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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외국작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안톤 슈냑 산문집

by 탄천사랑 2007. 7. 23.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  안톤 슈냑 산문집 / 문예출판사 2004. 11. 20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庭園)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發見)된 
작은 새의 시체(屍體)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大體)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週日)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古宮). 
그 고궁(古宮)의 벽(壁)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窓門)의 삭은 나무 위에는
'아이 세여, 네 너를 사랑하노라 ·····'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씌어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歲月)이 흐른 후(後)에 문득 발견(發見)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便紙). 
편지(便紙)에는 이런 사연(事緣)이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所行)들로 인(因)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

대체(大體) 나의 소행(所行)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稚氣)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사건(戀愛事件)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記憶)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因)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동물원(動物園)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焦燥)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鐵柵)가를 왔다 갔다 하는 그 동물(動物)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忿怒), 
괴로움에 찬 포효(咆哮),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絶望感),
미친 듯한 순환(循環),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횔덜린의 시(詩), 
아이헨도르프의 가곡(歌曲).
옛 친구(親舊)를 만났을 때,
학창 시절(學窓時節)의 친구(親舊) 집을 방문(訪問)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尊敬) 받을 만한 고관대작(高官大爵),
혹(或)은 부유(富裕)한 기업주(企業主)의 몸이 되어,
몽롱(朦朧)하고 우울(憂鬱)한 언어(言語)를 조종(操縱)하는 
한낱 시인(詩人) 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態度)를 취(取)할 때.
사냥꾼의 총(銃 )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香氣). 
이 향기(香氣)는 항상(恒常) 나에게 
창(窓) 앞에 한 그루 노목(老木)이 섰던 나의 고향(故鄕)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公園)에서 홀러오는 은은(隱隱)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
누구인가 모래 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당신(當身)은 여전(如前)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憂鬱)한 병실(病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汽車)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黃昏)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幽靈)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車窓)에 
미소(微笑)를 띤 여여쁜 여인(女人)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華麗)하고 성대(盛大)한 가면무도회(假面舞蹈會)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代議員) 제씨(諸氏)의 강연집(講演集)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空氣)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戱弄)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徘優)와 인사(人事)할 때.
공동묘지(共同墓地)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世上)을 떠난 소녀(少女) 클라라 잠들다'라는 
묘비명(墓碑銘)을 읽을 때. 
아, 그녀(女)는 어린 시절(時節) 나의 단짝 친구(親舊)였지.
하고 많은 날을 도회(都會)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시냇물.
숱한 선생(先生)님들에 대한 추억(追憶).
수학 교과서(數學敎科書).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便紙)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病席)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편지(便紙)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愛情)과 동경(憧憬)에 넘치는 사연(事緣)이 웃음으로 읽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女)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女)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散策)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초행(初行)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酒幕)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門)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音聲)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時計)가 새벽 한 시(時)를 둔탁(鈍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때 당신(當身)은 불현 듯 일말(一沫)의 애수(哀愁)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秋收)가 지난 후(後)의 텅 빈 논과 밭.
술에 취(醉)한 여인(女人)의 모습.
어린 시절(時節)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當身)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倨慢)한 붉은 주택(住宅)들이 들어서 있는 데다 
당신(當身)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王子)처럼 경이(驚異)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五六月)의 장의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老婆)의 눈물.
거만(倨慢)한 인간(人間).
바이올렛색(色)과 검정색(色). 
그리고 회색(灰色)의 빛깔들.
둔(鈍)하게 울려오는 종(鐘)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弦).
가을밭에서 보이는 연기(煙氣).
산(山) 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自動車)에 앉아 있는 출세(出勢)한 부녀자(婦女者)의 좁은 어깨.
유랑가극단(流浪歌劇團)의 여배우(女徘優)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廣大).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休暇)의 마지막 날.
사무실(事務室)에서 때묻은 서류(書類)를 뒤적이는 처녀(處女)의 가느다란 손.
만월(滿月)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루트 함순'의 두세 구절(句節).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鐵窓) 안으로 보이는 죄수(罪囚)의 창백(蒼白)한 얼굴.
무성(茂盛)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ㅡ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t-07.07.23.  20230724_18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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