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문화 정보/책(일간.월간.사보.잡지

백발의 학생에게 배운 것

by 탄천사랑 2024. 4. 15.

·「샘터 2024. 04」


FEATURES


백발의 학생에게 배운 것  
지난해 연말, 가까운 동네에 사는 동료 작가가 물었다. “동네에 글을 쓰고 싶어하는 할머니가 계시는데 한번 만나볼래?”
동료 작가가 그 할머니를 처음 만난 장소는 마을 도서관이라고 했다. 글쓰기 강연이 있어 도서관을 찾았던 날, 청강생 중 가장 먼저 도착해 앞자리에 앉아계셨던 분이라고. 강연이 끝나고 조심스레 자신을 찾아와 글쓰기를 배워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언젠가는 동네에서 어르신들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만 글을 쓰고 싶어 하는 할머니와의 만남이 심심한 겨울에 작은 활력이 될 것 같았다.


특별한 글쓰기 수업
새해 첫 수요일, 할머니가 사는 동네의 아담한 카페에서 첫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의 이름은 문윤자, 나이는 일흔아홉이다. 우리 사이엔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더 긴 40여 년의 세월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윤자 님은 내게 정중한 목소리로 수업을 맡아주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삶에서 잊을 수 없는 날들이 될 거라는 기대에 찬 말도 덧붙였다. 그런 그의 눈빛이 맑고 깊었다. 나에게도 저런 눈빛이 있을까 곰곰이 떠올려 볼 만큼 형형했다. 이어 윤자 님은 가방에서 수업 준비물을 꺼냈다. 남편 분이 사주었다는 대학노트와 뾰족하게 깎은 연필이 눈에 띄었다.

“수업 오려고 어제 새로 깎았어요. 얼마 만에 연필을 쥐어보는지 모르겠네요.” 그날 손에 힘을 주고 노트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윤자 님을 보며 생각했다. 가볍게 이 수업을 대해서는 안 되겠다고. 그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동네 카페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배운다. 약속한 수업은 다섯 번이지만 어느새 여덟 번째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수업료는 커피 한 잔, 과제는 매주 글 한 편 쓰기. 테이블에 따뜻한 커피와 생강차가 놓이면 그때부터 수업 시작이다.

“한 주 동안 잘 지내셨어요? 마음에 남는 일들이 있었나요?” 수업은 한 주를 돌아보는 일로 시작된다. 마음에 선명하게 남은 기억들이 글쓰기의 좋은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윤자 님에게는 이런 순간들이 많이 살아있다. 마음이 힘든 50년 지기 친구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했던 일. 노인일자리로 근무하는 어린이집의 아이가 자신을 스스럼없이 안아주었던 일. 퇴근 후 고단해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는데 어두운 구름이 스르르 걷히며 반짝 햇빛이 났던 일. 몇 해 전, 한 바자회에서 500원을 주고 산 털모자가 늘어나 이리저리 고쳐 썼던 날, 어려운 형편에 남편이 큰 마음 먹고 백화점에서 좋은 모자를 사주었던 일. 그러면서 남은 평생 쓰면 되는 거라고, 잘 어울려서 좋다고 한 말에 눈물이 났던 일.


꾹꾹 눌러쓴 하루하루
그중 윤자 님은 모자 이야기를 글로 써냈다. ‘내 인생에 아주 특별한 모자’라는 제목이 붙은 노트 두 장 분량의 산문은 찡하고 아름다웠다. 윤자 님이 꾹꾹 눌러 쓴 글 한편에는 모자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어떤 모자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게 작은 장식까지 세세하게 그린 그림이었다.

“윤자 님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에요. 작은 것도 유심히 지켜보고 소중하게 기억하잖아요.” “선생님, 얼마 전에 어린이집에서 같이 일하는 후배도 그런 말을 했어요. 언니는 어쩜 그 나이에 아직도 감동이 남아있느냐고요.” 윤자 님과 처음 만났던 날, 평소 쓴 글이 있으면 보고 싶다는 말에 그는 일기장 몇 권을 보여주었다. 그중엔 몇 년 동안 매일 기록한 감사일기가 있었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면서 감탄했다. 그가 감사해하는 일들이 너무나 사소했으므로. 베란다로 불어오는 바람, 밤사이 피어난 꽃, 옆집에서 보내준 호박죽, 남편과 공원을 걷는 저녁. 그동안 윤자 님이 정성 들여 쓴 몇 편의 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삶이란 하루하루 감사하는 일이란 것을. 감사해하는 사람이기에 여전히 삶에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 저는 지금처럼 일상을 누리는 시간이 앞으로 5년 정도 남았다고 생각 해요.”
“5년은 너무 짧지 않나요?”
“그래서 하루하루가 아까워요. 요즘에도 길을 걷다가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현수막이 있으면 바로 눈이 가요. 해보고 싶은 게 아직 많거든요. 그래도 다 할 수는 없겠지, 아쉬워도 욕심내지 말자 그래요. 요즘은 글쓰기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지금 내 삶에 감사해요.”

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윤자 님을 상상해 본다. 길에서 우연히 배움의 갈망이 샘솟으면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는 서서히 걸음을 늦출 것이다. 이내 걸음을 옮기는 그의 마음에 얕은 아쉬움이 찰랑이지만, 다시 세상 구석구석을 기쁘게 바라볼 것이다. 어두운 구름이 스르르 걷히고 반짝 나타나는 햇빛에도 고마움을 느끼면서.

지난겨울 여든을 바라보는 한 사람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이 시간이 나에게 무엇을 남길까 생각한 적이 있다. 윤자 님이 노트에 꾹꾹 눌러쓴 연필 자국처럼 그와 함께하는 동안 내 마음에 선명하게 남은 것들을 감각한다. 덕분에 기쁘게 봄을 맞는다. 살아있어서 감사하다.




김달님
세상을 밝게 비추는 사람이 돼라는 의미로 할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처럼 따뜻한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지은 책으로 《나의 두 사람》 《작별인사는 아직이에요》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가 있습니다.

 


글 - 김달님
출처 - 샘터 2024. 04.

[t-24.04.15.  20210403-170143-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