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도서관 2023. 7+8 I Vol.512」
인터뷰 INTERVIEW
제헌절 특집
헌법 가치의 실현,알아야 이루어진다
헌법은 한 국가의 근본 법규이자 최상위 법이다. 『지금 다시, 헌법』 서문의 내용을 빌리면 “모든 법의 정점에 깃발처럼 세워놓은 법”인 것이다. 이러한 삶의 기본, 기틀이 되는 헌법이 어색하고 낯설기만 한 우리들에게 『지금 다시, 헌법』은 헌법과 가까워질 가능성을 열어주는 책이다.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헌법과 비로소 눈 맞출 수 있게 해준다. 차병직, 윤재왕, 윤지영 셋이 함께 썼고 인터뷰는 차병직 변호사가 함께했다
『지금 다시, 헌법』은 세 번째 판입니다. 2009년 처음 세상에 나오고, 2017년에 국가의 중요한 이슈를 추가해 내셨죠. 지난해 한 번 더 책에 새 옷을 입혀 출간하셨는데, 어떤 것들이 달라졌을까요?
새 단장을 할 때마다 그사이 나온 헌법재판소 판례를 소개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빠뜨릴 수 없었던 것은 간혹 독자들이 제기한 지적과 질문을 통해 확인한 불확실한 문구나 불성실한 설명을 손질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세 번째 판이 나오는 동안 제목이 한 번 바뀌고, 출판사는 두 번 바뀌었는데 읽는 사람들의 마음도 바뀌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그 마음은 모두 우리 정치 현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일 텐데, 결국 여의도에 거는 기대가 아닐까요. 헌법적 가치가 무엇인지 합의만 되면, 여야와 정파를 불문하고 서로 협력하는 모습에 대한 기대일 것입니다.
『지금 다시, 헌법』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읽기 쉬운 헌법 해설서를 표방합니다.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삶에서 헌법은 어떤 존재인가요?
현재 지구 위의 국가 중 극히 예외적으로 특별한 사정에 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헌법이 없는 국가는 없습니다. 헌법이 국가의 조건이 돼버린 셈이지요. 국가의 목적은 구성원인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고, 그 보장은 권력의 행사로 실현됩니다. 그러한 내용을 담은 것이 헌법입니다. 권력의 형태와 행사 방식은 반드시 헌법에 규정해야 하지만, 국민의 기본권은 헌법에 없어도 당연히 인정되는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 바로 헌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헌법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헌법이란 교육과정에서 그것도 단편적인 부분만 배운 것이 전부입니다.
개개인이 살아가면서 불만을 느낀다면, 국가 권력기관이 뭔가 잘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생깁니다. 헌법을 읽어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거기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헌법을 꼭 읽어야 자기의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헌법을 읽지 않을 자유도 헌법이 보장하고 있으니까요.
『지금 다시, 헌법』을 읽으면 조문과 판례의 단순한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닌, 고민할 지점들을 짚어주고, 해당 사건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까지 담아낸 덕에 헌법과의 거리감을 많이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다행입니다. 독서에서 권장하고 싶은 방식 중 그 분야에 관한 책 두세 권 이상을 거푸 읽는 것이 있습니다. 저자마다 관점이나 기술 방향이 다르므로 비교해 가며 판단하는 것이 균형 잡힌 정보와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헌법에 관해서는 『지금 다시, 헌법』보다 좋은 책이 얼마든지 많으니까 최소한 두 권 이상을 본다면 분명 효과적일 것입니다.
『지금 다시, 헌법』을 읽고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독자들이 읽을 만한 책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헌법에 한정한다면, 쓸데없이 두꺼워 읽기에는 불편하겠습니다만, 저의 또 하나의 졸저 『헌법의 탄생』이 있습니다. 『지금 다시, 헌법』과 관련해 다닌 강연에서 다룬 이야기를 확장한 내용입니다. 책에는 헌법은 결국 우연과 필연이 얽힌 인간의 정치적 역사의 결과물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헌법』에도 독일, 미국, 일본 등 다양한 나라의 헌법들이 인용됐고, 『헌법의 탄생』을 쓰시며 세계 여러 나라의 헌법을 두루 살펴보셨는데요. 최고의 헌법은 어떤 것인가요?
최고의 헌법이 존재한다면 어느 국가가 가지려 하지 않겠습니까. 헌법에 아무리 멋지고 좋은 규정을 둔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정치 상황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최고의 헌법보다 최고의 헌법 실현입니다. 헌법의 실현 또는 운용이란 현실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고, 정치는 정치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시민의 관심과 행동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최고의 헌법이란 문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닌, 실현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1987년 개헌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는데 개헌하지 않고 이대로도 과연 괜찮은 걸까요?
헌법이 오래되어 시대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지적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것은 개헌론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헌법을 고치지 않고도 새 시대에 맞는 헌법 실현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현행 헌법은 심지어 맞춤법까지 틀린 부분도 더러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 때문에 국가 운영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는 전혀 다른 정치 형태가 되겠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헌법의 목적은 동일합니다. 헌법이 다르다고 정치가 달라진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양상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개헌이 절실하면 언제든 할 수 있겠지만, 당장은 혼란이 더 클 수 있으니 하지 못하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1987년 이후 어느덧 30년이 훌쩍 넘었는데요. 우리 헌법이 현시대의 정의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헌법도 그 국가의 시대적 정의를 포함하지 않은 것은 없겠지요. 정의나 가치는 헌법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지 헌법에 문자로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현실 정치에서 가장 잘하고 있는 부분은 누구도 헌법을 무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잘못하고 있는 점이라면, 당리당략 때문에 정당 정치인들이 헌법적 가치를 잠시 잊고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태입니다.
변호사님의 또 다른 저서 『단어의 발견』에서 ‘헌법은 꼭 필요할 때 방향을 잡아주는 근대 국가의 발명품이다’라고 말씀하셨죠. 이 발명품이 제일 잘 쓰였던 사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경우라면 대통령 탄핵 결정 직후 큰 혼란 없이 정치적 일정이 진행되었던 상황이 헌법의 질서가 제대로 작동되었던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정상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정권 교체가 아니기 때문에 결과만 놓고 보면 혁명이나 다름없어 엄청난 혼란이 예상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탄핵 절차 자체 역시 헌법 질서 중의 하나이기에 합헌적 혁명으로 받아들여져 이렇게 질서가 잘 유지된 것입니다
헌법을 잘 사용한 다른 나라의 예도 궁금해지네요.
외국의 예는 많습니다만 한가지 말씀드리면, 1989년 10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독일의 통일이 현실로 다가섰습니다. 서독은 그때까지 헌법(Verfassung)이란 표현 대신 기본법(Grundgesetz)이라는 이름의 법을 헌법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헌법은 통일 독일의 꿈과 과제로 남겨 두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통일을 눈앞에 두고는 새 독일 헌법에 의한 통일을 포기하고, 기존의 서독 기본법에 따라 동독의 5개 주가 조약 체결을 통해 서독에 편입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통일 이후에도 서독 기본법의 궁극의 목표였던 통일 독일의 새 헌법을 제정해야 하는데, 논란 끝에 포기했습니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예상되는 여러 정치적 혼란을 피하는 편이 질서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은 현재까지 헌법을 위해 국민투표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헌법의 당연해 보이는 조항을 따르지 않고 다른 길을 택하는 방식으로 헌법 질서를 유지한 예입니다. 독일에는 여전히 ‘기본법’만 있고, ‘헌법’은 없지요. 독일 헌법 정신이 택한 결론입니다.
독일처럼 나라마다 각자의 헌법 정신이 존재한다면 과연 헌법 정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헌법 정신은 우리가 헌법을 제정할 당시 합의한 총체적 가치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딴소리하지 못하도록 의도한 장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헌법 정신이란 것이 마치 헌법을 운용하는 당대의 우리 자신 외에 따로 존재하는 것인 양 정치적 책임을 전가하는 현상이 나타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면 헌법을 실현시켜 나아가면서, 그 정신을 보존하는 한편 계속 가꾸어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적 쟁점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헌법 정신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헌법은 나의 것 또는 우리 편의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방의 것 또는 정치적 적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헌법이나 헌법 정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만의 헌법이나 헌법 정신은 존재하지 않기에 다가올 미래를 위해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미래 사회에 적합한 헌법을 미리 준비해둘 순 없는 걸까요?
현실보다 규범이 먼저 만들어질 순 없습니다. 법의 사후적 성격 때문에도 미리 법을 만들기는 극히 어렵습니다. 미래 사회는 분명 지금과 매우 다를 테지만 미리 헌법을 거기에 맞춰 첨단 헌법인 것처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생각지도 못한 미래가 닥치면 거기에 탄력적이고 유연하게 적응하여 우리의 가치를 실현할 자세를 갖추는 것이 미래를 위한 헌법 정신일 수는 있겠지요. 자기주장을 펼치다가도 상대의 입장과 사정을 이해하며 합의점에 이를 수 있는 태도가 그 예의 하나일 수는 있겠네요.
『단어의 발견』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하나 더 말씀드리면,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경험의 확장이다’라는 문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헌법을 안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모든 사람이 헌법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알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구체적 조문의 내용과 의미는 법률가들만 알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헌법에 관심을 가진다면 헌법에 반하는 사태를 적발하여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헌법 가치의 실현에 기여하게 됩니다. 여유가 있을 때 ‘지금 나의 이 상황 또는 내 주변의 이 사태는 헌법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식으로 의문을 가져 보는 습관을 기른다면 헌법을 보다 잘 알게 되지 않을까요?
여러 권의 책을 내셨고, 번역도 하셨습니다. 본업 외에도 읽고 쓰는 삶을 살고 계신데, 국회도서관을 찾는 독자들에게 2023년 여름, 지금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을 추천해 주신다면 어떤 책일까요?
민주주의와 정치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김비환의 『이것이 민주주의다』를 권합니다. 쉽게 읽히고, 재미있게 이해하면서,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최근 10년 이내에 본 책 중에 한 권을 꼽으라면 장하석의 『온도계의 철학』입니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책에서는 직접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세상의 진짜와 가짜는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며 또 어떻게 바뀌는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AI)과 인간성의 본질에 관한 최근의 변화를 포괄적으로 접하려면 마르셀루 글레이제르(Marcelo Gleiser)의 『위대한 지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골라도 좋겠습니다.
여러 권의 책 추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다시, 헌법』이 독자들에게 어떤 책으로 읽히길 바라시나요?
『지금 다시, 헌법』은 헌법을 쉽게 소개한 책일 뿐입니다. 다른 좋은 헌법책으로 이어지는 이정표 정도로 여겨 주시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차병직변호사
변호사이며 글을 쓰고 번역도 한다. <법률신문> 공동편집인이다. 시민 모두가 꼭 헌법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지금 다시, 헌법』이 헌법이 필요한 현실과 마주한 시민들이 참고할 교과서가 되기를 바란다
인터뷰 - 차병직 변호사
글 - 이재영
출처 - 국회도서관 2023. 7+8 I Vol.512
[t-23.08.16. 230816-1706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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