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경영협회보 (2004.10)」
나도 한 때는 태평양을 누비던 고등어였다 - 다니구치 지로의 『열네 살』-
그러니까 딱 10년 전 22살 때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다.
그 땐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이라,
내 소통 수단은 하숙집의 인터폰이었고 그녀의 소통 수단 또한 기숙사에 연결돼 있는 인터폰이 전부였다.
몇 번을 연결해야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결국 어렵사리 약속을 하고 만났다.
술 취한 밤에 내 마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그녀가 자신이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 오라고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꽃을 사들고 신촌을 향해 걸어갔지만
정작 그 학교의 긴 백양로로 접어들면서 난 꽃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말았다.
많이도 흔들렸고 괴로워서 방황했던 22살엔 다른 것에도 그랬지만
사랑은 더더군다나 자신 없는 종목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때 그녀에게 꽃을 건네주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거의 첫사랑이라 부를 수 있었던 사람이었고 짧았지만 깊게 패인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다니구치 지로의 「열네 살」을 보다가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열네 살」은 과거와 기억에 대한 얘기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추억이 매개가 되어, 지난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다.
세월의 더깨가 쌓이면 쌓일수록 지난 날에 대한 그리움은 짙어 지기 마련이다.
우리 일상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피곤과 권태에 찌든 40대 후반의 평범한 샐러리맨 나카하라는
어느 날 출근 기차를 잘못 타게 된다.
공교롭게도 그 기차는 어머니 산소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어머니 산소에 내려 옛 추억에 잠기다가 깜박 잠이 든다.
깨어나 보니 14살의 중학생이 돼 있다.
30년이 훨씬 더 지나 그리운 옛 가족, 친구, 연인을 만나게 되면서 행복에 젖는다.
그러다 문득 너무나 단란했던 가정에 만족하면서 잘 지내던 아버지가
아무런 말없이 집을 나가게 된 이유를 찾는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슬픔과 고뇌를 이해한다.
48살을 이미 겪은 14살짜리 소년이기에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고 가출을 막지 못한다.
현실에 얽매여 살다보면 옛날 자신의 모습을 잊고 지낸다.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의 현재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처럼 느껴진다.
영화 「인어공주」를 봐도 이런 생각이 겹친다.
욕 잘하고 촌스럽고 세상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다가
「열네 살」에서처럼 '타임슬립'으로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보게 된다.
지금의 욕 잘하는 때밀이 아줌마가
한 때는 제주도 푸른 바다를 헤엄치던 해맑고 풋풋한 소녀였다는 것을...
넥스트의 「아버지와 나」의 가사 중
' 한 때 젊고 야심과 정열이 있었던 아버지가
지금은 가족에게 소외받고 돈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 라는 내용이 생각난다.
주름이 깊게 패인 부모님 얼굴에서 낭만과 순수와 야심과 정열을 읽기는 웬만해선 힘든 법이다.
하지만 분명 당신들에게도 꿈만 같던 어린 시절이 있었음을 안다.
우린 자판에 소금에 절여져 파리가 꼬이는 고등어가
한 때는 태평양을 종횡무진 누비던 힘찬 고등어였다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
우리는 현재가 과거의 누적물이라는 걸 망각할 때가 있다.
그놈의 현실이란 게 뭔지 아름다웠던 과거를 잊은 채 자꾸만 현재에만 매몰되게 하고
우리를 한없이 나약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다니구치 지로는
"과거와 미래는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미래를 알고 있고, 미래를 살았다.
끊임없이 레테의 강을 건너면서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이란 것이 중요하다 "라고 한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다시 과거를 살 수도 있고
부모님의 현재를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추억은 힘이라는 걸 증명하기는 어렵지 않을 듯 싶다.
덧붙임
다니구치 지로의 「열네 살」은 만화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림체도 너무 나 잔잔하고 섬세하다.
이 만화로 2003년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에서 수상했다고 한다.
글 - 김우진 (조직운영팀)
-KBS 경영협회보 (2004.10)|작성자 코기토
https://blog.naver.com/aizoum/140007234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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