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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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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책이 가득한 방.

by 탄천사랑 2021. 7. 7.

「새가정 - 1989. 9월호 여성칼럼」

 

 

사람들 마음속에는 안정되고 싶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고,
그리고 무슨 일인가 보람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세 가지 욕구가 있다고 한다.

내 경우 그 세 가지 욕구 중 안정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늘 집과 연관이 되곤 했다.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열 번 이상이나 이사를 다니며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나서 대학 시절에 세대주가 되어 버렸다.

겨울이면 웃목에 놓은 물대접이 얼어버리는 

조그만 셋방에서 친구들과 모여 커피라도 마시게 되면 의례 나의 꿈타령이 나오게 마련이었다. 

삼면의 벽에 책이 가득 찬, 햇빛 잘 드는 방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타령의 전부였다.

안정감이 제일 심하게 흔들렸던 경우는 트렁크 두 개를 플로리다 주립대학 캠퍼스를 찾아갔던 때였다.
12월의 날씨답지 않게 더운 기온에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주임교수를 만나려 벨아미 건물을 찾아 갔더니 냉방이 잘된 사무실에서 사무적으로 간단하게 대해 주었다.

영 자신이 없고 풀이 죽어서 나오며, 어쩐지 자꾸만 잘못 온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은 기숙사를 찾아갈 일이 남아 있었다.

상자곽를 세워 놓은 것 같은 8층 건물에는 각 층마다 복도 양쪽에 모두 열두 개의 문이 있었다.
복도는 어두워서 낮에도 불이 커져 있었다.
기숙사 사감은 옷차림이 말끔하고 젊은 흑인 남자였다.
기숙사 예약이 되어 있다고 하니까 명단을 한참 들치더니 탁 닫으며 자신있게

 

"명단엔 이름이 없는데요." 한다.

 

가슴이 털컥 내려 앉아서 그럴 리가 없다고, 분명히 몆달 전에 항공우편으로 예약을 했다고 설명했다.
다시 한 번 더 명단을 흝어보고나서 사감은 고개를 흔들었다.


"큰일 났구나!
 오늘 밤 어디가서 자야 될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책상위에 걸터 앉으며 다른 명단을 들쳐보던 사감이 손가락을 튕겼다.
내 이름이 405호에 적어 있단다.
안심이 되어 미소 짓는 내게 그는 덧붙어 말했다.

"그런데 룸메이트가 남자예요"


내 이름만 보고 성별난은 확인하지 않은 채 남학생으로 속단을 했나 보다고 사감은 배를 잡고 웃었다.
난 웃음이 나올 리가 없었다. 

"오늘밤 어디에?"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버렸으니까.

 

내 이름이 남자 이름 같은 줄을 이 사람은 어떻게 알았을까?
얼굴색이 변한 내게 사감은 솔직히 자기 잘못을 시인하더니 

여학생 예약자 명단 중의 마지막에 있는 학생이 아직 안 나타났으니 우선 그 방에 있으라고 했다.

열쇠를 받아들고 올라가 704호실 문을 여니 단정하게 정돈된 방이 비어 있었다.
대학원 학생을 위한 이 기숙사 내부에는 거실 겸 식당과 부엌인 방과, 
침실 하나에 목욕실이 딸려있고 식탁, 침대, 서랍장 둥 가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두 방을 연결하는 복도에 있는 책꽂이 선반과 책상의 반쪽이 비어 있고 벽에는 

"안녕! 내이름은 조이, 네 이름은?" 하고 쓰여진 쪽지가 붙어 있었다.
"룸메이트까지 남자 이름이군!" 

 

그제야 나도 웃음이 나왔다.
본 적은 없어도 호감이 가는 룸메이트 였다.

개학 후 두 주일이 지날떄까지 나는 그 마지막 예약자인 여학생이 나타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지만 사감은 무사태평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고 

다행히 그 여학생은 마음이 바뀌어 근처 아파트라도 빌렸는지 끝내 나타나질 않았다.

이렇게 해서 로저스 홀 704호 실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고 

몇 년 동안에 책장의 책이 점점 늘어가고  그곳에 마음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해 

제법 안정감이 들때 쯤 나는 또 짐을 꾸리고 떠나게 되었다.

주머니에 든 4백불은 가난한 유학생에겐 거금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뿌듯했지만 
그 사이 서울의 집값은 또 올라서 그 돈으로는 방을 구하기 힘들었다.

다시 방  한칸에 짐을 풀었다.  
방 하나에 연탄 아궁이 하나,  단지 그것뿐인 셋방이었다.
여러 달이 지난 후, 

월급을 모으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작은 아파트에 전세를 들었을 땐 호사스런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나 육 개월마다 전세금이 올라 안정감과는 거리가 멀었고 역시 내 집은 아닌 느낌이었다.
일년 후 또 짐을 싸고 작은 아파트로 옮겨갔다.


일생 처음으로 내 집을 산 기쁨에 들떠서 

집값의 거의 절반이나 되는 빚을 갚을 걱정조차도 마음을 무겁게 하지는 못했다.
작긴 하지만 제법 서제까지 생겨서 책을 마음대로 쌓아 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저 만족스럽고 감사하기만 했다.

그 작은 둥우리에서 12년을 살고나니 이번엔 아파트 전체에 책이 넘쳐흘려 처치곤란 지경에 이르렀다 
용기를 긁어모아서 다시 한번 이사를 하게 되었다 
넘치는 책의 교통정리도 끝이나고 이 아파트가 점점 마음에 들게 되어 이제는 안정이 된 셈이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안정이 된 지금 갑자기 어느 시의 구절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먼곳으로 떠나고 싶어지는 것은?

'벽에 책이 가득한 방' 은 장소나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활속에서 중심을 잡고 

내면으로 눈을 돌리며 안정을 추구하려 하는 내 마음의 동경인지도 모른다 -p47-
※ 이 글은 <새가정>실린 글을 필사한 것임.

 

 

글 - 송유재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새가정 / 1989. 9월호 통권 3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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