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영 외 / 「리영희 프리즘」
영어 실력이 사회적 성공의 보증수표로 여겨지는 시대다.
그런데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영어 식민주의'라는 말까지 나오는 한국 사회에서
이런 질문은 사실 어리석은 질문에 가깝다.
그러나 모두가 다 아는 월론적인 질문일수록 답하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p107)
---
영어 실력의 핵심은 유창한 발음이 아니라 '풍부한 어휘력,
그리고 적절한 표현으로 조직해내는 사고력'이다.
영어를 배우는 데 있어 이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례에 덧붙여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사례도 꼽을 만하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칠 무렵인 10여 년 전 경험이다.
현재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지젝(Slavoj Zizek)이 내가 당시 공부 중이던 대학에서 초청 강연을 했다.
당시 지젝은 이미 대가급의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 나는 강연 초반에는 그의 강연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영어 발음은 유창한 미국식 영어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한 걸음 양보해 지젝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발언의 표현은 영 어색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젝 자신은 자신의 서투른 발음에 전혀 신경을 쓰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그 어색한 영어 발음으로 좌중을 압도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열정적으로 두 시간에 걸쳐 쏟아 냈다.
... 당시 강연장을 가득 메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들도 그의 발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지젝의 어색한 발음이 아니라
강연에서 그가 주장했던 독창적인 사유의 내용이었다.
원어민 발음과 거리가 먼 영어를 구사하는 지젝은 원어민을 능가하는 유려한 글쓰기 능력으로
자신의 저서 거의 대부분 직접 영어로 쓴다.
그런 능력은 500단어의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p109)
---
얼마 전 신문에
미국의 이름 있는 대학에 진학한 한국 유학생들의 절반가량이 중도 탈락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짐작컨대 그들이 유창한 영어 발음을 못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리라.
케케묵은 말처럼 들리지만,
대학은 고차원적인 학문, 전문적 기술을 익히는 곳이다.
대학에서 자신의 전공을 제대로 공부하고 공부의 내용을 자신의 글쓰기로 독창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실용 영어에서 강조하는 500 단어 회화 수준의 영어로는 어림도 없다.
유창한 발음으로 포장된 영어를 받쳐 주는 깊이 있는 지식과 교양,
비판적이고 포괄적인 사고력이 없는 한국의 유학생들이
미국 대학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어쩌면 당연하다.
영어는 한국인에게 외국어다.
따라서
"외국인으로서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개개인이 영어를 사용하며 수행해야 하는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지,
그들과 같은 발음,
그들과 같은 어법,
그들과 같은 관용구, 그들과 같은 욕을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p114)
--- 무엇보다 꾸준히 영어에 노출되는 것이 중요하며, 말하기보다 듣기가 더 중요하다.
좋은 영어문장을 많이 들으면 그것을 배워서 따라 말할 수 있다.
아이들이 말을 하기 전에 수많은 표현을 반복적으로 듣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이 인터넷 방송이다.
그리고 이왕 방송을 들으려면
균형 잡힌 의견을 전달하는 뉴스 방송을 꾸준히 반복적으로 듣는 것이 좋다.
다양한 매체를 활용할 수 있지만 나는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www.npr.org )듣기를 권한다.
.... 앞서 지젝을 들어 언급했지만 말하기의 핵심은 유러 한 발음에 있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발음에 신경쓰기보다는 강세(악센트)에 신경을 쓰는 것이 훨씬 낫다.
우리가 듣기에는 아주 어색한 영어로 외국인들이 말해도
'원어민'들이 알아듣는 이유는 강세를 지켜 발음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전달하려는 내용이다 (p117)
.... 그리고 영어로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조리 있게 말할 수 있으려면
어눌한 발음에 지레 겁먹지 말고 적극적으로 말해야 한다.
영어 울령증의 좋은 치료제는 어떤 경우에도 주눅 들지 않는 적극성(aggressiveness)이다.
앞서 언급한 지젝의 경우가 좋은 예다. (P118)
---
상식적인 말이지만 좋은 글을 읽는 것이 언어공부의 요체다.
좋은 글을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고,
좋은 표현을 들어야 그런 표현을 유려한 말이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읽기와 듣기가 쓰기와 말하기의 토대다.
읽기와 듣기의 오랜 훈련이 받쳐주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영어 실력은 기껏 '500 단어의 유창한 영어실력'이다.
각 나라의 해당 언어로 씌어진 문학작품은
그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표현이 담긴 텍스트다. (P121)
---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왜 배우는가?
어떻게 영어를 배우고 누구를 위하여 영어를 쓰는가?
리영희에게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진실을 추구하려는 지식인으로서 글을 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세계를 조망하는 창을 더 많이 확보한다는 뜻이다.
리영희가 누구보다 날카롭게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를 향해 열린 외국어의 창을 많이 확보했고,
그 창을 통해 무엇을 봐야 할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리영희에게는 영어 공부의 '정신'이 있었다.
영어 공부의 목적과 방법을 분몀히 구분하는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 없으면
영어는 입신양명의 방편으로 이용되거나 영어 시대주의의 추악한 표현이 된다.
'정신'은 잃어버린 채 유창한 영어 발음을 구사하는 한국인은 파농(Franz Fanon)의 표현을 빌리면,
'검은 피, 햐얀 가면'의 정신적 식민지인이 된다.
우리가 지금 리영희에게 베워야 할 것은 그런 정신이다. (p124)
고병권 천정환 오길영 외 / 리영희 프리즘(우리시대의교양)
사계절 / 2010. 02. 20.
'일상 정보 > *외국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런 로우즈-프로 블로거/마침내 풀타임 블로거로 (0) | 2022.08.15 |
---|---|
박상태-행복하고 행복하고 또 행복하라/당신은 프로입니까? (0) | 2022.01.23 |
· 중앙일보-윤여정식 쉬운 영어/유머와 진솔함의 힘 (0) | 2021.03.19 |
매일경제-Citylife 제588호/그림 콤플렉스 없애는 앱 (0) | 2017.07.22 |
데이비드 크리스천. 밥 베인-빅 히스토리/내가 빅 히스토리를 좋아하는 이유 (0) | 2014.02.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