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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총동창회보-세 가지 맛에 대하여(박현찬)

by 탄천사랑 2019. 4. 24.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제 493호」

 



세 가지 맛에 대하여

중국 항저우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내려가면 사오싱(紹興)에 도착한다. 
그곳은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다. 
고향집 뒤 쪽에는 백초원이라는 넓은 정원이 있었는데, 새파란 채소밭이 펼쳐진 나지막한
토담 안 자줏빛 오디와 키 큰 쥐엄나무가 흔들리는 반들반들 우물터에 앉으면, 
긴 곡조로 울어대는 매미와 풀숲에서 솟아오르는 날랜 종다리들이 끝없는 정취를 자아낸다고 
루쉰이 추억하던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고향집과 백초원 모두 기념관이 되어 있지만, 
소년 루쉰은 매일 아침 토담을 넘고 돌다리를 건너 새까맣게 손때 묻은 사립문을 지나 서당에 갔다. 
공자에게 한 번 선생님에게 또 한 번 절을 하고 고개를 들면 
벽에 걸린 편액이 소년을 노려보곤 했다. 
편액에는 삼미서옥(三味書屋)이란 네 글자가 뚜렷이 박혀있었다.

후일 루쉰의 아우 저우쭤런은 삼미서옥이란 서당의 이름이 
‘책 속에 세 가지 맛이 있다(書有三味)’는 옛 사람의 말을 따른 것이라고 전했다. 
경서(經書)는 밥과 같고, 
사서(史書)는 고기와 같고, 
자서(子書)는 조미료와 같다는 것이다.  
또 송나라 때 ‘한단서목(邯鄲書目)’이라는 책에는 
‘시서(詩書)는 진한 국물 맛이고,  
사서는 저민 고기 맛이며, 
자서는 식초와 젓갈 맛이니 삼미라고 한다’는 글귀도 있다.

옛 선현들이 책 읽기를 얼마나 즐기고 소중히 했는지, 
책을 대하는 감식력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렇기에 서당에 오는 아이들이 매일 밥을 먹고 고기를 먹고 국을 마시듯이 
글을 읽고 책을 탐하기를 바라는 훈장 선생의 염원을 담기에는 
그 이상 좋은 이름도 없었을 듯싶다.

시기도 경위도 다르지만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뜨겁던 한일 월드컵 시즌을 보낸 후 나는 경영하던 벤처를 정리하고 다시 출판계로 돌아왔다.  
그즈음 책을 기획하고 집필하고 좋은 원고를 선별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또 글쓰기를 강의하면서 어느 순간 내가 하는 모든 작업을 꿰뚫어주는 어떤 원리를 체득하게 된다.

‘원칙있는 삶’이라는 책을 집필하던 시기로 기억하는데, 
편집팀과 새로운 책의 기획안과 구상에 대해 논의를 하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3가지 기준을 가지고 설명을 하고 있었다. 
3이라는 숫자의 매직이 작용했는지 그날의 설명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나는 한 편의 글이나 한 권의 책에는 세 가지 맛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에게 3가지 맛이란 흥미(興味), 의미(意味), 쾌미(快味)다. 
이를 테면 ‘삼미론(三味論)’이다.  
나중에 루쉰의 글을 전집으로 다시 읽으며 
‘삼미서옥’이 눈에 들어온 날 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삼미를 음식으로 비유를 하자면 
‘흥의 맛’은 흩어진 재료를 하나로 꼬챙이에 꿰어 먹는 꼬치구이, 
‘의의 맛’은 질서를 만들어 뜻을 표현하는 구절판 요리, 
‘쾌의 맛’은 따뜻한 국물에 촉촉한 식감으로 반전을 주는 퓨전 요리를 들 수 있겠다.

한 가지 맛을 내기도 어려운데 세 가지 맛을 모두 갖추려면 얼마나 어려울까. 
하지만 흥미에서 의미를 거쳐 쾌미에 이르는 과정, 
이 과정을 제대로 밟아야 세 가지 맛이 모두 담긴 콘텐츠가 만들어진다. 
JYP의 박진영은 ‘K팝스타’라는 오디션 방송에서 
기대에 못 미친 출전자에게 이런 인상적인 평을 한 적이 있다.

“소재도 좋고 재료도 좋은데 요리를 막상 해내면 맛이 별로 없다. 
 좋은 곡과 히트곡은 다르다.” 

그냥 좋은 곡, 좋은 글을 쓰는 데는 한 가지 맛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히트곡, 훌륭하고 잘 짜인 글을 짓는 데는 
세 가지 맛이 모두 필요하다는 뜻이 아닐까.    - p27면 - 


글 - 박현찬
독문82-88.  스토리로직 대표.  스토리텔링 디렉터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제 4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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