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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정보/인생의 가장 행복한 반시간

꼴찌에게도 상장을

by 탄천사랑 2022. 8. 14.

·「풀잎 편집부 - 인생의 가장 행복한 반시간」

 

 

 

꼴찌에게 칭찬을 할 수 있는 사회라면 그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그러니까 모든 꼴찌가 즐겁게 귀히 여김을 받으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김형석   연세대 교수. 철학자.

               저서  '영혼과 사랑의 대화' 등 다수

 

 


재작년의 일이다.
미국 워싱톤에 사는 큰딸의 집을 찾았다. 
공항에 내려 보니 딸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사위는 병원 근무 시간이기 때문에 직장을 떠날 수 없었고, 외손자 진이는 학교에 있을 시간 같았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큰딸은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진이 놈이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고 
  공부도 제법 잘하는 편인데 운동 신경이 너무 둔하고 적극성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운동은 언제나 꼴찌입니다. 
  자기도 어차피 운동은 못하는 것으로 단념해버린 모양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나는 약간 서운했으나 인간은 누구나 개성을 갖고 있으며 
그 개성을 살려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위로와 권고를 해주었다.
그러나 어린것이 운동 때문에 일찍부터 열등감이나 좌절감을 갖는다면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온 가족이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 앉았던 진이가 학교 이야기를 하다가, 


“할아버지, 내가 학교서 상장을 받은 것이 있는데 보여줄까?”라고 했다.
“무슨 상장인데?”라고 물었더니, 
“학교에서 운동회 때 받은 상장이야”라고 했다.

자기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 운동은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이었는데, 궁금증이 일어 

 

“어디 보자”하고 가져오게 했다.

내가 받아본 상장은 생각 밖의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제일 열심히 뛰었기 때문에 이 상장을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상장을 읽으면서 웃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 
꼴찌를 했으니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뛰었음에는 틀림없다.
나는 진이에게, 

 

“그래 제일 열심히 뛰었으니까 상장을 받아야지”라고 칭찬해주었다.

손자 녀석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도 흐뭇한 기분에 잠겼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진이가 한국 초등학교에 다녔다면 체육대회나 운동회 때 한 번도 상장을 받아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상장을 받지 못한 것보다도 진이는 열등감과 창피스러움을 벗어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어떤 선생은 책망을 했을지 모르며 다른 학생들은 꼴찌를 했다고 놀려주기도 했을 것이다. 
앞으로는 운동을 더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그 열등의식과 좌절감이 오랫동안 진이의 성격과 인생에 흠집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체력이 약하게 자라도록 한 부모에게 불만도 느낄 수 있으며, 
어렸을 적부터 자기 능력의 한계를 스스로 느끼는 불만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 한 장의 상장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아마 상장을 받은 것은 운동회에 참가했던 모든 학생일 것이다. 
꼴찌인 진이가 받았으니 다른 어린이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또 만일 모두가 상장을 받았는데 우리 진이만 못 받았다면 진이가 받는 정신적 타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생각해보면 진이의 학교 선생님들과 미국 사회는 고마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꼴찌에게 칭찬을 할 수 있는 사회라면 그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그러니까 모든 꼴찌가 귀히 여김을 받으면서 즐겁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어떤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일등이 되어야 칭찬을 받고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사회로 굳어져가고 있다. 
물론 선의의 경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선의의 경쟁이 악의 수단과 부정의 방법을 용인하게 된다면 교육은 파국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욕심 많은 학부모들 대다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를 원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일등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같은 생각이 선생들에게도 번질 수 있다. 
그래서 선생들은 별로 책임감 없이, '우리 반에서 이 학생이 제일입니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 뜻이 무엇인가. 
지난번 시험에 이 학생이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말이다.
시험 성적이 좋았다고 해서 그 학생이 최고가 될 수는 없다. 
운동을 잘하는 학생도 있고,  인간관계가 좋은 학생도 있다. 
장차 위대한 실업가가 될 학생도 있고 존경받는 예술가가 될 학생도 있다. 
성적이 앞섰다고 해서 인격적으로 훌륭한 인물이 된다는 법도 없다.

개성을 소중히 여기는 교육자가 있다면 모든 학생이 다 제일이라는 평을 해 할 것이다. 
모든 학생이 자기 소질과 취미에는 제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똑같을 수 없고 또 같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다.
한두 학생을 제일로 삼기 위해 수많은 학생을 열등감과 좌절감에 몰아넣는 일은 얼마나 비교육적인가.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잘못된 가치관이 많은 어린 생명에게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만들어주고 있다.

교육이란 어린이들의 능력을 개발해주며 선한 의지와 신념을 뒷받침해주는 일이다. 
그 선의의 뒷받침은 모든 학생에게 필요하며 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열등감과 좌절을 느끼는 학생들일수록 더 많은 칭찬과 성장을 위한 후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앞서는 학생들보다는 
처지는 학생들이 더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책임일지 모른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모두 깊은 반성에 잠겨야 하겠다.

‘과연 나는 꼴찌인 어린이에게 상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자신 있는 교육자가 되고 있는가?’하고 

 

 


※ 이 글은 <인생의 가장 행복한 반시간>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2.08.14.  20210828-152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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