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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실 (茶室)에 거는 글씨

by 탄천사랑 2007. 6. 3.

·「茶人 2006. 05/06」 



 

 

차실 (茶室)에 거는 글씨

매국노라 불리는 이완용의 글씨는 서예가들의 평 (評)에 의하면 명필에 속한다고 한다.
그런 만큼 당시에는 이완용의 글씨가 꽤 유명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글을 사려는 사람이 거의 없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자랑스럽게 걸어 둔 집이 많지 않다.
이것은 아무리 작품이 훌륭해도 그 작가의 인품에 문제가 있으면 
그 작품마저도 감상 대상에서 제외하는 동양인 특유의 구별법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만해 스님이나 안중근의 글씨가 크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들의 절개 때문이다.
석도 (石濤)나 팔대산인 (八大山人) 같은 분의 작품이 추앙받는 것은,
작품 자체도 매우 훌륭하지만 그들의 삶에 대한 좋은 평가 때문이었다. 
이런 분들의 글씨를 보면 
강직하고 고고 (孤高) 했던 그들의 삶이 묻어 나는 것 같이 숙연한 마음까지 생긴다.

차실에 글을 거는 이유는 글씨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글씨를 쓴 사람의 세계를 흠모하기 때문이다.


속된 것을 벗어나 무심의 경지가 느껴져야
일본의 차인들은 차실에 거는 글씨를 묵적 (墨跡)이라고 부르며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남방록 (南方錄)>에서는 차 도구 가운데 제일가는 도구가 족자이며,
그중에서도 묵적을 제일가는 도구로 정하고 있다.
또 족자에 맞추어 도코 노마 (床の間 とこのま)를 만들 정도라고 한다.

묵적의 기준은 조사 (祖師) 스님이나 도인 (道人)들의 글씨라야 하며,
속인의 솜씨로 쓴 것은 안 된다고 하였다.
글씨가 큰 스님의 묵적이 아니라도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의 말씀이면 소중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스님이 그린 인물화는 
그 그림이 지닌 깊은 의미를 맛보기 위해 걸어 두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와 같은 <남방록>의 요구는 너무 치우쳐진 감도 있는 듯해 보이지만,
그 본질은 깊고 높은 정신을 공유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일체 속된 작품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차실에 거는 글씨는 뛰어난 서예가의 작품도 좋겠지만,
무엇보다도 탈속 (脫俗) 한 맛이 있어야 한다.
서예의 법칙에 상관없이 일종의 고졸한 격조를 가진 글씨를 일품 (逸品)이라고 하는데.
이는 오랜 수행이나 타고난 성품에서 나온다.
스님들의 글씨가 차실에 잘 어울리는 것도 
잘 쓰려고 하지 않는 무심 (無心)의 경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무심의 상태가 되면 우주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쓰는 묘용 (妙用)이 있다고 한다.
차를 다루는 일 역시 일체를 운용하는 장인의 마음이 필요하고,
따라서 작은 차실의 창조주 (創造主)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
차인이 참선을 하고 고승들의 글씨를 걸어두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좋은 글씨가 귀한 오늘날 차실의 글씨는 저속하지만 않으면 된다.
불경 (佛經)의 구절이나 조사 (祖師) 스님의 어록 (語錄) 에서 따온 것이면 이상적이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안부를 묻는 편지나 시구를 찍은 것도 좋고 
명필의 탁본 (拓本)과 법첩 (法帖)의 영인 (影印)도 괜찮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글씨의 내용을 잘 파악하는 것이다.
그 글씨의 의미도 모르면서 차실에 걸어두는 것은 껍데기만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글씨만큼 잘하기 어렵고 개인의 개성을 잘 나타내 주는 예슬도 드물다.
송의 서예가인 황산곡 (黃山谷)은 자신의 글씨를 학습할 때의 험난했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30여 년 동안 초서 (草書)를 배웠는데 처음에는 주월 (周越)을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에 
  12년  동안 속된 기운을 떨어버리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뒤늦게야 소재옹 (蘇才翁)을 얻고 두보 (杜甫)의 글씨를 보고서 옛 사람의 글씨 뜻을 알았다.
  그 후 장욱 (張旭), 회소 (懷素), 고한 (高閑)의 글씨를 알고서야 필법의 오묘함을 엿보았다."
 
추사의 글씨도 20대에 이미 알려질 정도였지만 
진정한 그 자신만의 글씨체는 인간의 영고성쇠 (榮枯盛衰)를 겪고 실낱같은 목숨만이 남아 있던 
제주도 유배지에서야 완성되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인서구로 (人書俱老, 인생과 글씨는 함께 늙어 가는 것)라고 말했던가.


훌륭한 글씨를 제대로 감상하고 평할 수 있어야
남겨진 훌륭한 글씨 못지않게 뒷사람의 감상 능력과 보존도 중요하다.
미술품 애호로 유명한 건륭 황제는 전설 같은 왕 씨 (王氏) 집안의 작품,
즉 왕희지 (王羲之), 왕헌지 (王獻之), 왕순 (王珣)의 글씨를 수집한 뒤,
세 명의 희귀한 글씨를 얻었다는 의미로 
그의 서재 이름을 삼희당 (三希堂)이라고 하였을 만큼 귀중하게 생각하였다.
또 왕희지의 명작인 난정서 (蘭亭序)를 가진 사람이 강을 건너다가 배가 전복되어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자신의 생명보다 난정서가 무사한 것을 더 기뻐하였다는 
이야기는 옛 사람의 예술에 대한 태도가 단순한 취미 생활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 준다.

중국의 서화에는 비록 명적 (名蹟)이나 명인 (名人)의 것이 아니더라도 
작품의 앞뒤로 많은 뒷사람의 제발 (題跋)이 붙어 있다.
제발 하나하나에 그 작품에 대한 감정이나 평론, 
또는 찬사가 가해져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문학적 가치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아가 제발의 글씨 또한 당대 (當代)의 대가들의 것이 많아 
명작 (名作) 위에 또 다른 작품이 추가되어 
결국은 연대 (年代)와 인물 (人物)이 함께 이룬 대작 (大作)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작품이라면 
비록 작은 편지글이라 하더라도 후에 사람들은 금쪽보다 더 귀하게 여길 것이다.

우리나라에 남겨진 작품 가운데는 다양한 제발이 남겨진 경우가 드문데 
그림으로는 안견 (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挑源圖)>이나  
추사의 <세한도 歲寒圖)>등이 있지만 글씨에 대한 제발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몽유도원도>는 조선의 왕자이며 수장가로 유명한 
안평대군 (安平大君)의 소장품이어서 발문 (跋文)이 신하들의 칭송 일색이며,
<세한도>의 발문들은 이상적 (李尙迪)이 중국 사람에게 받은 것이어서 
조선 감식가 (鑑識家)에 의한 화평 (畵評)은 아니다.
여러 제발과 인장이 있는 불이 선란도 (不二禪蘭圖)는 제발을 써줄 만한 안목이 귀했던 당시에 
추사가 여러 번에 걸쳐 스스로 제발을 쓰고 자신의 도장을 이곳저곳에 찍음으로써 
이러한 효과를 내려 했던 것을 보면 그의 답답한 심경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예술을 감상하는 태도가 중국과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화에 대해 자신 있었던 감상가가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날 차인이라는 말 속에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하를 잘 알고 생활 속에서 이것을 구현한다는 보다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도가 그러하듯 서예는 동양의 몇 나라만이 가진 고유한 예술 세계이다.
글씨를 차의 맛을 보듯 감상할 줄 아는 차인이 늘어간다면 얼마나 그 품 (品)을 더하게 될까.

  
글 - ,스님 (파계사)
출처 - 茶人 2006. 05/06 
(사)한국차인연합회 -  http://teaunion.or.kr/

 [t-07.06.03.  20210609-053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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