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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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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지붕 위의 이야기꾼

by 탄천사랑 2007. 4. 18.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노인은 대뜸 자신이 고매한 학자이며 역사, 종교, 천문, 지리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생의 일들뿐 아니라 전생에서도 한 번 들은 이야기는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형형색색의 인도인들을 가득 싣고 버스는 신들의 고장 히말라야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두 명의 운전수가 번갈아 운전하는 장거리 시외버스는 구멍난 스피커로 쉴 새 없이 삼류 영화음악을 틀어 댔다. 
음악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청이 찢어질 정도였다. 
태양계 전체를 통틀어 버스 안에서 이토록 크게 음악을 틀어 놓는 나라는 아마 인도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나는 귀청이 찢어진 채로 사다리를 타고 버스 지붕으로 대피했다.

그곳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는 흔들리는 버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히말라야 동굴에라도 앉아 있는 것처럼 꼿꼿한 자세였다.

노인 말고도 버스 지붕에는 커다란 붉은 터번을 두른 인도인 남자 세 명이 오뚝이처럼 앉아 있었다. 
그들이 쓰고 있는 터번이 어찌나 크고 붉은지, 남인도의 식물원에서 본 커다란 꽃송이 같았다.

귀가 뾰족하게 생긴 그 노인은 다시금 자신이 평범한 버스 승객이 아님을 외국인인 내게 강조했다. 
신화와 설화, 수학과 점성학에 이르기까지 노인이 모르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직업을 묻자, 노인은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자기는 일정한 금액을 받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문 이야기꾼이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인도를 여행하면서 나는 온갖 신기한 직업을 봐 왔었다. 
길거리에서 귀 후벼주는 사람, 밤에 손전등을 켜고 도심지의 쥐를 잡는 사람, 
둥근 저울로 몸무게를 달아 주고 1루피씩 받는 사람,  점심때 집에서 회사까지 도시락을 배달해 주는 사람, 
그런가 하면 기차가 역에 들어왔을 때 대신 자리를 잡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노인이 전문적인 스토리 텔러라는 말을 듣고, 세상에 그런 직업이 있다는 것이 나는 더 흥미로웠다. 
그래서 자연히 노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얼마의 금액을 받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노인은 뜻밖에도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어떤 이야기인가는 돈을 받기 전엔 절대로 말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돈을 받고 이야기를 해주는 게 자신의 직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대단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얼마를 내야만 하죠?”

내가 흥미를 보이는 듯하자, 노인은 지체 없이 가격을 매겼다.

“내 고향인 구라자트 지방의 언어를 사용하면 한 시간에 1루피(30원)이고, 
  힌두어를 사용하면 2루피를 받소.  영어의 경우엔 가격이 더 높아서 시간당 5루피를 내야만 하오.”

그리고 나서 노인은 스스로 못 박았다.

“물론 당신은 구라자트어나 힌두어를 잘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영어에 해당하는 가격을 내야만 할 것이오.”

요금은 그다지 비싼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 시간에 5루피라면 인도 화폐로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한 자리에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그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보라. 
더구나 그가 온종일 이야기를 끌어간다면, 말재간에 능한 노인을 누가 말릴 것인가.

하지만 내게도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다. 
두 시간 정도 타고 가면 나는 도중에 버스를 갈아타야만 했다. 
따라서 노인에게 아무리 돈을 많이 털린다 해도 고작 10루피(300원)에 불과했다.
그렇게 해서 버스 지붕에 앉은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난데없는 흥정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노인은 내가 내미는 10루피를 얼른 받아 넣고서도 고개를 저었다. 
기본요금이 20루피라는 것이었다. 
인도와 아랍 어디서든 세상의 모든 이야기꾼은 

20루피의 기본요금을 받도록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 합의가 언제 어디서 이루어졌느냐고 내가 볼멘소리로 항의하자, 
노인은 그것은 전문 이야기꾼들만의 비밀이기 때문에 세상없어도 공개할 수 없노라고 잡아뗐다.

또다시 내 호주머니에서 날랜 동작으로 10루피를 빼앗아 간 노인은 
갑자기 옆에 앉은 붉은 터번 두른 세 남자에게도 돈을 낼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자기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들을 것이니까, 
그들도 반드시 돈을 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터번 두른 삼형제처럼 생긴 그 세 남자도 
노인 못지않게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버텼다. 
특히 '노 잉글리시, 노 머니!' 하면서 강력하게 손을 내젓는 
오른쪽 남자는 내가 봐도 어느 정도 영어를 이해할 줄 아는 게 분명했다. 
3백 년 이상 영국 통치를 받은 나라라서 학교 문턱에 드나든 사람이면 웬만큼은 영어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잉글리시’를 이해하는 것은 도저히 ‘임파시블’하다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하여 노인은 버스 지붕 위의 세 남자가 

혹시라도 몰래 자신의 이야기를 즐기고 있지 않나 감시의 눈을 째리며, 
기대에 찬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고대 인도의 왕국에 한 왕자가 태어났소. 
  왕궁의 현자는 이 왕자가 장차 세상을 통치할 자비로운 왕이 되거나, 
  아니면 출가해서 위대한 성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소. 
 그 리하여 왕은 왕자가 출가하지 못하도록 
  인생의 모든 슬픔과 고통들로부터 왕자를 차단시키겠노라고 결정을 내리게 되었소.......”

이 대목에서 나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노인은 지금 온 세상이 다 아는 싯달타 왕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신비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는 
고르고 고른 끝에 평범한 인도 음식이 나왔을 때처럼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이야기라면 나도 알고 있어요. 
  전문 이야기꾼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어린애도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서 
  돈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야기에 막 불을 지피려는 순간 내가 찬물을 끼얹자, 노인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 떠돌이 여행자가 어찌 이런 고상한 이야기를 알고 있나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더욱 한심해져서 어서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든지, 
아니면 당장 돈을 돌려달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노인은 하는 수 없이, 약간은 긴장된 목소리로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을 때, 창조주 브라흐마 신이 비시누 신에게 도움을 청했소. 
  그러자 비시누 신은 자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내려가 세상을 구원하겠노라고 말했소. 
  그렇게 해서 한 소년이 소몰이꾼들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었소......”

나도 모르게 또다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큰소리로 노인의 이야기를 제지했다.

“그 신의 이름이 크리슈나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바가바드 기타>도 읽었구요.”  나는 더욱더 기세등등해져서 노인에게 소리쳤다.

“당신의 보따리 속엔 뭔가 새롭고 감동적인 이야긴 없나요?”

노인은 아까보다 더 놀라는 얼굴이었다. 
무신론자인게 분명한 
이 히피 여행자가 크리슈나 신의 심오한 경전을 읽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사실 <바가바드 기타>를 번역까지 할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노인은 긴장한 나머지 귀를 더욱 뾰족하게 하고서 몇 가지 다른 이야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여전히 참신성과 흥미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진부한 이야기들이 인도를 해마다 여행한 내게 통할 리 없었다.

결국 나는 노인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 1분도 채 안 가 소리를 지르며 가로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 내용을 알고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야기의 뒷부분을 내 입으로 들려주기까지 했다. 
나중에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돈을 낸 건 나인데도 오히려 내 쪽에서 더 많이 떠들게 되었다. 
터번 쓴 세 남자는 별 희한한 일을 다 보겠다는 듯 노인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역시 우리가 하는 영어를 다 알아듣는 게 분명했다.

마침내 더 이상 물러날 수 없게 된 노인이  ‘라마 신에 대한 이야기’라며 대서사시의 막을 여는 순간, 
난 완전히 노인의 입을 막아 버릴 생각으로 큰소리로 외쳤다.

“그만둬요. 
  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를 두 번이나 읽은 사람이에요. 
  돈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이제부터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말아요. 
  조용히 풍경이나 감상하며 가겠어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는 인도의 고대 서사시에 해당하는 신화 이야기다. 
한 번은 텔레비전에서 이 두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말 그대로 인도 전역이 정지했다. 
택시와 릭샤와 자전거들이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고, 
기도 시간과 시체 화장이 미루어졌으며, 공무원, 청소부, 죄수, 가정 주부, 가게 주인, 
도둑, 경찰 할 것 없이 모두 텔레비전 앞에 몰려들어 드라마를 시청했다. 
세계 최대의 시청률이었다. 
드라마가 막을 내렸을 때는, 아쉬움을 참지 못해 북인도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참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민족임에 틀림없었다.

두 번이나 읽었다는 건 과장이었지만, 
나를 인도에 처음 온 초보 여행자쯤으로 여긴 건 노인의 큰 실수였다.

어쨌든 이젠 방해받지 않고 한가로이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허무맹랑한 인도 이야기꾼의 입을 막아 버린 나는 
등 뒤에 놓인 옥수수자루에 몸을 기대고 태양 아래 졸고 있는 마을들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노인이 한 가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듣기에는, 
 남태평양의 솔로몬 군도에 가면 원주민들이 어떤 큰 나무를 쓰러뜨릴 때 
 그들 나름의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혹시 당신도 그 이야기를 알고 있소?”

노인은 내가 또 아는 내용일까 봐 무척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원시적인 도끼로 넘어뜨릴 수 없는 큰 나무를 벨 때면 
 그곳 사람들은 그 나무 밑에 빙 둘러앉아서 나무를 향해 목청껏 소릴 지른다고 하오. 
 그렇게 한 달 정도 계속해서 ‘쓰러져라! 쓰러져라!’ 하고 소릴 지르면 
 결국엔 나무가 쓰러지고 만다는 것이오. 
 나무에게도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 영혼에 대고 힘껏 소리를 지르면 결국 죽고 만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이오.”

터번 쓴 세 남자와 내가 귀를 세우고 듣고 있는 사이, 노인이 말했다.

“당신은 내 이야기를 듣겠다고 
 돈 몇 푼을 내고선 내가 하려는 이야기마다 가로막고 소리를 질렀소. 
 그 이야기들을 통해 내가 어떤 결론에 이르려고 하는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소. 
 당신이 계속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을뿐더러, 
 결국 당신이 내지르는 소리에 내 영혼이 놀라 쓰러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영혼 또한 당신이 내지르는 소리에 결국 쓰러지고 말 것이오.”

나는 버스 지붕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옥수수자루를 끌어안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렇다. 
나는 살아오면서 줄곧 소리를 질러 왔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주장을 내세우며 나 자신에게, 타인에게 언제나 소리를 질렀다.

해마다 인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자주 문명의 충격에 시달린다. 
그것은 인도 문명에 대한 충격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 받는 충격이다.

이곳에선 눈만 뜨면 모두가 서로에게 소리를 지른다. 
거리에서, 신문과 방송에서, 컴퓨터 안에서, 
그리고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언제나 소리를 지르고 있다. 
이렇게 계속해서 소릴 지르다간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영혼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져 버릴 것만 같다.

그럴 때마다 단돈 20루피 때문에 
소리를 질러 그의 영혼을 놀라게 한 버스 지붕 위의 이야기꾼이 떠오른다. 
짜이를 마시라고 버스가 정차해도 여전히 버스 지붕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그 힌두 노인은 내게 중요한 것을 일깨워 준 한 사람의 스승이었다.  (p81)
 이 글은 <지구별 여행자>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김영사 - 2002.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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