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스위트 홈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23년) - 최진영 외 /문학 사상 2023. 02. 10.
우리가 찾던 집은 야산을 등진 작은 마을의 끄트머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1934년에 건축물대장에 최초로 기록된 집이었다.
마을을 들어설 때부터 느낌이 좋았다.
마을 초입의 오래된 떡갈나무와 그 너머로 펼쳐진 밭,
모퉁이를 돌면 나타나는 초등학교와 마을의 삼거리에 있는 작은 슈퍼도 낯설지 않았다.
문과 창은 파괴되었으며 벽과 지붕은 오래되어 삭았으나 집을 받치는 기둥만큼은 튼튼해 보였다.
본채와 창고가 기역 자 형태로 있어 내가 그린 평면도처럼 개조할 여지도 있었다.
마을 초입에서 사오십분 정도 걸으면 서쪽 바다에 닿을 수 있었다.
보령에서도 멀지 않아 어진이 새 직장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좋았다.
벽과 지붕을 철거하기 전, 키 재기 흔적이 남아 있는 문틀과 야광 별 스티커가 붙어 있는 유리창은
절대 버리지 말아 달라고 업체에 부탁했다.
그런 흔적은 나에게 '나와라 꼬마 돈가스'와 비슷했다.
내게 남은 기억, 나와 함께 사라질 기억, 나는 육체고 이름이며 누군가의 무엇이다.
그러나 그보다 깊은 영역에서, 나란 존재는 나만이 알고 있는 기억의 합에 더욱 가까웠다.
사람들이 말하는 영혼이란 기억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떠났고 집은 버려졌어도 거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 것을 폐기물로 처리하고 싶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지붕과 벽의 부식된 곳은 조심스럽게 허물고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렸다.
창을 낼 곳을 뚫고 낡은 수도관을 교체하고 전기선 작업을 마친 다음 벽에 석고를 발랐다.
바닥을 모두 걷어 내고 보일러 배관을 깔고 시멘트로 덮었다.
엄마는 매일 현장에 나갔다.
사람들을 도와 자재를 나르고 폐기물을 치우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엄마는
나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엄마는 '말도 안 된다'라는 말을 더는 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추위를 많아 타니까 단열재를 신경 써야 해.
휠체어를 탈 수도 있으니 기둥이나 문턱을 없애고 슬라이딩도어로 바꾸는 건 어때.
벽을 따라 지지대를 만들어 두면 나중에 늙어서 쓰기에도 좋을 거야.
미끄러운 타일은 안 돼.
창문을 리모컨으로 작동하게 할 수는 없을까.
더는 나를 '아픈 사람'이라 칭하지 않으면서도 엄마는 내가 더 아플 경우를 대비하려 했다.
더 나아지진 않으리란 나의 생각은 더 나빠지진 않으리란 생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공사를 도우며 집 안 곳곳에서 여러 물건을 주웠다.
플라스틱 헤어핀, 문구사 앞 뽑기 기계에서 뽑았을 듯한 통통 튀는 고무공, 닳은 지우개,
몽당연필, 발목에 앵두 자수가 있는 양말 한 짝, 노란 슬리퍼 한 짝. 스누피가 그려진 볼펜,
빨간색 레고 블록, 유리 구슬, 티스푼, 손뜨개 인형, 열쇠고리, 베이지색 단추…….
그런 것을 발견하면 흙을 털어 내고 물로 깨끗이 씻어 작은 바구니에 모아 두었다.
누군가 그것을 찾으러 올지도 모르니까.
실례지만 혹시 이곳에서 손잡이에 꽃 모양 장식이 있는 티스푼을 보지 못했습니까.
하늘색 고무공을 찾지 못했습니까.
오래전 이곳에 살 때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네 잎클로버 모양의 열쇠고리인데요, 제가 지금에야 그것을 찾는 이유는…….
과거에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와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상상하면 행복했다.
그들이 찾는 것을 기적처럼 꺼내어 건네주는 상상은 천국 같았다.
또한 나의 천국은 다음과 같은 것.
여름날 땀 흘린 뒤 시원한 찬물 샤워.
겨울날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바라보는 밤하늘.
잠에서 깨었을 때 당신과 맞잡은 손.
마주 보는 눈동자.
같은 곳을 향하는 미소.
다정한 침묵.
책 속의 고독.
비 오는 날 빗소리.
눈 오는 날의 적막.
안개 짙은 날의 음악. 햇살. 노을. 바람. 산책.
앞서 걷는 당신의 뒷모습.
물이 참 달다고 말하는 당신.
실없이 웃는 당신.
나의 천국은 이곳에 있고 그 또한 내가 두고 갈 것.
**
공사는 무사히 끝났다.
이삿짐을 옮길 일만 남은 집을 바라보며 엄마가 말했다.
자잘한 건 매일매일 고치면서 살아야 해.
이런 집에 살면 손볼 구석이 계속 생기니까.
텃밭도 그래.
매일 풀을 뽑고 흙을 다지고 물을 주고 벌레를 잡고. 그런 사소한 일을 게을리하면 안 돼.
엄마는 여전히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죽음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니까.
미래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나는 이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눈앞에 내가 기억하는 미래가 나타났으므로.
어느 여름날에는 툇마루에 청개구리가 나타날지 모른다.
나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고 청개구리는 사라지고,
나는 이유를 모른 채 울어 버릴지도.
나는 다시 아플 수 있다.
어쩌면 나아질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탄생과 죽음은 누구나 겪는 일.
누구나 겪는다는 결과만으로 그 과정까지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이제 나는 다른 것을 바라보며 살 것이다.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 한 송이.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신은 그런 것에 관심 없겠지만,
- 끝.
※ 이 글은 <홈 스위트 홈>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3.05.13. 230510-1640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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