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희 - 「준비된 엄마의 교육수첩」
내 아이가 18개월쯤 되었을 때다.
하루는 아이와 <팥죽할멈과 호랑이>를 읽고 있었다.
한창 호시심이 많은 때라 아이가 책을 읽을 때도 이것저것 물어봐 내 나름 열심히 답을 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 팥에 대해 묻는데 뭐라고 답하기가 참 애매했다.
책 속에서 반복해서 팥에 대해 나오니 얼렁뚱땅 넘어가기도 뭣하고...,
어떻게 하면 팥이란 말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찬장 속 유리병에 담겨 있던 팥이 생각났다.
나는 얼른 팥을 한 움큼 집어와 팥 그림이 그려져 있는 곳에다 쏟아 놓고는 말했다.
"한성아,
그림 속의 이 팥하고 엄마가 가져온 이 팥이 똑같은 거야."
순간 아이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손으로 팥을 집어 입에 넣는 것이었다.
씻지도 않은 것이라 얼른 수건으로 대충 닦아서 다시 깨물어 보게 했다.
"딱딱하지?
그래서 팥은 푹 삶아서 먹어야 하는 거야." 아이는 이해를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에서 팥에 대한 설명을 끝낼까 하다가,
내 귀찮음 때문에 아이의 호기심을 충족 못 시키면 어쩌나 싶었다.
딱딱한 팥에서 사고가 끝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로 남겨 두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날은 독서를 대충 끝내고는
팥으로 칼국수를 해 함께 먹으며 열심히 팥이 어떤 맛이고 색깔은 어떤지 등을 함께 이야기 했다.
그때마다 아이는 새로운 눈을 뜬 것처럼 마냥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아이는 같은 책을 읽으며 안 되는 발음으로
엄마랑 팥죽을 먹었노라고 연신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를 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이처럼 그날의 경험은 앞으로도 아이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책과 함께한 행복한 경험은 오래오래 간직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아이에게 단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한다는 뜻만이 아니다.
책을 읽는 시간은 지식 너머의 가치, 즉 엄마의 열정을 전하는 시간이다.
아이는 엄마가 한 글자 한 글자 손가락으로 짚어 줄 때마다
엄마의 사랑 가득한 목소리와 자신에 대한 애정을 듬뿍 느낀다.
엄마와 함께 읽는 동안 아이는 책에서 얻은 지식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엄마의 살아있는 경험은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며,
책 속의 지식이 실제 경험과 맞물릴 때 아이는 자신이 아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고
실행하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집집마다 아이들 책이 넘쳐난다.
전집에 시리즈에 없는 책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엄마들이 많다.
"왜 내 아이는 생각할 줄 모르는 것 같고,
스스로 대견한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책 속에 있는 글자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엄마도 아이도 단순히 책만 읽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지식이 지혜로 전환되려면 지식이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자극제가 필요하다.
그 자극제가 바로 경험이다.
경험이란 지식을 가장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실재적인 도구다.
또한 가장 오랫동안 지식을 기억하게 만드는 도구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축적된 경험과 반복적으로 주입된 가치관이
어느 날 지식이라는 매개체를 만났을 때 강한 충격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을 통해 꾸준히 배경 지식을 쌓아야,
경험을 지식으로 전환하고 나아가 다른 곳으로까지 파급시키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엄마의 살아 있는 경험을 물려줘라.
글자에 관심도 없고 말할 생각도 없는 아이에게 강제로 말을 시키고
학습지를 들이대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어느 날 질문을 하고 글자나 자기 이름에 관심을 가지는 바로 그 순간, 강한 자극을 주어야 한다.
바로 그때, 지식을 중폭 시킬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아이는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자신만의 경험을 뇌에 저장하게 된다.
장기 기억으로 보관해 두고두고 회상하게 된다.
그리고 좋은 경험은 다른 것을 이해하고 습득하게 하는 일거양득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스키너나 파블로프 같은 경험론자들은
'교육은 곧 경험이나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고까지 했다.
반복된 경험은 자극제가 사라져도 습관으로 고정된다.
잘못된 습관도 한번 잘못 들이면 고치기 힘든 것처럼 좋은 경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좋은 경험을 반복하며 지식을 쌓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좋은 경험은 한 인간을 탄탄하게 만들고,
자신 있게 살아가게 하는 저력이 된다. (p93)
여성신문사 - 2009. 0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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