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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못다 한 말

by 탄천사랑 2023. 5. 6.

·고도원 -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꼭 해드려야 할 45가지」

 

 

 

아버지께 못다 한 말

오늘 저녁 교황의 장례 미사를 보았다.
전 세계에서 온 400만 명의 조문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진 장엄한 전례典禮였다.
'미사'라기 보다는 '고별식'이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교황님의 소박한 나무관이 성당 안으로 사라지기 전에 
잠시 문 앞에서 조문객을 마주 보며 머물렀다.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이었고, 
조문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치고 손수건을 흔들며 환호했다.
예수님을 대변해 일생 동안 평화와 화합을 위해 일한 교황님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지만,
최선을 다해 한 삶을 잘 살아온 한 인간에 대한 환호이기도 했다.
기자가 캐나다에서 온 젊은 청년에게 왜 그렇게 멀리서까지 왔냐고 묻자
'다른 세상으로 가시는 교황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왔다'라는 답이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과의 이별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아버지(故 장왕록 박사)를 떠올렸다.
그렇구나.
나는 다른 세상으로 가시는 아버지께 '감사하다'라는 말도 하지 못했구나.

유난히도 덥던 1994년 여름,
친구분과 휴가를 떠나셨던 아버지는 동해에서 수영을 하시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우리 형제들은 늘 아버지의 89세 미수 잔치를 꿈꾸며 살았다.
아무리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삶이라지만,
일흔 살로 돌아가실 때도 20대 청년 같은 몸과 에너지를 자랑하셨던 아버지가 
그렇게 갑자기 가실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여섯 자식 중 그 누구도 떠나시는 곁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속초로 떠나시던 날 아침 나는 자고 있었고,
어머니와 막내 사위가 배웅을 하면서 아버지의 양복바지 한쪽이 치켜 올라가 있어 
막내 사위가 뛰어나가 내려드렸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마지막 본 살아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 해 여름 아버지와 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속편인 <스칼렛>의 공역共譯을 끝내고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공동 집필하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두 시간 전쯤 아버지는 속초 시내에서 전화를 하시면서 
다음날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직접 출판사로 오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 그럼 내일 3시에 출판사에서 만나자.
 같이 11과 작업해야지"

라고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내 귀에서 생생히 메아리치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되어버렸다.

내 일생에 그때 처음 '죽음'을 경험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이 죽을 때, 우리의 일부분도 함께 죽는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내 일부분도 죽었다.
전혀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를 떠나 보낸 다음 느낀 감정은,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경악과 슬픔과 함께 지독한 회한이었다.

아버지는 영원히 그렇게,
항상 내 손 닿는 곳에서 나를 지켜보며 계실 줄 알았기에 아버지의 존재를 당연히 여긴 것,
함께 보낸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낸 것,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을 낭비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진심으로 
'아버지 사랑해요' 한 마디 못한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안타까웠다.

우리 집 딸 다섯은 모두 아버지에게 반말을 했다.
아버지를 대하기 어렵고 무서운 존재라기보다는 늘 친근하고 가깝게 느꼈다.
하지만 다른 집 딸처럼 곰살맞고 애교스러워서 걸핏하면 손잡고 매달리고 
'사랑해요 아빠'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워낙 성격이 직선적이고 퉁명스러워서 아버지께 쓰는 말투가 무뚝뚝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 말씀을 중간에서 끊어먹는 것은 물론,
아버지와 함께 공동 집필이나 번역을 할 때마다 아침 식탁은 논쟁의 자리였다.
글의 소재나 표현, 문체에 대해 토론할 때마다 나는 걸핏하면 눈살을 찌푸리고.

"뭐가 그래 아버지. 안 그렇다구!" 하면서 심통스럽게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속마음으로는 언젠가는 나도 다른 집 딸들처럼 상냥스럽게 말해야지,
그리고 늘 가슴속에 묻어놓은 말,
'아버지 사랑해요'를 해야지 마음먹곤 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너무나 갑자기 떠나셔서 고별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버지 떠나신지 11년,
지금도 나는 길에서 앰뷸런스를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든다.
저 안에 누군가 급히 쓰러진 아버지를 모시고 
타고 간다면 너무나 놀란 가슴에 경황없고 슬프겠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낫구나,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갈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구나.
만약 이 세상을 떠나신다 해도 아버지와 작별인사 할 시간은 있겠구나, 하는 부러움이다.

영국 작가 새뮤얼 버틀러는
"잊혀지지 않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몸은 떠나도 추억 속에 사랑은 남는 것,
우리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영원히 살아 계신다.
그래서 아버지 생전에 못다 한 말을 나는 뒤늦게 이제야 마음속으로 외친다.

"아버지 사랑해요.
 이 세상에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너무나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글 - 장영희교수
※ 이 글은 <부모님 살아 계실 때>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입니다.


그림 - 김선희 
나무생각 - 2005. 0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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