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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 - 키다리 아저씨

by 탄천사랑 2022. 6. 19.

좋은 생각 - 2022. JULY.  vol. 159.



키다리 아저씨
"저, 2주만 일할 수 있을까요?"
대학 입학을 앞둔 나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중이었다.
연이은 거절에 포기하려는 찰나, 우연히 전봇대에 붙은 피시방 구인 광고를 보았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찾아간 그곳에서 소탈한 인상의 사장님을 만났다.

"내일부터 나오세요."

업무 시간은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꽤 여유로운 시간대였다.
업무는 단순했다. 
손님이 자리를 잡으면 물을 가져다주고, 
간식 주문이 들어오면 서빙하고, 손님이 나갈 때 계산하고 캄퓨터와 책상을 닦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겼다.
하루는 게임 중인 손님의 항의에 당황한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때 사장님이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미숙했네요.  서비스 시간 많이 드릴게요."

어느 날은 남학생이 음료 두 개를 계산하더니 나에게 하나를 건네며 자신의 번호가 적힌 쪽지를 놓고 갔다.
나는 고민하다 사장님에게 털어놓았다. 그날 사장님은 졸지에 나의 삼촌이 되었다.

"제 조카에요. 
  며칠 뒤 떠나니 맘접으세요.  손님."

자영업자의 빡빡한 사정을 알 리 없었던 나는 철없이 굴기도 했다.
출출할때면 파는 간식을 먹겠다고 노래를 부르거나 야식을 사 달라고 졸랐다.
사장님은 그런 나를 동생 타이르는 큰오빠처럼 핀잔하면서도, 내가 제일 좋아한 간식 '오다리'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무사히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대학에 입학한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사장님이었다.
대학 생활에 잘 적응했냐는 말에 나는 다들 영어를 잘해서 부담된다는 등 한참 너스레를 떨었다.
사장님은 통화 끝에 기숙사 주소를 물었고, 며칠 후 택배가 도착했다.
상자에는 토익 책과 카세트 플레이어, 오다리 열 봉지가 들어 있었다. '파이팅!'이라고 적힌 포스트잇과 함께.

사장님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학기가 끝날 즈음 우연히 찾은 그의 에스엔에스에 쓰여 있었다.

"십 년 뒤가 궁금해지는 친구. 
  담아야 할 것과 담지 말아야 할 것을 미리 정해 두지 말 것,
  자신을 잃어버린 채 남들의 생각이 네 것인 듯 선 긋지 말길,
  네가 내 나이가 되었을 때는 나보다 넓은 가슴으로 많은 사람에게 힘을 주는 어른이기를,
  넘어지면 일어서고 망설일지언정 포기하지 않기를."

청년이 된 첫해, 
삶을 주도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현실을 모르는 미숙함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나에게,  
그 혼란을 먼저 겪은 사장님의 존재가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사장님은 스치는 인연이었던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사장님의 편지를 다시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어른일까?  사장님의 기대를 충족했을까?' 

최근 우연한 기회로 20대 청년들의 멘토로 활동하며 사장님에게 받은 응원과 격려를 되돌려 주고 있다.
내가 그랬듯, 그들도 망망대해처럼 불안한 시기를 든든하게 헤쳐 가기를 바라며.  (p22)

조미라 님(서울시 강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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