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산문집 -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편지 쓰는 사람들
오늘은 모처럼의 휴일이라 둥근 초록빛 책상 앞에 앉아 수십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동안 미루어둔 답장을 쓰려니 시간이 걸리지만 각종 편지들을 마주하고 앉으면
이웃과 친지들을 향해 잊고 있던 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새록새록 따뜻하게 솟아오릅니다.
‘사람들의 정성에 내가 보답을 못하고 너무 무심했구나’
‘귀한 선물을 늘 당연한 듯이 받고 제때에 감사 인사도 못했구나’
‘나의 무관심한 태도에 꽤나 서운했겠구나’ 하는 것을,
회답하기 위해 편지를 다시 읽는 과정에서 깨우치며 거듭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이 됩니다.
바쁜 생활에 좀체 여유가 없어 글을 쓸 시간이 없거나,
일부러 짬을 내어 짧게나마 편지를 쓰는 일이 번거롭게 생각되더라도,
편지를 쓰는 일은 우리가 직접 마음을 나누는 사랑의 행위임을 편지를 쓰면서 다시 알게 됩니다.
생전에 편지와 일기에 담긴 깊은 영성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사제 헨리 나웬의 글을 다시 읽어 봅니다.
오늘 나는, 내가 편지를 쓰고 기도를 바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 든다.
서로 주고받는 우리의 사랑은 지극히 구체적이며 활력을 불어넣는다.
편지를 생각하고,
편지를 보낸 이들을 생각하고 그리고 편지를 받는 이들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편지 쓰기가 지니는 장점은 우정을 한결 실감 나게 만들고 돈독하게 다져준다는 데에 있다.
처음엔 상당히 부담스럽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편안히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일을 중단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평소에도 자주 편지를 쓰는 저에게는 나름대로 편지 쓰기 순서가 있답니다. 함께 보실래요?
- 먼저 봉투를 준비해서 받을 사람의 주소를 쓰고 답장해야 할 편지들과 같이 클립으로 끼워둡니다.
처음 받은 편지 주소는 다른 수첩에 적어두어 다음에도 쉽게 찾을 수 있게 합니다.
- 겉봉에 있는 이름들을 보면서 좋은 시, 책갈피, 그림엽서, 카드, 사진, 오려둔 신문기사 등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들이 생각날 때마다 봉투에 미리 넣어둡니다.
- 다양한 편지지와 메모지들을 어린이용, 청소년용, 어른용으로 준비해두고
한국적인 우표는 해외용으로 따로 마련해둡니다.
- 마음이 차분하고 주위가 조용하고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어떤 날,
아름다운 음악을 틀어놓고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 편지를 봉투에 넣는 과정에서 내용이 서로 바뀌지 않도록 유의하며 투명 테이프로 봉한 다음,
의미 있는 말이 적힌 스티커를 가운데 붙이거나 꽃, 십자 모양을 색연필로 그려 넣습니다.
-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치며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해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바치면서
사랑의 의무를 끝낸 가볍고 즐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옵니다.
근래엔 현각 스님이 엮은 숭산 스님의 서한 모음집 <오직 모를 뿐>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숭산 큰스님은 당신을 따르는 많은 이들을 일일이 다 만날 수가 없으므로 편지로나마 정성을 다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전 세계를 무대로 봉사했던 인도의 성녀 마더 데레사 또한
어느 날은 따로 시간을 내어 편지 쓰기에 정성을 다하고 많은 경우엔 친필로 쓴다고 나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편지나 카드 쓰기 역시 공해일 뿐이기에 아예 안 쓰려고 작정했다는 분들도 더러 있지만,
편지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요?
이번에 해외여행을 하면서 보니 애인, 친구, 가족, 스승, 성직자 등
여러 대상에 맞게 기념일마다 주는 카드들을 따로 분류해서 파는 걸 보고,
카드 쓰는 일이 일상생활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편지를 쓰더라도 요즘은 종이 편지 대신 전자 편지를 많이 쓰고 평소에 하고 싶은 말도 전화로 다 해버리니
우체국에 가도 예전보다 한산한 편입니다.
지난 봄에는 우리 동네 우체국장의 이름으로 나에게까지 감사의 축전과 기념품이 배달되는 걸 보고
사람들이 정말 편지를 쓰지 않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한 해를 정리하고 돌아보는 12월엔 우리 모두 미루어둔 편지를 쓰기 위해 즐겁고 바쁘게 보내면 좋겠습니다.
12월만이라도 전자 편지 아닌 종이 편지에 나름대로 정성을 담아 벗들에게 보내며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면 좋겠습니다.
많은 친지들이 내게도 음악까지 곁들인 다양한 전자 카드들을 자주 보내주지만,
일일이 찾아 읽으려면 오히려 시간이 더 걸려서 '그냥 종이카드로 보내주면 안 될까요?'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나 또한 전자 편지와 카드들을 이용하고는 있지만,
컴퓨터 안에 기껏 정리해놓은 주소록을 몽땅 날린 후로는 종이에 적는 것을 다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올 한 해도 저의 부족함을 인내해 주시고 늘 함께 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힘들어도 용기 잃지 마시기를 기도드릴게요'
'부디 행복하고 건강하십시오'
아주 간단한 말이라도 차가운 인쇄 글씨 아닌 따스한 친필로 적어서 사랑과 기도와 고마움을 전한다면
우리 서로에게 좋은 선물이 되리라 믿습니다.
편지를 쓰고 받고 기다리는 삶은 얼마나 겸손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예술일까요?
또 한 해를 보내며 나의 편지 쓰기 소임은 살아 있는 한 이어져야 할 '사랑의 일' 임을 생각해 봅니다.
편지에 관한 아름다운 동시 한 편을 읽어봅니다.
보고 싶은 친구 만날 날
기다리다 못해
다 털고 글로 나섰다.
어디만큼 왔을까
저 산 넘으면 나올까
흰봉투 속에서
곱발 딛고 쫑긋쫑긋
내다보는 글씨즐
친구와 나 사이에 막혀 있는
첩첩 산 허물고 싶어
막힌 봇물 트고 싶어
숨쉴 짬도 없이
밤이 와도 눕지 않고
줄줄이 일어서
날개 달아가는 글씨들
- 김정의 시 '편지'
※ 이 글은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이해인 산문집 -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샘터 - 2002. 04. 30.
[t-23.12.24. 20211208-16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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