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 류시화 -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나 자신이 시인이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시를 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선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에서 몇 줄 쓴 적이 있지만
어머니는 내 글 어디에도 등장한 적이 없습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무리 해도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맨 먼저 눈물이 글썽거려지기 때문이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한 편의 글이 어니라 한 권의 책을 써도 모자라기 때문이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모든 기쁨과 슬픔과 지나온 삶의 기억들을 다 이야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편지 한 장 제대로 쓴 적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문학 공부를 하고 빼어난 문체를 자랑한다 해도
어머니 앞에서는 그런 문장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나는 다만 언제나 어머니의 까칠한 손을 잡고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잠들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아마 죽어서도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어 질 것이고,
저 사후의 여행까지도 어머니가 맨 먼저 나를 맞이하러 오리라고 믿습니다.
결혼을 해서도 나는 아내를 어머니와 비교하여
왜 어머니의 백 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하는가 하고 화를 낸 적이 많습니다.
내 삶의 모든 기준과 척도는 나의 어머니입니다.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는 어머니한테서 보고 배웠습니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리 살아도 어머니처럼 살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만큼 강하지 못하고,
그만큼 희생하지 못하며, 그만큼 무조건적이지 못합니다.
내가 아무리 명성을 얻고 잘난 척하며 살아도 어머니에 비하면 나는 못난 아들입니다.
내가 열세 살 때 혼자 서울로 유학을 온 다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사는 그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고,
방학 때마다 나는 맨 먼저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달려가
마을 어귀에서부터 "어머니!" 하고 외치며 달려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 다시 헤어질 때면 어머니는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와
떠나는 아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차창 밖에 서 있었습니다.
나 또한 떠나면서 눈물을 보이면 어머니가 두고두고 마음 아파하실까 봐 눈물을 꾹 참아야만 했습니다.
눈물을 참느라고 묘하게 일그러져 있던 어머니의 그 얼굴,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얼굴만큼 아름답고 성스러운 얼굴을 알지 못합니다.
버스가 마을을 떠나 멀리멀리 가버린 뒤에야 어머니는 아마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고,
나 역시 그 버스에서 내려서야 담벼락에 얼굴을 묻고 한참이고 그렇게 울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전생에서도 나의 어머니였고,
그 전전의 생에서도 나의 어머니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이 생에서만 어머니에게 빚진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봄꽃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나고,
날이 조금 더워도 어머니가 생각나고, 찬바람이 불어도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어머니가 생각나고,
가끔 길거리에서 파는 생과자만 봐도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생을 사느라 모든 일을 다 겪으시고 이제는 너무나 몸이 가벼워져서 눈 내린 길을 걸어도
발자국조차 패이지 않는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심한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나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매일 병원을 지켜 드리고 밥을 떠먹혀 드려도 모자랄 텐데 나는 인도를 간다.
티베트를 간다 하면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무슨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의 아버지,
당신은 참으로 행운아였습니다.
어머니를 만나 한평생을 살았으니까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걸 모르는 듯했습니다.
당신이 결혼하자마자 일본으로 도망쳤을 때도 어머니는 혼자 시집살이를 건뎌냈고,
당신이 어머니를 초청해 일본으로 오라 해놓고는
어느 조선인이 하는 밥집에 어머니를 떼어놓고 다시 도망갔을 때도
어머니는 그 밥집에서 밥을 해주며 끝까지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폐병에 걸려 조국에 가서 죽는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도
어머니는 직접 흙벽돌을 찍어 집을 지었고,
겨울에는 발 동동 굴려 가며 보따리 장사를 해 당신과 우리 자식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술을 마셨고,
낚시만 다녔고,
지게 한 번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묵묵히 땅을 일궜고, 겨울이면 손이 얼어터졌으며,
야산에 있는 밭을 매다가 뱀에 물리기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못난 당신과 우리 자식들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손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삶이 다 환영에 불과하니 모든 인연을 끊으라고 불가에선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외칩니다.
'뭐라고!
어머니와의 인연을 끊으라고!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모든 걸 다 끊어 버릴 수 있어도 내가 어떻게 어머니와의 인연을 끊을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어머니의 일도 꿈에 불과한 것이라 해도,
내게는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꿈입니다.
인도를 여행하는 장거리 기차 안에서도 어머니의 꿈을 꾸고는 슬피 울다가 벌떡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차창 밖에서는 아열대의 자욱한 아침 안개가 바람에 밀려다니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여행도 많이 하고 명상도 많이 해서
인간의 슬픔과 기쁨 같은 감정을 많이 초월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처음의 계획은 저 자신도 어머니에 대한 한 편의 글을 써서 이 책에 싣고자 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나는 그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엮은이의 말로 대신합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너무 슬프고,
어린아이처럼 기쁘고,
마음 가득 환희가 차오르다가도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같은 것이 밀려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보다시피 나는 이렇게 감상적으로 밖에는 어머니에 대해 쓸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 책에 글을 쓴 모든 필자분들이 그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은 인쇄된 종이에 박힌 활자를 읽지만,
우리 엮은이들은 그분들의 거의 모든 원고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의 눈물로 얼룩져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우리 엮은이들은
어머니에 대한 이 책을 사랑, 배움, 희생 등의 주제별로 나누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생각을 접어 버렸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글은 그것이 어떤 내용이라 해도 단 한 가지 '사랑'이라는
주제로밖에는 묶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추기경님과 법정 스님에서부터 일반 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명 유명 인사들이 한결같이 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지친 영혼에 대한 유일한 안식처는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는 우리의 둥지이자 우리에게 날개를 달아 준 인생의 스승입니다.
그 날개를 달고 세상을 돌아다니지만 우리에게 그 둥지가 없다면 우리는 방황하는 영혼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겨울이 깊어 마음마저 움추려들어 있을 때,
정채봉 님과 저는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근처에서 이 책을 기획했습니다.
이제 봄 속에 여름이 느껴지고 있을 무렵,
만물 속에 깃들어 피어나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 책을 펴냅니다.
-류 시화.
※ 이 글은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정채봉. 류시화 -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샘터(샘터사) - 1998. 05. 01.
[t-07.04.28. 210403-163903]
'작가책방(소설 > 류시화. 정채봉' 카테고리의 다른 글
然 後(뒤에야) (0) | 2007.06.10 |
---|---|
무엇이 성공인가 (0) | 2007.06.03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가. (0) | 2007.04.13 |
지구별 여행자 - 영혼을 위한 음식 (0) | 2007.04.13 |
작은 이야기 2 - 먼저 살던 여자의 편지 (0) | 2007.04.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