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미 외 - 부부로 산다는 것」
1 -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주는 배려
009
추억을 함께 쌓아가는 것
"영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버스에 오르자 서글서글하게 생긴 여자 가이드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밤새 비행기 타고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피곤 하시겠지만 모처럼 오신 거니까 하나도 빼놓지 말고 기억 속에 꼭 꼭 담아두세요. 아셨죠?"
그녀는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신혼여행 이후 15년 만의 해외 나들이.
어떻게 준비해 온 여행인데 감히 고단할 수 있겠는가.
반나절을 넘게 비행기의 좁은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남편과 아이도 들뜬 모습이었다.
잠깐 눈을 붙이긴 했지만 너무도 가슴이 설레 금세 깨고 말았다.
차창 밖으로 낯익은 풍경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영국의 작고 예쁜 집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자. 이거 받아."
신혼의 꿈에 젖어 있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한 그가 느닷없이 커다란 돼지 저금통 하나를 내밀었다.
"응? 이게 뭔데?"
"자기 유럽 여행 가보는 게 소원이라며? 그래서 내가 하나 얻어왔지."
"이거랑 유럽이랑 무슨 상관인데?"
"유럽여행 가려면 어디 한 두푼 들어야 말이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모아서 멋지게 다녀오자."
그녀는 그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영화를 보다가 '유럽 한번 다녀왔으면 소원이 없겠어'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가 그 얘기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피~ 어느 세월에 여기다 돈을 모아서 유럽을 가?
그냥 보내주기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야. 정말로 유럽 가려고 그러는 거라니까."
한국인 관광객 일행이 탄 버스가 런던 시내로 접어들었다.
교통정체가 시작됐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니 소형차 일색이었다.
'선진국 사람들도 이렇게 작은 차들을 타고 다니는데
겉 멋만 든 우리들은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중대형 차를 뽑아서 거들먹 거리고 있구나'
그녀는 남 보기 창피하니까 우리도 중형 차로 바꾸자고 남편을 채근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가이드가 퀴즈를 냈다.
"여러분, 제가 퀴즈를 낼게요.
맞히는 분께 이 왕실 근위병 인형을 선물로 드립니다.
영국에 오시니까 뭔가 우리나라랑 다른게 있죠?
네, 맞아요.
차들이 왼쪽 길로 다니죠. 아뇨, 이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부터 문제, 차들이 왼쪽으로 통행하는 이유가 뭘까요?"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그녀 옆에 앉아 있던 아들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마차 타고 다니던 전통 때문에 그래요.
마부가 오른손으로 채찍질을 하니까요.
만약 오른쪽으로 다닌다면 지나가던 행인이 채찍을 맞을 수도 있거든요.
마차로 다닐 때부터 습관이 돼서 지금까지 그렇다고 하던데요."
사람들이 와 하면서 갈채를 보냈다.
가이드가 말했다.
"정답입니다. 너 몇 살이니?"
"열 두살이예요. 초등학교 5학년이죠."
"여러분,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세요. 정말 대단한 어린이군요. 이 선물을 드릴게요."
아이의 입이 귀에 가서 걸렸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돼지 저금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을 다했다.
그는 매일 저녁 주머니를 뒤져 잔돈을 돼지 먹이로 주었고,
그녀 역시 물건 사고 거스름돈 받은 것을 저금통에 넣었다.
저금통이 꽉 차는 날은 은행에 가는 날이었다.
그렇게 15년을 모았다.
상상을 초월할 만한 금액이 모였다.
그녀는 그중 일부를 떼어내 시아버지 치아를 해드렸다.
남편이 좋아했다.
"여러분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빅벤을 둘러보는 것으로 간단하게 일정을 시작하고 호텔로 들어갈 겁니다."
커다란 시계탑이 보였다.
그녀는 너무 행복해서 날아갈 것 같았다.
추억을 공유하는 것 만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여행은 먼 훗날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추억에 남을 여행을 준비해 보세요.
빠듯한 삶에서의 무리한 여행은 앙금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차근차근 준비해 보세요.
오랜 준비 끝에 떠난 여행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답습니다.
※ 이 글은 <부부로 산다는 것>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07.06.08. 20210605-17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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