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여자고등학교 동창회보 - 무학 Vol. 27 2022」
2022이 밝았다.
새해라고 특별한 것도 없는 어제와 같은 날이건만 그래도 새해니까 뭔가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고
건강이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친구들 모두에게 행복이 가득 했으면 좋겠다.
새해 특집으로 3반 박정숙이 필명 이청해로 <어디까지 왔니> 소설집을 출간하였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3학년 3반. 담임은 국어 담당 홍준오 선생님이시다.
같은 반이 되고 앞뒤로 앉았는데 어찌나 얌전한지 숨도 안 쉬는 것 같이
조용히 앉아 있어서 쉬는 시간마다 뒤돌아 앉아 떠드는 나 때문에 친구가 되었다.
교지에 실린 <시간 소묘>라는 글을 읽고 놀라서 물었다.
"너 언제부터 글을 잘 썼어?"
"중학교때 작문숙제를 제출하면 선생님이 꼭 읽어 주셨어.
그래서 숙제를 대신 해달라고 부탁하는 친구도 있었지."
신기했다.
글 잘 쓰는 친구들은 문예반이나 도서반에나 있는 줄 알았지
이렇게 말이 없는 친구가 글을 잘 쓰리라고는 상상을 못 했기 때문이다.
고 3때 우리는 서울대반, 연*고대반, 이대반, 실업반 등등으로 나누어
오전에는 교실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해당반으로 가서 공부했었는데 기억나니?
왜 나누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오후에는 이대반에 가서 같이 짝을 하고 지냈지.
시험 기간중 주책없이 집으로 놀러 간 적이 있어.
놀러 간 나에게 같이 공부하자며 잡아끄는 바람에 책을 읽고
서로 문제 내서 맞춰보며 시험공부를 하게 된 거야.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어.
이게 웬일이니?!
내가 상위권에 올라간 거야.
다른 친구 성적표가 잘못해서 나한테 온 줄 알았다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랑 달리 나는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건만
그럭저럭 따라는 갔는지 이대 가는 원서는 써줘서 시험은 봤는데 보기 좋게 미끄러졌어.
시험 보는데 아는 문제가 별로 안 나왔더라구.
정숙이는 신촌으로,
나는 청량리 쪽으로 대학을 다녔지만 수업 끝나고 자취하는정숙이네 집으로 가기도 하고
만나서 명동으로 충무로로 종로로 을지로나 청계천으로 많이도 붙어 다녔어.
졸업 후에 <여원>이라는 잡지사에 기자로 들어갔는데
당시 경쟁률이 500대 1도 넘었던 것 같은데 붙었다고 해서 와! 대단하구나 하고 느꼈지.
나도 경기도로 발령받아 바쁜 중에도 틈틈이 만나다가 26세에 결혼했는데
기가 막히게 결혼식 날짜가 같아서 서로의 결혼식엔 참석하지 못했단다.
그 후 정숙이는 남편 따라 대구로 내려가서 임용고사를 치르고 공립학교에서 근무했는데,
서로 애 낳고 사는 게 바쁜 중에도 서울에 오면 꼭 연락하고 만나고 그랬어.
그러다가 서울 잠실로 이사를 왔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1990년 중편소설 '강'이 KBS 방송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부부 동반해서 축하연을 갖기도 했고
이듬해에 단편 '하오'로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정식 등단했단다.
그리고 그해 <세계의 문학>에 실린 단편 '빗소리'는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거래.
동화책도 썼어.
<내 친구 상하>라는 책인데 20쇄 이상 찍을 만큼 인기가 좋았고
<개구리 울음소리>는 탈북해서 온 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를 써서 발표하기도 했어.
수유리로 이사갔다고 해서 집들이 갔더니 북한산과 도봉산 능선이 눈앞에 쫘~~악 펼쳐있더라.
실내 어느 창문으로 내다봐도 인수봉과 선인봉이 그림처럼 보였다.
"산 좋아하더니 코앞으로 이사를 왔구나."
하면서 축하했는데 환갑이 지나 등산학교에 들어가 실내 암장을 다니는 거야.
너 몇 살인데 그런 걸 시작하니? 걱정했는데
처음에는 제대로 벽에 붙어 있는 것도 힘들다더니 시간이 지나자
암장 벽을 열 바퀴 돌게 되고 스무바퀴, 서른바퀴 문제없이 암벽을 타게 되었는데
팔에 근육이 생기는 게 신기했고,
체력이 점점 좋아지는게 느껴져서 멈출 수가 없었대.
등반에 자신감을 가지더니 내친김에 빙벽도 배우더라.
어느 겨울 둘이서 제주도 관광여행을 갔는데 눈이 쏟아지는 거야.
가이드가 목적지 까지 못 가더라도 시간 되면 꼭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했어
올라가다가 나는 눈길이 힘들어서 차로 돌아왔는데
정숙이는 그대로 올라가서 완주하고 시간맞춰 내려왔어.
설경이 너무 좋아서 돌아설 기분이 아니었다며.
그 후로 외국에 있는 산을 여기저기 다니더니 등반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해서
나는 방해 될까 봐 전화도 하지 않고 글쓰기가 끝나기만 기다렸어.
드디어 책이 완성되고
우리는 명동에서 만나 오랜만에 남산에서 케이불카를 타고 팔각정에 올라가
옛날 생각 하며 추억에 잠겨도 보고
성벽에 서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며 살던 곳이 어딘가? 손가락으로 짚어보다가 내려와
왕돈까스도 먹고 찻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만나던 친구 하나는 치매 걸려 찾아본들 알아보지도 못하고
외국사는 친구는 언제나 만날까 기약도 없으니 마음이 울적하다.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두 다리 멀쩡할 때 열심히 만나자 약속하며 헤어질 때 등에 멘 가방에서 책을 꺼내 준다.
다섯 권이나 들었으니 어깨가 뻐근했겠네.
책 나올 때마다 받으면서 친구인 내가 더 으쓱거리며 자랑스러워했던 거 같다.
책을 꺼내 들었다.
한 손에 잡히는 아담한 크기다.
새로운 디자인이네!
☆ 민음사 이청해 소설집 <어디까지 왔나>
그동안에 노고가 느껴진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까 미루어 짐작하니 가슴이 뭉클하다.
세월이 좋으면 출판 기념회를 멋지게 열었으면 좋으련만,
남들처럼 책을 잔뜩 쌓아놓고 '위하여'를 외치며 건배하고 수다 떨다가 돌아갈 때
한권씩 나눠 주고 싶은데....
다섯 권의 책마다 친구 이름이 정성껏 씌여있다.
"다 같이 만날 수 없으니까 네가 수고 좀 해줘."
친구들이 전해주면 좋아하겠지.
나는 돌아다닐 핑계가 생겨 신이 나는 거다.
- 내가 경험해 본 산, 등반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한 '검은 나비'는
파타고니아 세로토레를 오르다가 실패한 두 산악인의 양심에 관한 이야기로
내가 살기 위해 동료의 줄을 끊은 사람,
그로 인해 추락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와 '정말 내 인생은 어디까지 온 것일까?'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고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며 생의 분수령을 넘어가는 사람들의 바닥난 심연을
가감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원숙한 인생론
이청해 소설집 [어디까지 왔나]가 믿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출판사에서는 노인들을 배려해서 글씨 크기를 좀 더 크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돋보기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얼른 생각을 바꿨다.
읽어줘서 고마워! 건강하고 행복하자!
- 21회 총무 조중혜
,무학여자고등학교 동창회보 - 무학 Vol.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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