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국회도서관 2023. 12월호 VOL.516」
내 삶에 들어온 책
전쟁은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지난 10월 파주에서 열린 DMZ평화문학축전에서 벨라루스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만났다. 그의 책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아연 소년들』, 『체르노빌의 목소리』 등을 인상적으로 읽어왔던 터라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무척 컸다. 과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7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에 대한 뜨거운 문제의식과 진지한 통찰력을 지닌 작가였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기조 강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병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쟁에 관한 책을 이미 다섯 권이나 썼던 작가는 말년에는 ‘사랑’과 ‘노화’에 대한 책을 쓰려고 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다시 전쟁에 대해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목도한 현실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또다시 글을 통한 힘겨운 참전을 하게 된 것이다. 작가란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보다 쓸 수밖에 없는 이야기에 복무하는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알렉시예비치는 러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스탈린 신화의 부활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배경을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설명해 주었다. 러시아인들의 70% 이상이 스탈린을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나 푸틴이 선전 선동을 통해 자신을 스탈린과 동일시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러시아가 새로운 소련을 건설하려는 패권주의에 사로잡혀 있음을 잘 보여준다. 러시아뿐 아니라 최근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전쟁도 그렇듯이, 작은 나라들에 대한 강대국의 무자비한 침탈은 파시스트적 기류가 세계 전체로 확산하고 있다는 증표로 볼 수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 대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해왔고, 그로 인해 고초를 겪어야 했다. 망명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의 혁명과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했지만, 결국 푸틴이 조종하는 루카센코가 대통령이 되면서 다시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알렉시예비치는 현재 독일로 망명한 상태이며, 그곳에서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벨라루스의 인구 천만 명 중 10%인 백만 명이 벨라루스를 떠났다고 한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원고는 1983년 완성되었지만, 2년 동안 출간되지 못한 채 출판사에 남아 있어야 했다. 소비에트의 신화를 빛나게 해줄 영웅적 서사로 전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전쟁에 참여해야 했던 여성들의 삶과 고통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차고 넘치지만, 그것은 모두 ‘남자들의 목소리’를 통해서였다. 작가는 이름도 없이 사라져 버린 ‘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전쟁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제2차 세계대전에 백만 명 이상의 소련 여성들이 참전했다고 한다. 그중에서 알렉시예비치는 삶의 영역과 계층이 서로 다른 이백여 명의 여성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문을 두드리고, 이야기를 청하고, 그들에게서 숨겨진 삶의 진실을 발굴해 냈다
"소비에트의 신화를 빛나게 해줄 영웅적 서사로 전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전쟁에 참여해야 했던 여성들의 삶과 고통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차고 넘치지만, 그것은 모두 ‘남자들의 목소리’를 통해서였다."
텍스트. 텍스트. 사방이 텍스트다. 도시의 아파트들에서, 시골의 농가들에서, 거리에서, 기차 안에서…… 나는 듣는다…… 나는 점점 커다란 귀가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담으려는 커다란 귀. 나는 목소리를 ‘읽는다’.
(중략)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곳. 그곳에선 역사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사람을 다스린다, 내 글의 폭을 넓혀야겠다. 전쟁에 대한 진실만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진실을 담은 책을 써야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던진 물음. ‘사람은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신을 몇 명이나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 다른 자신을 어떻게 지켜낼까?’ 이 물음을 이제 나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23쪽
하지만 40년이 지난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타인에게 솔직히 드러내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취재와 만남을 거듭할수록 작가는 자신의 책이 전쟁에 관한 단순한 다큐멘터리적 보고서가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층적인 탐구가 되길 원했다. 참을성 있게 듣고, 섬세하게 길어 올려진 목소리들은 ‘목소리 소설’이라는 장르로 새롭게 태어났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처럼 특유의 다성악적 세계를 이루는 알렉시예비치의 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는 전쟁 영웅들의 무용담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비인간적인 일을 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같은 전쟁을 겪고도 각자 서로 다른 전쟁의 이미지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도 서로 다른 진실이 부딪치고 있었다. 작가는 세계대전 때 소녀 병사였던 니나 야코블레브나와 만나 증언을 듣고 녹취한 내용을 글로 정리해 보내주었다. 그런데 돌아온 우편물에는 거의 모든 내용에 줄이 죽죽 그어져 있었고, 소녀 병사들의 활약을 알리는 신문 기사들과 공식 보고서들이 들어 있었다. “우리 아들한테 나는 영웅이야. 거의 신과 같다고! 만약 우리 아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라는 메모도 적혀 있었다. 이렇게 전쟁이 참혹한 일에서 위대한 일로 둔갑하면서 인간 내면의 불가해하고 고통스러운 진실은 누락되고 만다. “평범하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 불신에, 보통의 삶을 소위 이상이라는 것과 슬쩍 바꿔치기하려는 이 욕망”에, “평범한 온기를 차디찬 광채와 맞바꾸려는 욕망”에 작가는 매번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충격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으로 부서진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진실을 그려내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쏘지 않았어…>라는 장에서는 전쟁이라는 무대 뒤에 가려진 존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종군기자, 위생부대원, 취사병, 세탁병, 통신병, 이발병, 제빵병, 기록병, 건설기술병, 물품보급병, 기계선반공 등 전쟁터에서도 일상을 꾸려가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메달을 받았어…>라는 장에는 인간뿐 아니라 전쟁으로 고통받는 땅과 새와 나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폭격이 쏟아지는데 갑자기 염소 한 마리가 우리 쪽으로 뛰어든 거야. 녀석도 우리와 같이 바닥에 엎드렸지. 우리 옆에 엎드려서는 꽥꽥 비명을 질렀어. 폭격이 멈추자 녀석이 우리를 따라오며 우리한테 자꾸 달라붙는 거야. 저도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 무서웠던 게지. 마을에 도착하자 우리는 마을 여인에게 염소를 부탁했어. ‘데려가세요. 불쌍해서요.’ 염소를 구해주고 싶었지……”
(중략)
“그걸 어떻게 얘기하나…… 글쎄, 어떻게…… 왜, 있잖아…… 늦가을이면 철새들이 이동하는 거…… 길게 길게 무리 지어서. 우리 대포, 독일군 대포가 한꺼번에 불을 뿜는데 새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날아가는 거야. 새들이 어떻게 비명을 지르겠어? 어떻게 새들에게 ‘이리로 오면 안 돼! 여기 오면 죽어!라고 알려줘? 어떻게? 끝내 새들은 계속 땅으로 떨어졌어……”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249쪽
전쟁이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참호 속으로 뛰어드는 염소와 날아가다가 폭격에 떨어져 내리는 새들을 보며 진심 어린 걱정과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공습으로 기차에 불이 붙었는데 부상자들이 불길에 휩싸인 말들을 구하러 달려가는 마음, 전쟁이 끝나고 마을에 꾀꼬리 소리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누군가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한 때가 아니면 들꽃을 꺾지 않는 마음…… 알렉시예비치는 그런 마음과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인다.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사람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운데 동물이나 식물에까지 누가 신경을 쓸까 싶지만, 오히려 전쟁 중에도 생명에 대한 이러한 시선과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보여준다.
이 책에는 소제목들에도 본문에도 말줄임표가 유난히 많다.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어떤 감정과 생각이 말줄임표마다 깃들어 있다. 그 다층적 의미들은 결국 한 가지 생각으로 모여든다. 사람이, 생명이, 전쟁보다 더 귀하다는 것. 이 단순한 진리를 망각하고 전쟁을 벌이는 세상을 향해 알렉시예비치는 한 생애를 바쳐 호소해 왔다. 작가는 마지막 장 <갑자기 미치도록 살고 싶어졌어…>에서 위생사관이었던 타마라 스테파노브나 움냐기나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심장 하나는 증오를 위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위해 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사람은 심장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늘 어떻게 하면 내 심장을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 전쟁이 끝나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하늘을 보기가 두려웠어. 하늘을 향해 고개도 들지 못했지. 갈아엎어 놓은 들판을 보는 것도 무서웠어. 그 땅 위로 벌써 떼까마귀들이 유유히 돌아다녔지. 새들은 전쟁을 빨리도 잊더라고……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554쪽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2015
글 - 나희덕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시인)
출처 - 월간 국회도서관, 내 삶에 들어온 책.
[t-23.12.10. 20211204-15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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