처럼 컴퓨터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나는 한 번도 컴퓨터 학원엘 다닌 적이 없다. 
오로지 혼자서 컴퓨터를 가지고 논 것 뿐이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자세조차도 남다르다. 
나는 왼손에 광 마우스를 쥐고 오른손에 펜 마우스를 쥔다. 
피아노를 두 손으로 치듯이 컴퓨터 자판을 두 손으로 치듯이, 
나는 두 개의 마우스를 동시에 작동시키면서 디지털 그림을 그린다. 
아들은 말한다.

"두 손을 동시에 쓰는 디지털리스트는 이 세상에 엄마 한 사람 뿐이다."

컴퓨터를 시작할 때부터 내 맘대로 다루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맨 처음부터 간섭 없이 막 사용해 보고 싶어서 아들을 밀어냈다. 
포토샵을, 
펜 마우스를 설치하고도 곧 혼자서 쓰기 시작했다.

아들은 늘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설치해 주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내 컴퓨터는 여는 것들과 다르다. 
어쩌다 친구 컴퓨터를 열고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나라여서 내 사고가 얼어버린다.

나는 오로지 내 컴퓨터 속에서만 신천지를 탐험하는 모험가 같은 자유를 누린다. 
나는 내 컴퓨터 속에서 여기저기를 탐색한다. 
그러다 새로운 기능을 찾아내고 그러면, 다시 새로운 그림이 탄생한다. 
아무데나 클릭해 열어보고,
하나하나 시도해보고, 
그렇게 아무렇게나 쓰다가 고장이 나면, 
아들에게 메신저로 물어보거나 
그것도 고장이 나서 안 되면 전화를 손에 들고 그의 지시대로 고쳐가면서 썼다. 
너무 심하게 고장이 나면 아들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주말이 되어, 
아들이 오면 내가 저질러 놓은 모든 잘못을 다 고쳐놓는다.

그런 아들 덕에 
나는 환갑이 다 돼가는 나이에 한없이 용감하고 진취적인 디지털리스트로 부활했다.(p128)


글 - 김점선 화가
출처 - 우먼센스/아름다워서 눈물나는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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