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피터슨 - 이 책을 먹으라」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유에서 성경에 흥미와 매력을 느낀다.
여러 세기를 지나오면서 성경은 많은 권위를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계시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유용하거나 흥미롭거나 도움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이 제시하는 지적인 도전에 매료된 사람들이 늘 많이 있었다.
만약 호기심이 많은 지성을 가졌고 그러한 지성을 건설적인 일에 사용하고 싶다면,
성경학자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신학 도서관 어디든지 들어가서 성경 및 성경 각권에 대해 쓴
다양한 책들이 세심하게 분류된 통로 사이를 다녀 보면 그저 깜짝 놀랄 뿐이다.
아무렇게나 선반에서 책을 하나 꺼내어 읽어 보면,
그 책을 쓴 사람은 진리를 찾기 위해 그 문장들을 탐구했고
그 결과 매우 인상적이고 흥미로운 결론들을 얻은 일류의 지성을 가진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다.
언어, 역사, 문화, 사상, 지리, 시, 무엇이든 이름만 대 보라.
그것이 성경에 다 나와 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강의하고, 글을 쓰면서 평생을 보내도 그것을 다 다루지 못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조금 더 실용적인 성향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잘 살기를 원하고 자기 자녀들과 이웃들도 잘 살기를 원한다.
이들은 성경이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건전한 충고를 해주고 믿을 만한 방향 제시를 해준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이 세상을 잘 산다는 것은 건강해지고 부유해지고,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개인적 - 사회적 태도 모두에 대해 건전한 방침을 제시한다는 평판을 얻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유익을 얻기를 원한다.
사람이란 잘못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 고집 센 종족이며,
성경은 우리가 구덩이에 빠지는 것을 막아 주고 바르게 살게 해준다.
그리고 흔히 영감이라고 불리는 것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늘 많기 마련이다.
성경에는 아름답고 위로가 되는 본문들이 참으로 많다.
외롭거나 슬픔에 빠져 있을 때,
혹은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줄 어떤 말을 찾고 있을 때 성경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감동적인 엘리야의 이야기, 시편의 장엄한 리듬, 천둥같이 전해지는 이시야의 빼어난 설교,
예수님의 매력적인 비유, 에너지로 충만한 바울의 가르침---
하지만 경건하고도 아늑한 성경 읽기를 원한다면 조심해서 잘 골라야 한다.
잠이 들게 하거나 아니면 밤새 깨어 있게 만드는 본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 서점에 가면 당신이 위로나 위안을 받고 싶을 때,
혹은 당신의 현재 기분이 무엇을 요구하든 그것에 따라서 성경의 어떤 부분을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성경 구절 모음이 늘 준비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그룹의 성경 독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특히 나 자신이 각각의 그룹에 속해서 보낸 시간이 상당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당신이 어느 그룹에 속해 있든 당신은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게 될 것이며,
그 목적은 당신에게 관계의 차원에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주목하게 하고 싶다.
성경이 던지는 지적인 도전에 반응하면서 매우 진지하게 성경을 대하거나,
성경이 제시하는 도덕적 지침 혹은 성경이 주는 영적인 고양을 위해서 성경을 접하면서도,
당신에 대한 인격적인 계획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지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혹은 우리가 처음에 사용했던 표현대로 하자면,
성경을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읽으면서도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을 다루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전 존재와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살아 계시고 임재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의 권위 아래 우리 자신을 두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단도 직업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에 관심을 가지고 심지어 성경에 대해서 흥분하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과 관계 맺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책이다.
C. S. 루이스 Lewis는 자신이 쓴 마지막 책에서 두 가지 독서법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책을 이용하는 독서이고
또 하나는 저자의 목적을 받아들이는 독서다.
첫 번째 독서는 나쁜 독서로 이끌 뿐이고, 두 번째 독서는 좋은 독서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 내용을 ‘수용’할 때 우리는 감각과 상상력과 다른 다양한 능력들을
그 예술가가 창조한 패턴에 따라서 사용한다.
반면 그것을 ‘사용’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활동에 대한 보조물로 취급한다. ……
‘사용’은 ‘수용’보다 열등하다.
왜냐하면 예술을 수용하지 않고 사용하면,
그저 우리 자신의 인생을 쉽게 하거나, 밝게 하거나, 그 수고를 덜어 주거나, 완화시켜 줄 뿐,
그것에 무엇을 더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접할 때 교회가 구성해 낸 성삼위일체 개념을 인식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분명하게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대로 성경을 읽을 뿐 우리가 성경에 다가가는 방식대로 성경을 읽지 않는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다양하고 상보적인 작용에 굴복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형성되고자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 (p64)
※ 이 글은 <이 책을 먹으라>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유진 피터슨 - 이 책을 먹으라
역자 - 양혜원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 2006. 10. 10.
[t-07.04.13. 220401-06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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