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혜 -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
아주 어렸을 적부터 우리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랍니다.
부모님으로부터 과자를 받으면서,
주변의 친척 어른들로부터 머리를 쓰다듬기 하면서,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엄격한 수업 시간을 통해서도,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심호흡을 하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결심합니다.
'훌륭한'이라는 단어의 발음도 참 훌륭해 보입니다.
철자도 길쭉하고 약간 복잡하게 꽉 찬 것 그 자체를 암시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휼륭'이라고 하는 것에 경외심마저 가득 안고
꼭 그렇게 어마어마한 사람이 되리라고 여러 번 다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철이 들 무렵부터 개념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는데
'훌륭'은 나에게서 자꾸 멀어져 가고 있는 듯하고,
어떤 것이 훌륭한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이름을 떨칠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마치 용이나 봉황을 보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약간 황당스러워진 것입니다.
사실 훌륭해지는 것은 작은 일에서 비롯된다고 일렀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은
나서지 않는 작은 사람 속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어야 합니다.
거리에 휴지를 버리지 않는 것,
그보다 남이 버린 휴지를 줍는 것이 더욱 훌륭하다는 것,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이른 새벽에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도록 했어야 합니다.
올림픽 기간 중에
홀수, 짝수 날짜에 맞추어 차량을 통제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첫날은 그토록 혼잡했다가
시원하게 뚫린 길을 지나가는 이른 아침의 서울은 더욱 맑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가슴을 확 사로잡는 뜨거운 고마움에 눈물이 일 정도였습니다.
이토록 훌륭하게 성장한 우리나라 국민과 민족에 대한 긍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3일이 지나지 않아서
어긋나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자, 겁이 슬슬 났습니다.
다시 혼잡해지는 거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부스러지기 시작하는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국제적인 행사 기간 중이라는 엄청난 전제에도 부스러지는 도덕심이라면,
큰 명분이 없는 곳에서는 마구 무너질 것 같은 우려에서였습니다.
차가 없는 사람에게는
홀수든 짝수든 그 어떤 숫자든 관계조차 없는 일입니다.
차가 있는 사람들은 어쨌든 사회적으로 성공했거나,
성장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기간에 슬쩍 버린 양심 대신 자동차를 편히 굴렸던 사람들,
그들이 문제입니다.
바로 훌륭해지는 길은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허겁지겁 훌륭을 따라가겠다고
자기 인생을 마구 짓밟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도 부족해 온 가족을 태우고 가는 차 안을 들여다볼 때,
아이들까지 잘못 기르고 있다는 생각에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저도 뒤늦게
훌륭하다는 것의 정체를 파악했습니다.
진작 웃어른들이
작은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훌륭의 시작이라고 일러주었으면,
사상누각(沙上樓閣)을 지은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다른 작은 일을 돌보았더라면 지금쯤 훌륭해졌을 텐데 말입니다.
이는 곧 '난 사람', '든 사람'보다
'된 사람'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p13)
- 행복이가득한집 1988년 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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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멋쟁이
그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
무엇보다 거실 한 면 가득한 책들이 장식이 될 만큼 보기 좋았습니다.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들이나 바닥에 깔린 러그도 아주 훌륭해 보였으며,
가구들은 녹록하지 않은 족보가 있을 것 같았고,
소품들은 독특하여 서로 잘 어울렸습니다.
몇 송이 꽂아놓은 꽃도 틀어놓은 음악과 수준이 어긋나지 않는 감각들이었습니다.
식탁은 아주 모던했지만,
고재(古材)를 이용해 천장까지 받쳐놓은 기둥이 악센트 역할을 했고,
이미 식탁에 차려놓은 식전주(食前酒)와 가벼운 안주가 담긴 그릇도 멋졌습니다.
흔히 이렇게 감각적이면 친근감이 부족하기 쉬운데,
책꽂이나 마루 등의 마감재가 평이한 것이어서 편안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야 하는 '감각'과 돈을 안 들이는 '비용'의 조화가 탁월했습니다.
집주인의 직업과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느꼈는데,
집 안 꾸밈은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만든
생각의 껍데기라고 규정짓는다면 꼭 맞는 정의일 것입니다.
저녁 식사가 시작되자 수프 그릇을 쟁반에 담아 식탁으로 나르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딘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아들이라고 인사를 시켰습니다.
부엌에서 수프를 떠주고 뒤따라 나온 부인과 남편의 설명으로 알았습니다.
몽고증, 즉 다운증후군이었습니다.
저를 초대한 분은 핀란드 헬싱키의 디자인센터 디렉터이며,
디자인 관련 전문지를 내는 편집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만큼 옷차림도 디자인적인 고려를 하면서도 지나치지 않는 감각을 지닌
중후하고도 잘생긴 분이었습니다.
이런 남편과 잘 어울리는 인상 좋은 부인,
그 멋진 부부 사이에서 어쩌다가 그런 병이 있는 아이가 태어났는지
제가 다 안타까울 지경이였습니다.
그 아들이 할 수 있고
가장 기뻐하는 심부름이 바로 음식 그릇 나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그릇을 내려놓을 때마다 일일이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어머니는 혹여 아들이 그릇을 깰까 봐 뒤에서 눈길을 떼지 않으며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호 속에서 아들은 수프 그릇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그 일을 기뻐할 수밖에요.
아들 없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
게다가 손님을 맞고서도
아들이 기뻐하는 일을 빼앗지않는 그 모습에 저도 더없이 편안해졌습니다.
이야기하는 김에 그날 그 집에서 대접받은 음식도 언급하고 싶군요.
커다란 생선 한 마리가 좁고 긴 접시에 가득 담겨 나왔습니다.
(그때까지도 그런 접시는 한국에서 볼 수 없었지요)
생선 몸은 10센티미터 너비로 한 번은 껍질을 벗기고,
한 번은 덮은 채로 반복하여 아름다운 패턴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생선 둘레에는 유난히 노란 감자와 삶은 채소를 곁들였습니다.
간단한 재료로 만든 요리지만
세 가지 색의 조화가 담긴 이 긴 접시가 테이블 가운데 놓였을 때
환호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노란 감자는 지금의 감자가 유입되기 전에
핀란드 인들이 주식으로 섭취했던 것으로 섬유질이 아주 많은데,
외국인인 저를 위해 일부러 준비했다고 합니다.
생선은 배를 타고 가다가 그냥 떠 마셔도 좋은,
그 나라가 자랑하는 청정한 호수에서 잡았다는 것까지 모두 이야깃거리였습니다.
생선과 더불어
여러 가지 곡물과 견과류가 가득 든 검박한 빵과 와인이 그날의 메뉴였습니다.
고지식해도 멋없고,
지나치게 빈틈없어도 멋없는 그 사이에 자리한 '멋'을 아는 정말 멋쟁이들인
이들에게 식탁 차림과 인테리어 감각을 크게 배웠습니다만,
더 크게 배운 것은 인생 전체를 사는 품격있고 흐뭇한 멋이었습니다.
몽고증,
누가 그 병에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은
키가 별로 크지 않고 몽골리안, 즉 우리 동양인의 얼굴을 닮았지요.
그래서 그들 부부를 전혀 닮지 않고
오히려 저를 닮은 편인 핀란드의 그 아들이 아직도 생각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는 아들을 손님이 올 때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주변의 어떤 가족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업신여김을 당할까 봐,
혹은 그런 자식을 가진 자신들을 동정할까 봐 아들을 감추는 것이겠지요.
그럴수록 부자연스러운 공기가 집 안을 우울하게 만들고
그들도 남들도 더욱 힘이 들 텐데요.
무거운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같은 상황을 다르게 사는 사람들,
결국은 생각하는 방법의 차이일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는 온갖 형상을 지어 내는 힘과 재료가 들어있고,
그로써 인생을 살아나가는 방법과 가치를 만듭니다.
살다 보니
의외로 일상에서 멋진 방법을 찾아낸 사람들이 흔치 않다는 것을 꺠닫습니다.
가까이하면 정말 존경하기 힘들다는 것,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받는가보다도
어떠한 사람들한테서 존경받는가를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를 깨닫습니다.
몇 년 전,
초대받은 '정말 멋쟁이' 가족은 그래서 잊히지 않나 봅니다. (P228)
- 행복아가득한집 2005년 9월호 -
※ 이 글은 <정말 하고 싶은...>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이영혜 /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
디자인하우스 / 2012. 0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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