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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찬-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상실을 받아들이는 자세

by 탄천사랑 2021. 1. 1.

「정재찬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상실을 받아들이는 자세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만큼이나 죽음이라는 상실에서 너무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애도 정도면 충분합니다. 
물론 애도의 시간과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내가 지나치게 감상적인 것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우울했을 때, 
평소 존경하던 그리고 굉장히 쿨한 모더니스트라 여겼던 프랑스의 사상가 

롤랑 바르트가 남긴 《애도 일기》를 보며 위안을 얻었습니다. 

이 책은 롤랑 바르트가 1977년에 자기 어머니를 잃고 쓴 일기를 모은 것입니다. 
애초에 출판하려고 쓴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일기장에 쓴 것도 아니고, 
노트를 4등분으로 접어서 쪽지를 만든 다음, 거기에 생각을 써 내려간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고는 그 쪽지들을 아무도 모르게 책상 위의 작은 상자에 모아두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기를 쓴 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80년 어느 날, 
바르트는 길을 건너다가 세탁물을 운반하는 트럭에 치여 병원으로 옮겨집니다. 
심각한 상태였지만 그는 치료를 거부했고,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공식적으로는 사고사로 처리됐지만 실제적인 자살이라고 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가 죽은 뒤 기록 보존을 좋아하는 프랑스답게 그의 모든 것, 
쪽지 하나 남김없이 현대저작물기록보존소에 보관됩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2009년, 
상자 속의 그 쪽지들을 모으고 엮어 ‘애도일기(Journal de deuil)’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됩니다. 

1997년 3월 20일 일기 
이런 말이 있다(마담 팡제리가 내게 하는 말):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 
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 롤랑바르트, 《애도 일기(걷는 나무, 2018)》 중에서


위대한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 정신분석, 
언어학의 대가였던 롤랑 바르트 같은 사람도 어쩔 수가 없구나 싶어지니 조금 위로가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는 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예민함만 좀 사라질 뿐이지 시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도 좋긴 하지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참 고마웠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씁니다. 
“울적한 오후 잠깐 장을 보러 가다. 
 제과점에서 별 생각도 없이 피낭시에 하나를 산다. 
 작은 여점원이 손님을 도와주다가 말한다. 
 ‘부알라(Voila)’, 별말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그저 ‘여깄습니다’ 정도? 그런데 롤랑 바르트는 그 말을 듣고 울컥합니다. 
 그가 돌보던 엄마가 뭘 달라 그러면 그걸 가져다주며 자신이 늘 했던 말, 
 그게 바로 ‘부알라’였다는 겁니다. 
 이어서 씁니다. 
 ‘이 여 점원이 무심코 흘린 이 단어가 결국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오랫동안 혼자 운다”라고.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남겼습니다. 

1997년 11월 28일 일기
그 누구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까(그것도 대답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품으면서)?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 롤랑바르트, 《애도 일기(걷는 나무, 2018)》 중에서


애도 일기라는 책 제목대로, ‘애도’란 일단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도는 내가 어떤 대상을 상실했는지도 알고 있고, 
그 상실한 걸 알고 있는 나, 자아에 대해서도 명학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도라고 표현할 때는 
세상의 빈곤과 공허를 느끼면서 대상의 상실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애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멜랑콜리(melancholy)라고 부릅니다. 
이는 상실한 대상과 스스로를 동일시해서 
그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상실감 혹은 복수심을 자기 자신에게 투영하는 겁니다. 
이 때문에 멜랑콜리는 심리적으로 퇴행성 상태라 간주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는 세상보다 자기의 빈곤을 탓합니다. 
그래서 자기 비난으로 해소하려고 하는 거죠. 
가령 이렇게 자책하는 겁니다. 
‘내가 죽였어.’ 
‘나 때문에 헤어졌어.’ 
‘내가 문제야.’ 
‘아, 나는 무능해.’ 
‘나는 처벌 받아 마땅해.’

얼핏 보면 애도보다 멜랑콜리가 훨씬 슬퍼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멜랑콜리는 아직 이별과 상실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지 못한 겁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리 애써도 멜랑콜리를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극단적인 설움과 한을 동반하는, 
아무리 추스르고 일어서려 해도 안 되고 도무지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큰 상실감, 
그것은 치료와 치유를 요하는 일입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애도는 옳고 멜랑콜리는 극복되어야 할 태도일 뿐이지요. 
끝없이 슬퍼하는 것만이 고인 혹은 이별한 이에 대한 애정의 증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자아 애착에만 빠져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 뿐일지 모른답니다. 
하지만 바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의 구분을 넘어선 자리에서 
오로지 깊은 슬픔 그 자체에만 충실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애도의 예로는, 
그래서 롤랑 바르트보다도 이 시가 좀 더 적절해 보입니다. 

아버지의 모자

                                       이시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따르던 오촌당숙이 아버지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아버지가 평소에 쓰시던 모자를 들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그러고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모자를 쓰고 
사립 밖으로 걸어 나가시는 것이었다.    - 《바다의 호수(문학동네,2004)》

이 시의 당숙은 혼자서 깊이 생각한 겁니다. 
한참 동안 아버지 없는 그 빈 방에 말없이 들어앉아서 말이지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고 추모하며 있었을 겁니다. 
참 존경하며 따르던 분인 모양입니다. 
고인을 기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끝에 모자 하나 딱 들고 나오면서 선언하듯 이렇게 툭 말하는 겁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무뚝뚝한 말과 행동에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시도 더 이상 말을 덧대지 않습니다. 
당숙이 통곡을 하지 않았듯 시인도 묘사만 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그 애도의 뜻을 압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굳이 곡을 하지 않아도, 고인을 따른다는 것은 고인의 뜻을 따라 고인이 살아온 길과 정신을 따른다는 것이지, 
고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저승길을 따라나서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숙을 애도의 모델로 삼기에는 또 우리 정서상 다소 무리인 듯싶지 않나요? 
그래도 눈물을 좀 흘려야 할 거 아닌가 말이죠. 

 
그러니까 애도는 상실에 대한 적절한 거리와 태도를 뜻합니다. 
멜랑콜리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문제요, 
도무지 그런 감각과 감성이 부재하여 전혀 아픈 줄 모르는 것도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애도에 관한 시로 읽고 싶은, 황동규의 〈더딘 슬픔〉을 소개해보렵니다. 
 
더딘 슬픔


                                          황동규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 《꽃의 고요 (문학과지성사,2006)》

 
이게 죽음 혹은 상실에 대한 예의 아닐까? 
스위치를 꺼도 형광등은 바로 빛을 버리지 않고 희끄무레 남습니다. 
눈이 그쳤다고 눈더미가 대번에 녹지도 않습니다. 
길모퉁이에 추억처럼 남아 서서히 사라져갈 겁니다. 
봄이 왔다고 꽃나무가 바로 잎을 피우지도 않습니다. 
지난해 땅으로 내내 끌어당기던 중력과도 이별할 채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듯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는 겁니다. 

그 까닭은 타인의 죽음을 통해 얻은 것입니다. 
올 봄 먼저 간 그대, 그대의 불이 꺼지고 보니 그렇더라는 거겠지요. 
장례식장의 촛불이나 향불이 꺼질 때도 희미하게 남아 서서히 사라지는 연기처럼, 
그대가 떠나고 나서 어쩐지 이 봄이 더디게, 너무 더디게 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는 추모의 시, 애도의 시가 되는 것입니다. 

 
더딘 슬픔, 그것이 상실에 대한 올바른 애도입니다. 
끝내 허무하게 사라질지라도, 
생명의 불 꺼지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은 연기로 남아, 
무중력처럼,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렇게 잠시 그대와 함께한 추억들을 되새기며, 
그대 떠나 텅 비어버린 이 세상의 공백을 채우는 것, 그것이 애도 아니겠습니까. 
우리네 짧은 인생에도 그런 정도의 여운과 여백은 허락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애도의 여백도 다 사후의 일입니다. 
그리운 사람, 
그리워해야 할 사람이라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아니 대숲에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라도 그리워해야지요. 
너무 늦으면 안 됩니다.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어두워진다는 것(창비,2001)》

목련 같이 보자고 했던 친구가 이른 나이에 먼저 세상을 등진 모양입니다. 
목련꽃 지기 전에 목련 그늘 아래로 놀러 갔어야 하는데 
세상사 바빠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만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목련 진 지 한참 지나 겨울에 찾아간 친구에게 너무 늦어 미안하다 하렸더니, 
친구는 목련 피려면 아직 멀었다며 달래줍니다. 
올해는 목련이 일찍도 피었군요. 
그러기에 겨울 상가(喪家)에 조등(弔燈)만 하나 목련처럼 피어 있었겠죠.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 사람들, 
고맙다고 할 사람들, 
존경한다 해야 할 분들, 
너무 늦지 않게 다시 만나야 할 사람들의 버킷리스트는 갖고 계신가요? 
다시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그분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할 소망들로 우리의 버킷리스트를 꾸며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우리가 상실로부터 배워야 할 버킷리스트인 것 같습니다. 
죽음을 잊지 맙시다. 
메멘토모리! 
※ 이 글은 <상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정재찬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인플루엔셜 - 2020. 0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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