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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유럽도시기행 1/'프랑스 음식'이란 건 없다.

by 탄천사랑 2020. 2. 9.

유시민 - 「유럽도시기행 1」

[210204-170557] 

 


'프랑스 음식'이란 건 없다.
프랑스 음식이 고급스럽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푸아그라(거위 간 요리), 코코뱅(채소 닭고기 와인 졸임), 라타투이(모듬 채소복음), 
퐁듀(끓인 치즈를 찍어 먹는 음식), 에스카르고(달팽이 구이), 부야베스(생성 해물 졸임),
크레페(밀가루 전병 쌈 요리), 양파수프, 크루아상 등 널리 알려진 프랑스 음식은 한둘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우리나라로 치면 김치찌개, 된장국, 제육볶음, 해물 아귀찜, 김치,

밥 같은 표준 메뉴일 뿐이다.
이런 것만 가지고 한국 음식을 평가할 수는 없다.

내 짧은 체험으로는 프랑스 음식에 대해 뭐라 말할 자신이 없다.
지역에 따라 식당에 따라 모두 다른 음식을 파는 것 같았다.
표준 레시피가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있다고 해도 자유와 개성의 나라 셰프들이 표준 레시피를 고분고분 따를 리 없다.
그러니 소감만 이야기해 보겠다.
다만 한가지,  프랑스 음식의 세계적 명성은 책으로 정리한 레시피 덕분에 생긴 것일 수도 있다.
백년전쟁 이전의 프랑스에는 민족의식이란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 음식이랄 것도 없었다.
소금에 절인 식재료를 흔하게 썼고 별다른 식사 예법도 없이 한꺼번에 차린 음식을 손으로 먹었다.

그런데 14세기 중반의 왕실 주방장 기욤 티렐과 루이 14세의 요리사 프랑수아 피에르 같은 
사람들이 레시피를 책으로 정리한 덕에 프랑스 왕실 요리법이 유럽 귀족사회로 퍼져나갔다.
강력한 중앙 권력을 구축하자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지중해와 변방의 식재료가 왕궁으로 공급되었고, 
베르사유에 모인 부르봉왕가와 귀족들의 사치가 극에 달하면서 코스 요리와 식탁 매너, 
호화로운 테이블 세팅과 식기가 등장했다.

부르봉 왕실의 '과시적 음식 소비' 형태는 
산업혁명으로 부를 획득하고 대혁명으로 권력에 접근한 부르주아 계급에 전파되었다.
19세기 말 조르주 오귀스트 에스코피아가 
식품 위생과 조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시스템을 창안했는데,
유럽과 미국의 대형 레스토랑과 특급 호텔 식당들이 그 시스템을 받아들일 떄 프랑스 요리도 함께 묻어갔다.
1900년 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슐랭이 발간한 맛집 비평지 <미슐랭 가이드> 도 
프랑스의 '입맛 제국주의'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었다.
맛집을 알려주면 자동차를 몰고 찾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러면 타이어 수요가 늘어난다는 게 미슐랭 경영진의 계산이었다.
20세기 후반 민간 항공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프랑스 요리는 
그전에는 쓸 수 없었던 식재료까지 활용하면서 더 다양하게 뻗어 나갔다.

하지만 평범한 파리 여행자가 어찌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받은 레스토랑에 감히 발을 들여놓겠는가.
그런 식당에서 한 끼를 먹으려면 예약을 해야 하고, 
와인을 포함하면 평소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돈을 내야 한다.
베르사유 궁전의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먹었던 점심을 제외하고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고급 레스토랑에 가지 않았지만 음식에 관해서는 별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파리에서 먹은 음식은 다 다르면서 다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딱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프랑스 사람들이 '영혼의 수프'라고 한다는 양파 수프였다.
버터에 볶은 양파를 고깃국물에 끓이고 
치즈 가루로 그라탱을 한 다음 월계수 잎을 띄우고 구운 바게트 한 토막을 올려 주는데, 
파리뿐만 아니라 칸에서도 너무 짜서 먹기 힘들었다.

다른 도시에서처럼 파리에서도 잘 먹어보려고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숙소가 있었던 레알지구에는 저렴한 식당이 밀집한 먹자골목이 넓게 포진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인근 퐁피두센터에 갔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총리와 대통령을 지낸 조르주 퐁피두의 이름을 붙인 이 센터는 
1977년 말 개장한 복합 문화시설이다.
전시장과 영화관, 서점, 기념품점, 카페 등 다양한 시설이 있어서 주로 젊은이들이 드나드는데, 
화장실을 안내하는 발자국 모양의 화살표가 마음에 들었다.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본 공공 디자인 중 최고였다.

퐁피두센터 옆 언덕에 미니 먹자골목이있었다.
맥주를 파는 술집들은 모두 젊은이들로 만원이었는데, 유독 손님이 없는 집이 하나 보였다. 
번역하면 ** 다원(茶圓)쯤 될 것 같은 옥호였다.
찾집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웬걸, 
흰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보였고 출입문 앞에는 음식 메뉴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나중에 보니 후식으로 커피 말고 차를 마실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 파리의 흔한 동네 식당이었다.
아주 다양한 종류의 차를 보유한 식당의 벽에는 알랭 들롱, 장 가뱅 등이 등장하는
옛 영화 포스터가 여럿 있었다.
거기에 나오는 배우는 다 죽은 사람들이었고 틀어놓은 음악도 모두 1970년대 이전의 팝송이었다.

훈제오리 샐러드, 야채수프, 
그리고 오늘의 요리라고 적어둔 생선구이를 주문했더니 밥과 페페로니, 
껍질째 찐 콩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채 볶음이 딸려 나왔다.
간이 싱거웠고, 강한 향신료를 쓰지 않아 재료 맛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후식으로 머그잔에 든 초콜릿 케이크와 레몬 타르트를 먹고 홍차와 녹차를 마셨다.
모두가 맛이 훌륭하고 가격도 착했다.
이틀 후 한 번 더 가서 야채수프와 말린 홍합 셀러드를 전채로 하고 
연어 스테이크와 오늘의 요리인 토끼 다리살 찜을 먹었다.
토끼고기는 닭가슴살과 맛이 비슷한데 식감은 더 부드러웠다.
그런데 딸려 나온 야채 볶음은 이틀 전과 똑같았다.
파리식 백반집이라고나 할까?
연어구이 백반, 토끼 구이 백반, 생선구이 백반 하는 식으로.

네 번의 저녁 식사 가운데 나머지 두 번은 레알지구 먹자골목에 있는 식당에서 해결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식당들을 보면서 걷다가 
옷을 잘 입은 중년 남자와 여자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는 집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영어 메뉴가 없었다.
라틴어가 어원인 단어들을 띄엄띄엄 조합해가며 메뉴를 독해하다가 
벽에 걸린 칠판에서 '주방장 추천'으로 추정되는 음식 목록 네 가지를 발견했다.
짧은 영어로 웨이터를 불러 설명을 부탁했는데  웨이터의 영어도 나만큼이나 짧았다.
뭐라고 설명을 시도하더니 이내 포기하고 떠나면서 한마디 했다.

'웨잇, 아이 월 쇼 유!'
잠시 후 그는 다른 테이블에 음식을 가져갈 때 
우리 곁으로 지나가면서 접시를 슬쩍 보여주고 손가락을 폈다.
'디스 이즈 넘버 원, 디스 이즈 넘버 포!' 조금 뒤에는 2번과 3번도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 집에 두 번 가서 네 가지를 모두 먹었다.
소고기찜 비슷한 것도 있었고 재료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음식도 있었다.
정식으로 주문한 양파 수프가 너무 짰던 것만 빼면 모두 훌륭했다.
영어로 '클래식(Classic)'에 해당하는 단어가 든 음식이 메뉴에 있어서 무척 궁금했는데, 
옆 테이블 손님이 먹을 때 보니 소고기 육회 무침이었다.  

우리 육회와 달리 채를 썬 소고기에 각종 향신료를 섞어 동그랗게 담아냈다.
옥호에 매우 흔한 프랑스 이름이 들어 있었다.
유명한 극작가를 비롯해 그 이름으로 검색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리말로 하자면 '꼬마 철수'쯤 될 것이다.

파리에 며칠 다녀와서 프랑스 음식을 먹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른 떄 파리에서, 또는 프랑스의 다른 도시에서 먹은 음식도 마찬가지다.
푸아그라는 그냥 흔한 간이었다.
간이 부어오르게 하려고 
거위를 학대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기분이 찜찜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달팽이 구이는 먹을 게 없었다.
내 입맛에는 우리나라 호프집 골뱅이무칩이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생선 요리는 재료 맛으로 먹는 것이라 어디나 비슷했고, 
크루아상은 한국 전문점 것보다 더 맛이 좋다고 단언하기 어려웠다.

프랑스는 도버해협과 지중해 사이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정식과 전남 진도의 한정식이 다른 것처럼, 
파리 음식과 이탈리아에 인접한 남프랑스 칸의 음식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칸 해변의 영화제가 열리는 극장 근처 해산물 전문점에 가면 
바다의 향기가 그대로 풍기는 생선의 요리가 나오고,  
정통 프랑스 요리를 한다는 
식당의 스테이크는 피렌체의 티본스테이크만큼 두껍고 육즙이 줄줄 흘렀다.
나는 파리에서 내가 간 식당 주방장이 만든 음식을 먹었을 뿐, '프랑스 음식'을 먹은 게 아니었다. 

여행할 때는 몰랐는데, 글을 쓰면서 알았다. 
보고 왔는데 또 보고 싶거나, 이번엔 못 보았지만 
다음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공간이 파리에 아주 많다는 것을. 
그렇지만 다시는 갈 수 없다고 상상해도, 
아테네나 이스탄불과는 달리 그저 아쉬울 뿐 다른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자기 색깔대로 씩씩하게 잘 살아갈 친구인데 슬퍼할 게 무에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저 스치듯 가벼운 인사만 남기고 인류 문명의 최전선인 파리를 떠나왔다. 
'아비엥또(a bientôt 또 봐)!   (p323)
※ 이 글은 <유럽도시기행 1>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유시민 - 유럽도시기행 1
생각의길 -  2019.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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