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근 / 「論語 (그대는 사람의 길을 걷고 있는가)」
1. 꿈같은 이야기
덕치(德治) 태평성대 (太平聖代) 요순시대(堯舜時代)
<요왈> 편의 1장을 따라가면 위와 같은 생각의 가닥이 잡힌다.
요임금 순임금이 세상을 다스렸던 시대는 왜 평화롭고 행복했던가 요순이 덕으로 세상을 다스렸던 까닭이다.
그래서 요순 임금들은 성군이 되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성군이란 무엇인가?
시민을 참으로 사랑하며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해 모든 시민들이 불편 없이 편안히 살게,
정직하게 정치를 하는 대퉁령이요 수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통령이 어느 나라에 있으며 그러한 수상이 어느 정부에 있단 말인가?
지금은 온 새상이 첨단과학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꿈같은 이야기로만 들린다.
그러나 사람은 꿈을 버려서는 안된다.
전쟁이 있으면 평화의 꿈을 줄기차게 꾸어야 하고 불행이 있으면 행복의 꿈을 가꾸어야 한다.
절망이 있으면 희망을,
탄압이 있으면 자유를,
차별이 있으면 평등을,
미움이 있으면 사랑을, 악이 있으면 선을 향하는 꿈을 버려서는 안 된다.
이러한 꿈이 바로 인간이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의지요,
역사의 지향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문화의 발걸음이 아닌가
막연한 꿈을 꾸는 것보다
확실한 근거와 신념을 지니고 꿈을 꾸는 것이 삶의 미래를 여는 열쇠를 보다 더 분명히 쥘 수가 있을 것이다.
공자는 그러한 근거를 요순시대에서 찾았고
미래에 있어야 할 태평성대를 위하여 인의(人義)라는 열쇠를 만들어 남겨준 셈이다. (P39)
..... 요가 전하고 있는 정치의 길은 중(中)이다.
중(中)은 넘치고 치우쳐서는 안 되지만 처지고 모자라도 안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中)은 절대의 조화(調和)이다.
요는 그러한 조화를 하늘의 움직임이라고 보았다.
하늘의 움직임이 그대의 몸 안에 있으니
그 중의 길을 벗어나지 마라고 하면서 요는 순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다
"아, 순아 하늘의 정수가 그대에게 있노라.
반드시 중용의 도(道)를 지켜라. 온 백성이 가난하고 고달프면
하늘이 그대에게 내린 녹(祿)도 영영 끊어지고 말리라"
이러한 말을 전하면서 요는 순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었고
순은 다시 우(禹) 에게 위와 똑같은 말을 들려주면서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P40)
2. 바른 정치에 대한 문답
자장이 공자를 뵈옵고 바른 정치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묻자 공자는 자장의 물음에 답을 주었다.
그 대화 내용은 이렇다.
공자, '다섯 가지의 미덕을 존중하고 네 가지의 악을 물치면 올바른 정치를 할 수가 있다.
(尊五美. 屛四惡 斯可以從政矣./ 존오미. 병사악. 사가이종정의)
자장, '다섯가지 미덕이란 무엇입니까?'
공자, '군자가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주되 낭비하지 않고 (君子惠而不費/군자혜이불비)
백성들을 부리되 원망을 사지않고 (勞而不怨/노이불원)
바랄 것을 바라되 탐욕하지 않고 (欲而不貪/욕이불탐)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고 (泰而不驕/태이불교)
위엄이 있되 사납지는 않다 (威而不猛/위이불맹)
이 말씀을 들은 자장이 어떻게 하면 배풀되 낭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다시 묻자,
공자는 백성들이 저마다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 이득을 고루 얻게 해 주면
혜택을 주면서도 낭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풀어주었다.
특권층에 특혜를 주면 그만큼 백성의 몫이 부정하게 잘려나가게 마련이어서
부정부패는 국력의 낭비가 된다.
우리의 치자(治者)들 중에서 공자의 이러한 말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몇이나 될까?
참으로 의심스럽다.
그래서 정치는 못 믿을 것이란 뒷말을 사서 듣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공자는 이어서 자장의 의문을 풀어준다.
...... 백성들이 노역을 해야 할 일을 신중히 선택해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을 시킨다면
백성들도 어긋난 것이 아님을 알고 힘이 들어도 원망을 하지 않을 것이 아니냐고 들려주었다.
.... 사랑을 베풀고자 했으니 사랑을 베풀어주면 되는 것이다.
제 욕심을 위하여 군자가 왜 탐욕을 낼 것이냐고 공자는 자장에게 다짐해준다.
그리고 군자는 많은 사람 앞이건 적은 사람 앞이건 지위가 높고 얕건 가리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군자의 태연함이며,
교만하지 않음이 아니냐고 공자는 반문해 응답해준다.
위와 같은 선생의 말씀을 경청한 자장은 그러면 네 가지 악덕이란
(何謂四惡/하위사악)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자는 다음처럼 짚어주었다.
"백성을 가르치지않고 죽이는 것을 잔학이라 하고(不敎而殺 謂之虐 불교이살 위지학)
미리 훈계시키지않고 잘못된 결과만을 따지는 것을 포악이라 하고 (不戒視成 謂之暴/불계시성 위지포)
법령을 엉성하게 해두고 시행의 기한을 조이는 것을 적해라고 하며(慢令致期 謂之賊/만령치기 위지적)
어차피 남에게 내주어야 될 물건의 출납을 미적미적해 술수를 부리는 것을 창고지기라고 한다."
(猶之與人也 出納之吝 謂之有司/유지여인야 출납지린 위지유사)
위정자들이 위와 같은 공자의 말씀을 새긴다면 다스림이 잘못 될 리가 없다.
권력의 공포, 권력에 의한 탄압등은 가르치지 않고 죽이는 것이다.
유신체제의 유지를 위하여 하수인 노릇을 했던 정보부는 왜 잔학했던가?
제 편이 아니면 사람 잡는 짓을 가리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러한 것이 잔학이다.
일의 시작은 제쳐두고 결과만 가지고 따져 상벌을 주게 되면 아첨꾼만 생기고,
또 공치사로 생색을 내서 한 수 얻어 보려고 덤비는 간신들만 득실거리게 되고야 만다.
오늘날 왜 전시행정이 판을 치고 난장을 이루는가?
정치의 윗물이 포악해서 아랫물들이 눈치를 보는 까닭이다.
코걸이 귀고리 식으로 법을 운용하면 이는 역적(逆賊)의 짓거리에 속한다.
이러한 역적의 짓들 때문에 백성은 법이란 본래 거미줄 같이 벌레만 걸리고 새는 채고 나간다며 원망한다.
법 운용의 미를 거두겠다고 말하는 입은
법을 훔칠 수 있는 틈을 내놓고 빠져나갈 문을 열어주는 짓을 한다.
힘에 약한 법은 어디서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역적이다.
.... 나라의 재산을 장물처럼 아는 관리는 분명 날강도와 같다.
부정부패의 나라는 그러한 날강도 때문에 빚어지고 그러한 나라는 결국 망하고야 만다.
... 옛날엔 임금과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을 정치의 네 가지 악으로 괴롭혔고
이제는 대통령과 관리들이 시민들을 정치의 네 가지 악으로 괴롭힌다.
공자여!
어느날에나 민주시대의 치자들이 시민은 요임금의 정치철학을 원한다는 것을
알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p44)
3. 최후의 선언
논어의 맨 끝 <요왈(堯曰) 삼장(三章)>에 이르면 비장한 공자의 말씀을 듣게 된다
그 말씀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할 수 없는 절대 정멸의 선언이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인가를 밝히는 최후 통첩이다.
그것은 다음처럼 되어 있다.
"천명을 모르면 치자가 될 수 없다 (不知命 無以爲君子)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가 없다 (不知禮 無以立也)
말을 모르면 남을 알 수가 없다 (不知言 無以知人也)"
천명(天命)이란 무엇일까?
노자의 말을 빌면 도(道)와 같다.
그러나 노자의 도는 인간이 알 길이 없는 만물의 생성자(生成子)이다.
그 생성자의 부름에 응해서 살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일이다
이를 지명(知命)이라고 한다.
노자의 지명은 자연으로 돌아가 살라 함이고 공자의 지명은 인의(仁義)를 넗혀 살라함이다
무위는 자연을 따르라 함이고, 호학(好學)은 인의를 넗히라 함이다.
그러면서도 어떠한 지명이든 덕(德)을 벗어날 수 없다고 노공(老孔)은 동의한다.
이러한 공자의 지명은 이미 요임금이 밝혀둔 것이기도 하다.
"큰 덕을 밝혀 구족을 친하게 하라.
백성을 고르게 밝혀 백성이 밝게 하라.
온 누리를 평화롭게 하여 백성을 착하게 하라."
이러한 지명의 말씀을 혜아릴 수 없는 자라면,
정치할 욕심을 내지 말아야 백성들이 편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예를 모르면 설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무례하면 더불어 살 수 없음을 말함이다.
나를 앞세우고 남을 뒤로 밀치려는 사람은 무례한 자이다.
그러한 자는 어디서나 따돌림을 당하고야 만다.
내 욕심을 사납게 부리고 남의 입장을 몰라주는 사람은 무례한 자이다
칭찬할 줄은 모르고 험담이나 트집만 잡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무례한 자이다.
그러한 자는 어디서나 모난 돌과 같아서 뭇사람들의 정을 맞고 따돌림을 당한다.
더불어 사는 새상에서 이처럼 따돌림을 당하고서야 어찌 무슨 출세를 한단 말인가?
출세를 하고 싶다면 먼저 낮은 데를 택하는 물처럼 돠라.
말을 모르면 남을 모른다.
참말과 거짓말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다.
말은 곧 마음이며 그 마음이 움직일 행동이다. 마음이 거짓이면 행동 또한 거짓이다.
거짓말만 일삼는 사람이 어찌 남을 알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거짓으로 남을 속이면 남도 거짓으로 나를 속인다.
그렇게 되면 나와 남은 천만리나 떨어져 있는 외딴 섬과 같다.
그렇게 떨어져버릴 수 있는 섬과 섬 사이를 이어주는 연락선 같은 것이 바로 참말이다.
참말이 얼마나 귀한가를 모르는 사람은 결국 남을 알 수가 없다.
남을 알자면 먼저 내 가슴 속부터 열어야 한다.
참말이란 무엇인가?
참말은 가슴 속을 여는 열쇠와 같고 거짓말은 그 열쇠를 훔쳐가는 도둑과 같다.
그러므로 참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말조심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참말만을 해야 함을 아는 것이 곧 지언(知言)이다.
천명을 알고 따르는 치자, 예를 알고 지키는 치자,
그리고 말을 알고 하는 치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무릇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을 다스리겠다고 뜻을 품은 사람은
누구든 천명을 알아 억지를 부리지 말고 순리를 따라야 할 것이며
에를 지켜서 남을 아프게 하거나 업수이 여길것이 아니라
남을 존경하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고 참말을 하여 남의 신임을 얻어야 할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만 치자는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치자의 구실을 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만 있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이루어지고
그 사이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를 맺게 마련이다.
그러한 관계를 어떻게 이어 삶을 밝고 맑고 찬란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치자의 영역에 들어가 삶의 숨을 쉬는 셈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는
군자를 넓게 생각하며 인의를 실천하는 사회인일 수가 있고
좁게 생각하면 정치를 담당하는 엘리트를 말하는 경우도 될 수가 있다.
치자(治者)여,
천명을 어기지 말 것이며, 예에서 벗어나지 말 것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부렁의 말장난을 하지 마라.
이것이 논어가 맨 끝에 남겨놓은 최후의 통첩이다.
누구에게 주는 마지막 선언인가?
우리 모두에 주는 선언이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대는 사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느냐고 묻는다. (p46)
※ 이 글은 < 論語 인간관계의 철학 제3권 >을 필사한 것임.
윤재근 / 論語 (그대는 사람의 길을 걷고 있는가)
도서출판 둥지 / 1992. 05. 08
'명상의글(종교.묵상.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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