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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 월터스-아름답게 사는 기술/인내

by 탄천사랑 2022. 6. 11.

케리 월터스 -  「아름답게 사는 기술

 


교황의 선종.
"교황은 세상을 떠나 봐야 그간 얼마나 아팠는지 알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이 말은 바티칸 측근자들 사이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금언이 있다.
교황의 건강 상태를 둘러싼 비밀 준수는 좀처럼 깨기 힘든 관례였다.
그러한 관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으로 끝을 고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몇 주 동안 내내 언론의 집중 조명을 피해 가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가 겪은 고통은 지난 몇 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진행된 그의 육체적 쇠락 과정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언론에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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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가 교황직 초기에 왕성한 활동가의 모습을 시작으로
(언론이 한데 입을 모아 그를 '운동선수 교황'이라 일컬으며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듯이)
세월이 흐르면서 말을 흘리고 손 떨림을 통제하지 못하고 

안면이 경색되고 몸이 굽은 모습으로 노쇠해 가는 과정을 줄곧 지켜보아 왔다.

그의 병세나 고통 그 어느 부분도 감춰진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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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의 덕 - 일련의 착각.
인내만큼 많은 오해와 평가 절하를 받는 덕도 없는 것 같다. 

한편에서 우리는 입버릇처럼 인내를 예찬한다.
특히 나이 든 사람들은 곧잘 젊은이들에게 인내하라고 훈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기성인들이 인내라는 마음의 덕을 기르는 데 

긴 시간과 정성을 쏟기를 껴려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전에 연재 만화 피너츠(스누피)의 한 토막에서 등장인물인 루시가 한 말은 

마치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인내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그만두었다. 
  인내를 갖게 될까 봐 문득 두려워졌다."

우리의 인내에 대한 열의 부족은 부분적으로는 분주함을 중시하는 우리 문화의 세태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성공이나 대중의 평판이나 자존감을 부단한 활동, 일을 척척 해내는 것, 
상승 가도를 달리는 것, 기존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는 것 등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번잡한 분위기 속에서 인내를 권고하거나

실천하는 것은 '잘 적응하지'못한 것에 대한 유감의 표시쯤으로 다가오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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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힘과 건강과 명성을 증시하는 문화에서 경시되기 마련인 무력함이나 

취약함은 대게 인내와 연관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내는 단지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게 통념적 인식이다.
곧 상황을 개선하려는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고 

절박한 사태에 처해 있을 때가 인내를 발휘할 적절한 시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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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고통에 맞선 인내는 비겁한 부정도 아닐뿐더러 자기 학대식으로 아픔을 탐닉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내는 자신의 아픔을 뛰어넘어 더 넓은 세계와 관계를 이루어 가며,

자아도취나 자기 연민 속에 함몰되지 않도록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다.
한 평론가가 표현했듯이, 인내는 사실상 '주의를 기울여' 고통에 반응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고통을 겪는 것이기에, 고통은 불가피한 것이다.

하지만 인내가 부족한 사람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고통을 피해 가려고 하는 반면, 
인내하는 사람은 고통에 현존하여 고통을 귀담아들으며 
고통이 자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식별하려 하면서 고통에 반응한다.

이렇게 인내에 길들여지는 가운데, 그는 고통의 체험과 관계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곧 고통에 주의를 기울여 반응하는 가운데 고통을 그저 하나의 외압 이상의 것으로,

곧 자신을 파괴하는 사건 이상의 것으로 변화시킨다.


인내의 덕 - 인내와 의미.
하지만 알 수 없는 물음들이 떠오른다.
왜 우리는 고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더군다나 고통을 수용해야 하는가?
왜 고통을 인애해야하는가?  도대체 그래야 할 필요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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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통은 다른 이들에게 유익한 표본이 될 때 의미를 부여받는다. 
고통, 특히 죽음에 앞선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극히 드물다. 
적지 않은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겪을 고통을 미리 내다보는 것이나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곁에 있기를 꺼려 한다. 
이처럼 고통에 대한 생각 자체나 고통의 현실을 회피하려 애쓰는 것이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산 표양이 되어 큰 고통이나 불행에 맞서 인내를 보여 주는 것은 

하나의 탁월한 가르침으로 전해진다. 
그러한 표양을 통해 우리는 고통이 반드시 우리에게서 자유나 위엄을 빼앗아 가지는 않음을 보게 되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도 닥칠지 모를 고통에 대처할 힘을 얻게 한다. 
더욱이 이제 우리 편에서 다른 이들에게 유익한 표양이 되고자 감화를 얻기도 한다. 
특히 삶의 마지막에 가서 우리의 고통을 인내롭게 껴안는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들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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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계해야 할 점을 일러두고 싶다.
과거의 일부 그리스도인 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통을 낭만적으로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악이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정신을 약하게 하고 우리 삶에서 즐거움을 앗아 가는 것이다.
고통을 제대로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통이 얼마나 쉽게 그것의 희생자들을 불행 속에 가두어 놓고,
그들을 여타 세계와 심지어 때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차단시키는지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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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열렬히 부여잡으려 하는 것은 신경증에 걸린 사람이나 하는 행위이다.
고통은 모든 인간에게 불가피한 것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그것은 분명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기에 애써 그것을 찾아 나설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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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통을 바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일찍히 베드로 사도좌에 착좌한 어느 교황보다도 건장한 신체를 소유했었다.
하지만 2년 반 동안 그의 교황직을 거의 마비시켰던 피격 사건에다, 
그로부터 향후 10년 동안 빡빡하게 짜인 일정의 강행은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열네 권의 회칙을 썼고, 

전세계 129개국과 이탈리아 내에서만 거의 150곳을 방문했다.

그는 세계 정세에, 특히 1990년 소비에트 연맹의 붕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대게 그의 하루 일과는 오전 5시 30분에 시작하여 밤늦게 끝났다.
기도와 신심 행위들, 문서 작업, 공식 알현, 교황청 본부 직원들과의 모임, 

사목적 임무들, 주요 인사들의 방문 접대,
공부와 저술 등(게다가 지속적인 해외 방문까지)으로 그의 하루 일과는 넘치도록 분주하게 돌아갔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가 장기간에 걸쳐 지속해 온 식이요법만으로도 벌써 지쳤을 것이다.
비교적 강인한 요한 바오로 2세조차 70대에 접어들면서 식이요법의 누적된 효과를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교황의 건강이 손상되고 있음을 알린 첫 번째 적신호가 1991년에 왔다.
그가 왼손 증세를 보이자, 그의 주치의 레나토 부조네티박사는 신경학과 진단 검사를 지시했다.
검사 결과 교황은 파킨슨병 초기에 있었다.
이에 약물 치료와 물리 치료가 시작되었지만 병의 진행을 막는 데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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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1월,
한 공식 알현이 끝날 즈음 교황은 자신의 의복 끝자락에 걸려 넘어져 바티칸 축복의 홀 바닥에 낙상했다.
그 결과로 입은 오른쪽 어깨 탈구는 가벼운 부상이었지만,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알리는 불길한 전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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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피한 고통을 인내로써 수용하는 데에 길들어진 삶은 죽음이 다가올 떄 직면할 힘을 우리에게 약속해 준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날들을 헛되이 보내지도,

다가올 어둠에 대항하느라 우리의 남은 힘을 탕진하지도,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처절하게 부정하느라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고통이 우리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를 훨씬 초월한 하나의 목적을 지닌다는 깨달음 속에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처럼 

'온갖 형태의 인간 고통이 그자체 안에구원과 영광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을 담고 있다'는 깨달음 속에) 

우리의 삶이 그러했듯 우리의 죽음도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p280)

- 인내ㆍ요한 바오로 2세 
※ 이 글은 <아름답게 사는 기술>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케리 월터스 - 아름답게 사는 기술 
역자 - 김성웅 
생활성서사 - 20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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