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구루지와 꽃목걸이
람 샤란 구루지는 만날 때마다 내게 신선한 풀 말라(꽃목걸이) 하나씩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예스, 시화!” 하고 나를 맞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약간 어색했다.
그는 내가 무엇을 물어도, 심지어 짜이 한 잔을 마시자고 청해도, 늘 '예스, 시화!'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다.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내가 가진 슬픔, 어두운 면, 열등감, 비관적인 것들을 모두 배낭 속에 넣어 두곤 했다.
그것들은 밖으로 내보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낭을 등에 메고 다녔다.
대개 그것들은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배낭 속에 잘 들어가 있었지만,
때로는 격렬한 감정이 되어 바깥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내가 아무리 그것들을 외면한다 해도 그것들 역시 나의 일부분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의 한 부분이면서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
내가 받은 상처, 타인에게 준 돌이킬 수 없는 아픔들, 그것들 때문에 나는 자주 고통받았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러한 내게 람 샤란 구루지는 만날 때마다 '예스, 시화!' 하고 말했다.
마치 나의 전부를 있는 그대로 다 긍정한다는 듯이.
람 샤란 구루지를 만난 것은 인도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어느 호숫가에서였다.
이른 아침 여인숙을 나와 길을 걷는데 호숫가 계단에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사두 한 명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도 그 앞으로 가서 신발을 벗고 함께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한 시간쯤 그렇게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났을 때,
람 샤란 구루지가 문득 나의 명상하는 자세가 완벽에 가깝다고 칭찬하는 것이었다.
나는 약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말했다.
“자세만 그럴듯할 뿐, 내면은 전혀 그렇지 못해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명상을 하는 데는 자세가 더없이 중요하다는 걸 그대는 모르는가?
자세가 올바르지 못하면 명상 역시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대는 누구보다 완벽한 자세를 가졌으며, 그대의 내면 역시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그는 내가 마다할 틈도 없이 작은 금잔화 꽃목걸이 하나를 내 목에 걸어 주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을 받는 것을 주저했다.
그 지방에서는 여행객들에게 꽃을 주고 호수에 던지게 해 놓고는,
그것을 빙자해 헌금을 요구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람 샤란 구루지는 달랐다.
그는 나를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고,
게다가 그의 투명한 두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는 어쩐지 내가 배낭 속에 꼭꼭 숨겨 둔 나의 어둔 면들까지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말했다.
“이 다음에도 오늘처럼 당신 앞에 앉아서 함께 명상을 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그러자 그가 내 머리에 축복의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렇게 해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그 고장을 떠나지 못하고 아침마다 람 샤란 구루지와 함께 호숫가에서 명상을 했다.
우주의 창조신이 호수 수면에 반짝이는 햇살을 던지면 내 안에도 밝은 빛이 한 움큼 일렁였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평화로운 순간들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눈을 뜨면 구루지가 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것이었다.
“예스, 시화!” 그리고는 금잔화 꽃목걸이를 건네주며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찌릿찌릿 축복을 내렸다.
때로 나는 내 자신이 너무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것은 이 생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생을 두고 너무 여러 번 태어났다는 느낌이었다.
탄생과 죽음을 너무 많이 반복한 데서 오는 허무감 같은 것이었다.
이제 그만 그 순환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미처 끝내지 못한 그 무엇이 남아 있어 이 삶을 살게 되었지는 모르지만, 다음 생에선,
아니 이제는 그 어떤 무엇으로도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내 영혼은 ‘류시화’ 를 끝으로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그냥 바람처럼 무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머리에 박힌 화살처럼 그런 생각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한 내게 람 샤란 구루지가 아침마다 낭랑한 목소리로 소리쳐 말하는 것이었다.
“예스, 시화!”
그것은 나의 있는 그대로를 전부 인정하는 절대 긍정의 미소 같은 것이었다.
그의 그 한 마디는 어떤 설법보다도 나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삶에게도 죽음에게도 단지 ‘예스!’ 라고 말하라고 내게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것에도 갇히거나 얽매임 없이 거나 다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라고.
결국 나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며, 생은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기 마련이라는 것,
자신의 시행착오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시행착오라는 것,
따라서 자신을 괴롭힐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구루지는 내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서서히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이 치유되어 가고 있었다.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는
그 절대 긍정의 인사를 듣고 싶어서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구루지를 만나러 가곤 했다.
콧구멍 큰 낙타들과 놋쇠로 된 물동이를 두세 개씩 머리에 인 여인들을 지나치고,
여행자를 위한 카페들과 장신구 파는 가게들을 지나 모퉁이를 휘어 돌면
그곳에 어김없이 람 샤란 구루지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또 금잔화 꽃 목걸이를 손에 들고 나를 맞이했다.
“예스, 시화!”
그것은 축복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 고독한 여행자의 마음속에 빛과 밝음을 선사하는.
며칠 뒤,
내가 작별을 하기 위해 배낭을 메고 호숫가로 갔을 때 람 샤란 구루지 역시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엉덩이까지 오는 긴 머리를 뒤로 묶어 올리고서 낙타들이 어슬렁거리는 사막 저편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구루지! 람 샤란 구루지!”
나는 배낭을 멘 채로 그를 소리쳐 불렀다.
그리고는 그의 등 뒤에 대고 외쳤다.
“나를 잊지 말아요! 앞으로 또 만나야 해요!”
“예스, 시화!”
람 샤란 구루지는 한 손을 높이 쳐들어 흔들고는
색바랜 오렌지색 승복을 휘날리며 그렇게 태양 속으로 멀어져 갔다.
다음 생에도 또 나를 만날 것 처럼, 내 가슴속에 샛노란 금잔화 꽃목걸이를 새겨 놓고서.
※ 이 글은 <지구별 여행자>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김영사 - 2002. 11. 27.
[t-22.08.16. 20220814-145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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