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잎 편집부 - 인생의 가장 행복한 반시간」
스스로 보람을 갖고 노추(老醜)와 노빈(老貧)을 멀리하면서 향불처럼 향내처럼
타인의 생활을 밝고 맑게 하며 사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이숙 수필가. 전직교사. 한국 수필가 협회 사무국장.
수필집 '내 영혼의 무지개.
나는 가끔 방안에다 향불을 피운다.
향불보다 냄새가 더 좋아서 피운다.
유거(幽居)하는 학자들이 진리를 논할 때 향내를 맡으면 심혼이 자못 맑아진다고 한다.
깊은 밤 달빛이 창틈에 스며들고 인간 세상을 멀리 한 맑고 엄숙한 기운이 천지에 가득 찰 때
향냄새는 사람의 마음을 온갖 근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한다.
밝은 들창 가까이에서 고서의 필적을 살피거나 한가로이 시를 읊조리거나
혹은 등잔불 밑에서 열심히 책을 읽을 때 향냄새는 졸음을 몰아내는 좋은 반려가 된다.
그러기에 향을 일러 <古伴月>이라고 부른다.
또 붉은 자리옷을 몸에 걸친 여인이 남자 곁에 서서,
향로 위에 드리운 손을 어루만지며 서로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
향은 사나이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더욱 더 연정을 부채질해 준다고 한다.
그러기에 향을 일러 <古助情>이라고 부른다
또한 비오는 날 오후 낮잠에서 깨어나 꼭 닫힌 창가에 앉아서 글을 쓰면서
그윽한 차의 풍미를 맛볼 때 향로에서 풍겨오는 방향은 한결 기분을 안온하게 돋구어 준다.
또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한가닥 향냄새는 악취를 막고,
습지에서 올라오는 고약한 기운을 쫓는데도 도움이 되며 적어도 사람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요긴하게 쓰이는 것이 향이라고 한다.
가장 질이 좋은 향은 가남(伽南)인데 이것은 좀처럼 구하기 힘든 귀물이라고 한다.
너무 향내가 강렬하여 코를 자극하는 것도 있고 연기가 많이 나는 것도 있지만,
나는 일본여행에서 사 온 변천종(辯天宗) 특산인 도라지꽃표의 향이 제일 좋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까 어떤 것이 좋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심향목이 풍기는 향내야말로 진짜 자연의 향기이며
필설로 표현이 어려운 가훈청향(佳薰淸香)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향냄새는 내가 울적할 때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마력이 있는 것이다.
향불을 보며 고요히 생각해 본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어느 누가 만족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리오마는
가파른 언덕 길을 숨 가삐 오르는 짐수레처럼 힘겨운 날들을 용케도 지내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온 길이 힘겹고 고된 나날이었든 순탄하고 즐거움으로 가득 찬 날이었든
그것은 모두 피할 수 없는 자기 길이라고 생각된다.
불교에서는 지금 당하고 있는 고생은 모두 전생에 행한 업보라고 하며
현재가 고달프면 후세에는 영광을 누린다고 하지만 전생이건, 후세이건 우리가 가보지 못한 것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현재에 착하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향불을 바라보며 이 시를 읊으면 한결 마음이 차분해진다.
사람이 제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일에의 희망과 그 성취를 위해 말없이 노력하는 한
우리의 가슴속에는 슬픔이 그 나래를 펴지 못하리라.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의 향내를 맡아 왔으며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향내를 풍겼는가?
스스로 보람을 갖고 노추(老醜)와 노빈(老貧)을 멀리하면서 향불처럼 향내처럼
타인의 생활을 밝고 맑게 하며 사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 이 글은 <인생의 가장 행복한 반시간>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3.12.23. 20211219-1518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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