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홉킨스, 레이 힐버트 - 청소부 밥」
광화문
샌드위치 신세
로저가 사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세라와 베카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다리에 매달렸다.
로저는 몸을 숙여 아이들에게 키스하고는 아내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 로저가 물었다.
"아니, 왜?"
"그냥.... 회사에 잘 안 오잖아.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연락 없이 와서 놀랐나 보네? 미안해."
달린이 말했다.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미리 전화를 못 했어.
애들이 아빠랑 같이 저녁 먹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세라가 이번 소프트볼 경기에서 투수를 맡게 됐거든."
"그래?"
로저는 세라의 옆구리를 살짝 간질이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가 대단한 일을 해냈구나."
"그만, 아빠! 간지러워요!"
세라가 깔깔대며 말했다.
"아빠도 같이 저녁 먹으러 갈 수 있는 거지?" 베카가 졸라댔다.
"같이 가."
"글쎄......,"
로저는 아직 읽지 못한 이메일과 보고서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을 것을 생각하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가족 파티에 아빠가 빠질 수야 없지."
"우와~~ 신난다!"
아이들은 깡충깡충 뛰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차에 올라탄 후 로저가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공주님들?"
"아, 미리 얘기한다는 걸 깜빡했네. 오늘은 세라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니까 당연히......"
"피자, 피자! 피자 먹으러 가요!"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합창하듯 소리쳤다.
"대신 오늘은 샐러드도 많이 먹기로 약속했어. 불평하지 않기로 말이야."
달린이 말했다.
"그래야지. 운동선수가 피자만 먹으면 쓰나. 신선한 야채도 많이 먹어야지."
로저도 거들었다.
그들은 밝은 분위기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빨간색과 하얀색의 체크무늬 테이블보로 덮여 있는
테이블 위에는 생기 가득한 꽃송이가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베카는 자리에 앉더니 바로 옆에 빈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았다.
레스토랑 종업원이 아이들을 위해 색칠놀이 책과 색연필을 가져다주면서
베카 옆의 빈 의자를 치우려고 하자 베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돼요. 척의 자리예요."
종업원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자 달린이 설명했다.
"상상의 친구예요."
"아. 그렇군요."
종업원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베카에게 눈을 한 번 찡긋하더니 물었다.
"척에게도 색칠놀이 책을 한 권 가져다줄까?"
"잠깐만요, 물어볼게요."
베카는 빈 의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잠시 가만있더니 이내 대답했다.
"척이 그러는데요, 자기는 이제 다 커서 그런 거 안 한대요.
어쨌든 신경 써주셔서 고맙다고 전해 달래요.
"그럼 주문하신 음료수부터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달린은 로저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들은 척이 베카 또래이거나 베카보다 어린 남자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로저가 달린에게 몸을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척은 대체 몇 살인 거지?"
"나도 모르겠어."
달린이 대답했다.
"베카한테 한 번 물어볼까?"
"글쎄, 오늘은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달린이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달린은 '척 문제'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졌고,
로저는 아이들 일에 좀 더 신경 쓰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는 앞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로 결심하고 일단 화제를 돌리려고 입을 열었다.
"세라, 시합은 언제니?"
"목요일 오후예요."
세라는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빠, 혹시......,"
"세라."
달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세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빠는 일하고 계실 시간이잖니."
"약속할 수는 없지만 가보도록 노력할게."
로저는 세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채고 대답했다.
이 말에 세라와 베카는 활짝 웃는 얼굴이 되었지만,
달린은 마뜩지 않다는 표정으로 로저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로저는 아이들이 색칠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틈을 타 낮은 목소리로 달린에게 물었다.
"알면서 그래."
달린이 대답했다.
로저는 여전히 의아한 눈빛으로 달린을 바라봤다.
"그렇게 말해놓고 안 오면 세라가 얼마나 실망할지 알기나 해?
지난번에 자기가 약속 못 지켰을 때를 생각해 봐."
달린 역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
이번에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
로저는 달린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달린의 표정에선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로저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로저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이번에는 약속 꼭 지킬게."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종업원은 개인 접시 옆에 샐러드 그릇을 하나씩 놓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피자를 테이블 중안에 내려놓았다.
아이들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로저는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는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다시 회사로 들어가야 했지만,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함께한 덕분에 죄책감 없이 가벼운 기분으로 헤어질 수 있었고
달린의 얼굴에도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달린은 마음껏 웃고 떠들고 난 뒤 곤히 잠든 두 딸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
목요일 오후, 로저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손님 네 명이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다.
"크로킷스틸에서 오셨답니다.."
비서 베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명함에는 품질 감사 회사의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품질 감사 때문에 왔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로저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네?"
로저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로저는 베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중요한 약속을 해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까?
그러나 베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로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품질 감사를 신청한 적이 없습니다."
"크로킷스틸에서 지시한 겁니다. 여기 서류를 가져왔으니 확인해 보시죠."
감사팀이 말했다.
"베키, 크로킷스틸의 바튼 우즈 회장님과 전화 연결 좀 해줄래요?"
다급해진 로저가 베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두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킴 브로우 씨."
감사팀 중 한 명이
이런 식의 대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연신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오늘 저희가 방문하는 걸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요."
"아뇨,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로저가 대답했다.
"게다가 지금은 다른 일로 너무 바빠서 도저히 감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때마침 비서 베키가 크로킷스틸 회장과의 전하 연결에 성공했고,
로저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상황을 설명했다.
"복잡한 일은 아니야. 걱정 말게나."
요란한 소음 속에서 바튼 우즈 회장의 목소리가 들러왔다.
"서류 몇 장만 작성해 주면 나머지는 우리 팀원들이 다 알아서 할 거야. 걱정 붙들어 매라고."
"그건 알고 있지만, 적어도 하루 전에는 연락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로저가 말을 이었다.
"감사는 다음 주 월요일에 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자네 쪽 상황은 알지만 우린들 어쩌겠나?
우리가 ISO(국제표준화기구) 인증을 받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 중인 건 알고 있지?
동유럽의 거래 업체들 가운데 유럽 연합에 가입한 나라의 회사들은 지금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네.
새로운 질서에 편입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지.
우리는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인증을 받아야만 해.
로저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우린 모두 한 배를 탄 운명이 아니겠나?"
"그야 물론 그렇죠."
로저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 회사는 이미 ISO 인증을 받은 상태입니다.
크로킷스틸의 ISO 인증을 위한 감사를 위해서 인력을 빼내기도 힘든 상태고요.
게다가 저도 집안일 때문에....,"
다시 한번 수화기 건너편에서 거친 소음이 들려왔다.
"연결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네요."
로저가 말했다.
"지금 공항이라서 그래. 그럼 협조 부탁하네.
오늘 감사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자고."
"하지만....,"
로저가 항변하려 했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그는 시계를 봤다.
밖에는 품질 감사단이 기다리고 있고, 조금 후면 세라의 소프트볼 경기가 시작될 것이다.
달린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말해놓고 안 오면 세라가 알마나 실망할지 알기나 해?
지난번에 자기가 약속 못 지켰을 때를 생각해 봐.'
로저는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을 달린이 과연 이해해 줄지 걱정이 들였다.
이건 분명 로저의 잘못은 아니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하필이면 이런 때 생기다니!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졌고, 이제 결정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로저는 잘 알고 있었다.
***
"좋았어, 세라! 할 수 있어!"
7 대 7 동점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일곱 살배기 딸을 바라보며,
로저는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세라는 아빠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투수가 공을 던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초구를 정확하게 쳐냈다.
세라가 친 공은 유격수의 키를 훌쩍 넘겼고 결국 승점을 기록했다.
경기가 끝나자 세라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아빠에게 달려와 안겼다.
로저는 자랑스러운 딸을 꼭 안아주었다.
"아빠, 봤어요? 제가 치는 거 봤어요?" 세라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봤고말고! 정말 멋진 장면이었어." 로저는 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재미있었니?"
세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그때 코치가 다가와 로저에게 말했다.
"다행히 시간을 내셨군요, 킴 브로우 씨. 세라가 아빠가 오신다고 아이들에게 자랑을 많이 했답니다.
"아주 멋진 경기였어요."
로저는 어린 선수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린 아이들인데 대단하죠? 특히 세라는 정말 뛰어난 선수예요.
정말 뛰어난 선수예요. 절대 포기라는 걸 모르죠.
사실 두 번이나 선발에서 탈락했는데 혼자 연습해서 투수 자리를 따냈답니다.
저도 그런 끈기를 본받고 싶네요."
로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약간 당황했다.
세라는 왜 선발에서 탈락했다는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그런 실망감을 혼자 감당해냈을 것을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어른스러움이 기특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좋은 아빠가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난 그때 어디에 있었던 걸까? 나는 지금까지 어떤 아빠였던 거지?'
로저는 차로 돌아가 달린의 손을 살며시 잡고 두 딸이 뛰노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때 문득 밥의 지침이 떠올랐다.
그는 이제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족은 그에게 진정한 축복이었다.
그런데도 여태껏 그 축복을 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는 더 이상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휴대폰 음성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런 다짐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메시지 중 다섯 개는 그와 오랜 시간 동고동락해온 자금 관리이사 프레드 호퍼가 남긴 것이었다.
로저는 세라의 경기를 보기 위해
크로킷스틸의 품질 감사단을 프레드에게 떠넘기고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왔던 것이다.
감사단은 분명 프레드를 잡아먹을 듯 볶아댔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이렇게 여러 번 메시지를 남겼을 리가 없었다.
'그놈의 감사를 어떻게든 다음으로 미루고 왔어야 하는 건데....,'
로저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한 채 사무실로 향했다.
밥의 지침들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과연 그것을 실행할 수 있을까?
직장 일만 해도 숨이 차는데 가정에까지 정말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오늘 일만 해도 그랬다.
겨우 두 시간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렇다고 회사를 선택했더라면 아마 집에서 난리가 났을 것이다.
로저는 그야말로 가정과 회사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샌드위치 신세였다.
한가롭게 청소 일이나 하고 있는
밥이 지금 이런 상황을 대체 알기나 하고 그런 지침을 이야기한 것일까? (p94)
※ 이 글은 <청소부 밥>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토드 홉킨스, 레이 힐버트 - 청소부 밥
역자 - 신윤경
위즈덤하우스 - 2006. 11. 15.
광화문 [t-23.10.22. 231021-143131-2-3]
'자기개발(경제.경영.마케팅'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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