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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책방(소설/기타

1장-1 좌, 우. 사바나로 돌아가자 - 닥치고 정치/김어준. 지승호

by 탄천의 책사랑 2013. 4. 16.

 

 

 

닥치고 정치 (김어준의 명랑시민 정치교본) - 김어준. 지승호/푸른 숲 2011. 10. 10.

김어준 (언론인)
지승호 (작가)

1장 좌, 우. 무서우니까 / 좌, 우. 사바나로 돌아가자

지) 왜 진보가 집권해야 하는지 말하기 전에 진보, 보수를 먼저 규정해야 하는 거 아냐?

김) 좋아.
좌, 우가 뭔지부터 얘기를 하자고.
굉장히 흔하게 쓰이지만, 사회과학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려워하는 개념이니까.
그나마 전 국민이 공통으로 가진 좌, 우에 관한 기준이 북한을 바라보는 태도 정도인데, 
북한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좌우나 진보, 보수를 나누는 건 사실 굉장히 한국적이고 예외적이며, 
애초 유럽에서 기획된 좌, 우의 개념에도 들어맞지 않거든. 그러니까 더욱 헛갈리지.

나도 80년대에 20대가 걸쳐 있었기 때문에 그 시절의 평균적인 학습 세례를,
그 시절 유명했던 <자본론> <경제학-철학 수고> <공산당 선언> 같은 책들을 통해 받았어.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그런 이론들이, 그 당대에선 대단히 정확하고 정교한 통찰이었지만,
그 역시 시공을 초월하는 신의 예언일 수는 없는 것이며,
탁월하지만 여전히 시대의 한계내에 있는 한 불완전한 인간의 이론, 담론, 관념이기에 
그 관점만으로 인간 일반을 전면 해석하려는 시도 또한 당연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런 정교한 이론을 기반으로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어.

나도 그런 이론들 대부분은 알아.
하지만 그런 건 제쳐두자고. 중요한 건 그런 정교한 이론이 아니니까.
큰 덩어리의 본질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 거니까,
자, 그럼 내 방식대로 좌와 우를 설명해 볼게. 무학의 통찰로 (웃음)

지) 진보, 보수를 나누고, 세계를 이해하는 것, 
내 스탠스를 찾는 것이 학습의 결과가 아니란 말이지?

김) 내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면서 순간순간 경험으로 터득한 건데,
그러니까 근본은 없어. (웃음)
어쨌든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나름대로 내재적 속성을 직관과 통찰로 발견한 거라고 난 주장하는 거지,
일방적으로. (웃음)
자, 이제 사바나로 돌아가보자. 사바나 시절로, 
현재의 우리 사고 회로가 설계된 건 바로 그 시절이거든. 
그 시절, 사회적 규범도 대단히 미약하고, 학습의 기회나 장도 달리 없고, 
대단히 동물적인 자연인 상태였던 그때는 과연 좌, 우가 없었는가. 
좌, 우의 원형질에 해당하는 사고방식은 과연 없었는가.
좌, 우의 어떤 기원에 해당하는 인식 체계, 세계관이 그때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난 당연히 있었다고 생각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사고의 회로를 어느 날 갑자기 인간들이 발명해 냈을 리 없거든. 
그런 사고의 경향성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을 설명할 정교한 언어를 갖지 못했을 뿐이지.

그렇다면 그 시절의 좌, 우는 어떤 것이었을까. 
어느 날 문득, 그 원형질에 해당하는 감정이나 태도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 거지.
어떤 동물이건, 물론 사람도 포함해서, 그 태도를 결정하게 만드는 건 결국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해. 
하나는 욕망이고, 나머지 하나는 공포야. 
그게 모든 동물의 생존 방식을 결정하는 두 축이라고 봐. 
간단히 말해, 살고 싶은 건 욕망이고,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건 공포지. 
그 시절의 기본적인 욕망을 유추해 보는 건 어렵지 않아. 
먹고 자고 섹스하고 모든 동물이 가진 본능적 욕구를 안정적으로 해결하기에도 만만치 않은 
시절이었을 테니까. 그걸 해결하기에도 바빴겠지.

그럼 공포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사자일까. 천둥과 벼락을 내리치는 하늘. 가장 큰 공포는 불확실성이었다고 생각해. 불확실성. 
물론 사자도 두려워. 
그렇지만 사자보다 더 두려운 것은 저 풀숲에서 튀어나올 게 뭔지 아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저 밀림 속에 오로지 사자밖에 살지 않는다면, 
그럼 사자의 습성을 알고 조심하는 걸로 대처하면 되거든. 
그런다고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예측하고 준비할 근거는 있는 거니까.

그런데 거기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해봐. 
미지의 포식자와 자연재해를 예상할 수 있냐고. 없다고.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것, 그런 불확실성. 
나는 이게 바로 공포의 원형질에 해당한다고 봐. 
인간의 현대적 욕망을 가장 충실히 반영하는 자본 게임인 주식시장을 봐. 
주식시장이 가장 싫어하는 건 불확실성이야. 
불확실성에는 논리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따로 없으니까. 
인간이 그런 불확실성이라는 공포에 따로 대처할 방도를 찾지 못하니까 굿도 하고, 별자리도 보고 그러는 거지. 
토템이 어느 지역에나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테고. 그러다 그게 세련되어지면 종교가 되는 거고.

이 모든 노력은 결국 인간의 논리로는 도저히 대처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불확실성을 어떻게든 축소하고 제거하기 위한 거지. 
초월적 존재에 의탁해서. 
악어가 인간을 잡아먹는 동네에서는 그 대상이 악어가 되기도 하는 거고
염주 차고, 십자가 걸고 기도하는 거나, 동물 뼈 목에 걸고 굿하는 거나, 본질적인 동력은 같은 거라고.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저 앞의 밀림에서, 자신 앞의 삶에서, 뭐가 튀어나와 날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불확실한 삶의 조건속에서 견뎌내야 했던 거지


※ 이 글은 <닥치고 정치>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13.0416  20240401_17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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