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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류시화. 정채봉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가.

by 탄천사랑 2007. 4. 13.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가.
"오, 이제야 왔군!  20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드디어 나타났어!"

누가 소리치며 반가워하길래 뒤돌아보니 코브라 지팡이를 든 늙은 구루가 아는 체를 했다. 
그는 헤어진 연인이라도 만난 양 반갑게 어깨를 껴안으며 말을 걸었다.

"난 언제나 그대를 불렀지.  바로 곁에서 말이야. 
  그런데 그대가 듣지 못했어. 
  내가 부르는 소리를 환청이라고 여겼어."

내가 그런 적이 있었나?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환청으로 어떤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늙은 구루가 괜한 소릴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난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 건 아닌가요?  전 그냥 길 가는 여행자일 뿐인걸요."

구루는 실망한 표정으로 나무라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누구나 길 가는 여행자라고 할 수 있지. 
  그대로 그렇고, 나도 그렇고 말이야. 
  그러나 여행에는 반드시 목적지가 있기 마련이야. 
  그대는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고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나?"

그가 거침없이 퍼붓는 질문에 나는 말이 막혔다. 
사실 그는 내가 어떤 대답을 해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그런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 그 구루는 수도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코브라 지팡이 말고도 매우 특징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때가 잔뜩 낀 주황색 승복 위에 손가락 두께의 밧줄을 온몸에 치렁치렁 휘감고 있었다. 
왜 그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하는 행동이나 말을 보아하니 정신이 이상한 미치광이 구루임에 틀림없었다.

구루가 그 이상한 밧줄로 나를 얽매이기 전에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오늘 중으로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부쳐야 할 게 있었다. 
그런데 그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

"지금 우체국에 가는 길이지? 
  다 알고 있어.  난 여기서 기다릴테니까 이따가 보자고."

나는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내가 우체국에 간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소포뭉치는 가방 속에 들어 있었고 겉으로 봐서 내가 우체국에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는 어서 다녀오라고 손짓을 했다. 
정말 괴이하기 짝이 없는 구루였다.

우체국에 다녀온 뒤 나는 곧장 숙소인 비시누 여인숙으로 향했다. 
비시누 여인숙은 갠지스 강둑에 위치한, 북인도의 유서 깊은 도시 바라나시에게 가장 전망 좋고 싼 게스트하우스이다. 
나는 양동이에 물을 받아 샤워를 하고 나서 베란다고 나가 강 풍경을 구경했다.

물 위엔 이미 낙조가 번지고 있었다. 
한쪽에선 형형색색의 인도인들이 작은 거룻배에 올라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마치 피안으로 향하는 인생의 항해처럼 느껴졌다. 
그 뒤쪽 멀리에서 화장터의 연기가 하늘거리며 피어올랐다. 
그때 누군가 강둑 아래서 나를 소리쳐 불렀다.

"여, 나 여기 있네. 
  난 언제나 그대와 함께 있지.  이리 내려와 함께 산책이나 하자고."

밧줄을 몸에 두른 그 미치광이 구루였다. 
높은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그는 마치 마법사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같았다. 
검은 머리는 치렁치렁하고 지팡이는 어깨까지 올 정도로 컸다. 
마치 나를 향해 '어서 내려오게! 안 그러면 내가 그대가 묵고 있는 비시누 여인숙을 백 미터 높이로 커지게 해서 
마법의 성으로 만들어버릴 테야' 하고 소리치는 듯했다.

나는 약간 성가신 기분이 들었다. 
내 생각에 그 구루는 지금 나를 유혹해 자신의 제자로 만들려는 게 분명했다. 
20 년 동안 기다렸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은 인도의 탁발승들이 외국 여행자에게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 
한 번은 히말라야 근처의 산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다. 
한 요가 수행자가 나를 보자 대뜸 20 년 동안 기다렸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나는 완전히 그에게 속아 일주일을 붙잡혀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꼼짝없이 그의 시중을 들어야만 했다. 
그는 내가 달아날까 봐 감시도 게을리하지 않아 그에게서 벗어나느라 애를 먹었다.

미치광이 구루가 더 귀찮게 굴기 전에 나는 얼른 도망칠 채비를 했다. 
그가 밧줄을 몸에 두르고 여인숙 안으로 쳐들어와 
나를 소리쳐 불러대면 함께 있는 다른 외국 여행자들 보기에도 창피한 노릇이었다.

나는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반대편 출입구를 통해 여인숙을 빠져나왔다. 
그때 등 뒤에서 구루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어. 
  언제까지나 그대를 기다릴 거야. 그대가 날 만날 준비가 될 때까지 말이야."

어느새 나는 굉장히 끈질긴 구루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그가 왜 하필이면 나를 점찍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나와 비슷하게 생긴 어떤 일본인과 나를 혼동한 것은 아닐까? 
자칫하다간 그 구루 때문에 여행을 망칠 수도 있었다.

나는 약간 배가 고팠지만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바라나시 뮤직 아카데미로 시타르 연주를 들으러 갔다. 
낮에 어떤 꼬마에게서 음악회 안내장을 받았던 것이다.

이름만 거창했지 
바라나시 뮤직 아카데미란 곳은 막상 가서 보니 수세기 동안 햇빛 한 번 들지 않은 어두컴컴한 뒷골목에 있었다. 
그리고 아카데미이기는커녕 2층 다락방을 개조해 만든 형편없는 곳이었다. 
관객은 모두 합해 이스라엘에서 온 부부와 내가 전부였다. 
그래도 무명의 시타르 연주자는 세 명의 관객을 앞에 놓고 줄이 끊어져라고 최선을 다했다.

두 시간 뒤,  나는 뭘 좀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뮤직 아카데미를 나섰다. 
어느덧 밤이 깊어 있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은 집 안에서 이따금씩 흘러나오는 흐린 불빛을 제외하고는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바라나시 뒷골목은 전세계에서 미로로 유명한 곳이다. 
골목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폭이 좁고,  길가에 난 문들은 난쟁이가 드나드는 문처럼 성냥 갑만하다. 
골목들은 엉킨 실타래처럼 이리저리 엇갈려 있어서 한 달을 그곳에 살아도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나는 아까 들어왔던 길을 찾아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세 개 모퉁이만 돌면 상점들이 늘어선 대로였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가도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질 뿐 큰길이 나타나지 않았다. 
함께 걷던 뚱뚱한 이스라엘 부부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순간 겁이 났다.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 어떤 인도인 남자가 골목 저쪽에서 다가왔다. 
그는 칼처럼 생긴 물건을 손에 들고 있었다. 
가까이 오는데 보니 그것은 정말로 번쩍이는 칼이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런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칼을 들고 다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실수로라도 칼에 찔리지 않기 위해 그가 옆을 지나가는 순간 거미처럼 바싹 벽에 달라붙었다.

다행히 그 남자는 아무런 공격 의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내 곁을 지나가면서 그는 나더라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당신은 길을 잃은 거야. 
  길을 잃은 거라구. 어디가 출구인지 모르는 거야."

나는 당황해서 황급히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비스듬히 경사가 진 다음 번 골목은 맨 끝에 계단이 있고 계단 끄트머리 집에서 노란 불빛이 흘러나왔다. 
그 남자 말대로 나는 정말로 길을 잃은 게 틀림없었다. 
어디가 출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또 누군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그는 긴 몽둥이 같은 걸 손에 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정말로 몽둥이였다. 
나는 아까보다 더 겁이 나고 긴장되었다. 
그렇다고 뒤돌아서서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주춤주춤 다가가면서 보니 그는 몸에 온통 밧줄을 휘감고 있었다. 
그 미치광이 구루였다. 
그리고 그가 손에 들어 있는 건 몽둥이가 아니라 커다란 코브라 지팡이였다.

그 순간 왜 그토록 안심이 됐는지 모른다. 
나는 마치 헤어진 연인이라고 만난 것처럼 그가 반가웠다. 
하지만 그는 나를 무시한 채 말없이 지나갔다. 
나는 황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저, 지금 길을 잃었거든요. 
  아까부터 출구를 찾아 헤맸어요."   그러자 그가 엄숙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헤매 다닌 게 아냐. 
  그대는 20 년 동안 길을 잃고 헤맸지. 
  내가 그렇게 불렀는데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언제까지 그렇게 헤매고 다닐 건가?"

미로처럼 뒤엉킨 뒷골목에서 길을 잃은 덕분에 
나는 20 년 동안 인생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맸다는 누명을 쓰고 말았다. 
어쨌거나 그에게 대들 처지가 아니었다. 
잠자코 구루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구루는 어두운 골목길을 거침없이 걸어가 오른쪽으로 꺾어졌다. 
그러자 마술을 부린 것처럼 순식간에 상점들의 거리가 나타났다. 
출구는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루가 말했다.

"음악을 듣느라 밥도 못 먹었겠지. 
  시장할 테니 저리로 가서 요기나 하자고."

귀신같이 도 그는 내가 시타르 연주를 들으러 갔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기가 죽어 그를 따라갔다. 
구루는 식당이 아니라 상점들 끝머리의 강가로 걸어갔다. 
돌계단에 앉은 그는 내게 차파티나 먹자고 말했다. 
나는 그가 나더러 차파티를 사 오라는 말인 것으로 알아들었다. 
그런데 그가 손바닥을 펼치자 순식간에 넓적한 밀가루떡 차파티 다섯 장이 나타났다. 
내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는 걸 알고 그가 말했다.

"왜 그렇게 놀라지? 
  인도엘 그렇게 다녔으면서 차파티를 처음 보나?  어서 이리 와 앉아."

그러면서 그는 또 20 년 타령을 했다.

"난 20 년 동안이나 그대를 기다렸어. 
  줄곧 그대를 불렀지.  바로 곁에서 말이야.  그런데 그대가 듣지 않았어."

나는 구루를 시험해볼 겸 일부러 투덜거렸다.

"차파티를 맨 걸로 어떻게 먹습니까? 
  딸기잼이라도 있어야죠."   그가 말했다.

"잼 여기에 있지."

그가 손바닥을 펴자 역시 잼이 나타났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가 잼 얘기를 꺼낼 것을 알고 소매 속에 미리 감춰둔 게 아닐까. 
의심은 끝이 없었다.  어쨌거나 난 배가 고팠다. 
차파티 한 조각을 찢어 잼을 발라 입에 넣으면서 내가 물었다.

"그런데 왜 절 기다리셨다는 거죠? 
  20 년 동안 기다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구루가 말했다.

"그대에게 중요한 걸 일깨워주기 위해서지. 
  난 이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 며칠 후면 히말라야의 동굴로 돌아가야만 해. 
  난 오랫동안 산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도시에선 숨이 막히지. 
  사람들의 거친 파장이 내 몸의 세포를 망가뜨리거든. 
  아무튼 돌아가기 전에 그대를 만날 수 있어서 기뻐."

이제 보니 그는 무척 진지했다. 
나를 제자로 만들어 부려먹으려는 의도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자비심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대하는 순간 문득 그가 더없이 순수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런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밀가루떡을 뜯으며 다시 물었다.

"제게 무얼 일깨워주시려는 건가요? 
  지금 말씀해주시면 안 되나요?"

구루는 대답 대신 한참 동난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난 이미 그대에게 일깨워주었어. 
  그대가 못 알아들었을 뿐이지. 
  다시 한번 날 잘 보게. 
  내 몸에 무엇이 감겨 있나?   밧줄이 나를 묶고 있지.  
  내가 말해줄 건 그것뿐이야.   그리고 이 밧줄은 내 스스로 감은 것이야. 
  그대를 구속하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대 자신임을 잊지 말게. 
  그대만이 그대를 구속할 수 있고 또 그대만이 그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

구루는 말을 마치고 벌떡 일어나 몸에 걸치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 
그러더니 말릴 사이도 없이 그것을 갠지스 강에 힘껏 집어던졌다. 
밧줄은 잔잔한 물결에 실려 어둠 속으로 흘러갔다. 
구루가 말했다.

"모든 인간은 보이지 않는 밧줄로 스스로를 묶고 있지. 
  그러면서 한편으론 자유를 찾는 거야. 
  그대는 그런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게. 
  그대를 구속하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그대 자신이야. 
  먼저 그대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결코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어. 
  난 이 사실을 20 년 동안 그대의 귀에 대고 속삭여왔네. 
  바로 곁에서 말이야."

갠지스 강 위에 달이 떠올랐다. 
수면에도 달이 비쳤다. 
상점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고 화장터의 불꽃도 다 사그라들었다. 
인도인들은 거룻배를 타고 강 건너 딴 세상으로 가버렸는지 주위가 고요했다. 
미치광이 구루와 나는 강에 비친 달을 응시하며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스리 바가반 구루는 이틀 뒤 북인도 케다르나트로 떠났다. 
눈이 내려 히말라야를 올라가는 길이 끊어지기 전에 떠나야만 했다. 
나는 바라나시 역까지 그를 배웅 나갔다. 
밧줄을 벗어던진 그는 한결 자유롭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전쟁이 난 것처럼 와글대는 역 대합실에서 나는 어린애처럼 그와 포옹을 했다. 
그는 표도 끊지 않고 곧장 기차에 올라탔다.

손을 흔드는 내게 바가반 구루가 소리쳐 말했다.

"난 언제나 그대 곁에 있지. 
  바로 곁에 말야. 
  우린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대가 언제나 자유로운 정신에 머물기를 바라네. 
  그것 밖에는 다른 해답이 없지. 
  그대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있거든 언제라도 나를 찾아오게, 히말라야로!"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이후 나는 인도와 네팔의 히말라야를 여러 군데 여행했지만 스리 바가반 구루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어떤 인연으로 내가 그를 만나게 됐고,  그가 정말로 미치광이 구루인지 아닌지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언제나 자유로운 정신에 머무는 것,  그것은 내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 

 

 

 

※ 이 글은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열림원 - 1997.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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