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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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 "癌 투병 중에도 매일 기록… 들춰보니 하루도 의미 없는 날 없어"
이효재 낡은 수첩에 詩도 쓰고 욕도 써놓고… 하고 싶은 말 쏟아 내며 큰 산 넘어
이어령 디지로그 다이어리 활용… 일주일 분량의 집필 하루 만에 끝내기도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의 기록" 이해인 수녀
"다이어리에 아주 세세한 삶의 기록은 아닐지라도 중요한 건 놓치지 않고 기록해요.
그래서 다이어리는 제게 영혼의 거울이자 고향의 시냇물,
설레는 첫사랑을 간직한 비밀 서랍 같은 것이자 생활 백과사전이며 추억의 창고, 글감의 원천이죠.
더 나아가 수녀회 역사도 되고 시의 영감을 주는 우물 같은 역할도 합니다."
1965년 예비 수녀 시절,
수련과 기록을 위해 쓰기 시작한 이해인 수녀의 다이어리는 어느새 156권을 채워가고 있다.
수련기와 해외 유학 중이었던 1970년대를 제외하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이어리를 채웠다.
대장암 투병 중에도 메모 수준의 간단한 글귀를 적었다.
"썩 사색적이거나 멋진 글은 아니고
어린아이 일기처럼 언제, 어디에서 무얼 했다는 내용이 많아요."
이해인 수녀의 수첩은 '일상 스크랩북'이자 시를 쓰는 습작노트이자
이따금 마음에 새길 만한 구절을 적어놓은 잠언집이다.
스크랩한 기사 아래에는 그날의 감정도 서너줄 적었다.
감수성을 그대로 옮겨 놓은 시구도 보인다.
"올 한 해는 시(詩)로써 치유한 해였어요.
올 봄 '민들레의 영토' 발간 40주년을 기념해
가톨릭 출판사와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시낭송회부터는 시 관련 기록이 많아요.
8월 서울 은평병원에서 지체장애인 등
환우들이 제 시에 멜로디를 붙여 창작한 노래로 경합을 벌였던 '아트브뤼트 뮤지크 페스티벌',
11월 발달장애아 대상 부모 특강이었던
'사랑의 길 위에서' 등에 참여해 시심(詩心)의 힘을 느낀 한 해였습니다."
이해인수녀는
"슬픈 날도 있고, 기쁜 날도 있지만,
아무리 바빠도 일기를 거르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자신을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가만히 들춰보니 하루도 의미 없는 날이 없더라"고 했다.
'해우소' 같은 다이어리…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
심하게 허름했다.
이효재의 손에 분신처럼 붙어있는 다이어리는.
KBS 로고가 박힌 수첩 뒷면에 옷핀을 꽂은 뒤 옷핀에 고무줄을 걸어 다이어리로 활용했다.
"KBS 북한방송 '효재의 한식풍류'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할 때 받은 것을 1년 내내 쓰고 있어요.
다이어리를 따로 사진 않아요.
네모 칸 쳐 있는 탁상달력을 다이어리처럼 쓰기도 하고요.
어디에 적든 중요한 건 기록이잖아요."
다이어리는 흔한 3색 볼펜과 세트다.
다이어리는 1월부터 12월까지 빈칸이 거의 없을 정도로 빽빽한 스케줄로 채워져 있다.
"고맙죠.
이 나이에도 찾아주는 곳 많고,
불러주는 사람 많으니.
올 한 해도 지치지 않고 달려온 저 자신에게 감사하고요."
택시에서 차가 막힐 땐
다이어리를 펼쳐 생각나는 대로 시를 쓰기도 하고 화를 못 삭인 날엔 욕을 써 넣기도 한다.
"잃어버릴까 봐 겁나냐고요?
너무 허름해서 주워가지도 않아요!"
전국 각지를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니는 그녀의 다이어리 첫면은 열차 시각표가 장식한다.
"나 같은 아날로그형 인간에겐 필수죠."
수첩 포켓에 들어있는 타로 카드는
올 초부터 줄곧 그녀의 마음을 다잡아주는 좌우명 같은 것이다.
"올해는 '균형이 필요한 해'라고 나왔어요.
개인으로나 국가로나 올해 무척 힘든 해였는데
다이어리에 하고 싶은 말 쏟아내며 큰 산을 넘었단 생각이 들어요."
남들보다 한 달을 빨리 살고 싶어 11월에 연말 결산을 하고
12월을 1월로 생각하며 산다는 그녀는 정유년 새해면 이순(耳順)이 된다.
"'나 환갑 됐어'라며 온 동네 떠들고 있어요. 인생은 60부터라잖아요."
차곡차곡 쌓인 1년치 메모… 최재천 교수
묵직한 명품 브랜드의 가죽 다이어리가 나올 줄 알았다.
한데 지난 3년간 국립생태원 초대원장직을 마치고 이화여대로 돌아온 최재천 교수가 꺼낸 다이어리는
'2016년 국립생태원'이라고 새겨진 수첩과 지인에게 받은 빨간 수첩이었다.
'팔자에도 없는 공직'에 있는 동안 공무를 적은 국립생태원 수첩은 생태원 회의록이다.
빨간색 수첩에는 논문이나 책의 발췌 내용, 강의·연구 메모들이 가득했다.
"화~목요일에는 서천에서, 월요일은 서울에서 생활했다"는 그는
"서천에 있을 땐 거의 아이돌 가수들 스케줄처럼 움직였다"고 했다.
생태원장 재직 시엔 비서들이 주로 스케줄 관리를 해주었지만
기본 스케줄은 스마트폰 에버노트 앱으로 직접 한다.
앱을 실행해보니 생태원에서 진행하는 무료 특강에
마을 주민들과의 만남까지 열두 달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메모앱에는 '대리만족사회' '선악' '리더십' '공원' '배려 없는 사회' '추대' '청년에게' 등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한 짤막한 글들이 적혀 있다.
"저는 아날로그 시대를 더 오래 산 사람이에요.
또래에 비해 디지털 시대에 잘 적응한 편이지만 수첩에 연필로 쓰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있죠.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뒷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의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틈틈이 메모를 했어요.
요즘엔 스마트폰 지갑형 케이스 안쪽에 포스트잇을 붙여 시시때때로 메모하고 있지요.
나중에 이런 스타일로 나온 스마트폰을 만들어달라고 제안하고 싶어요."
포스트잇엔 그날의 '할 일 목록'을 적었다.
'할 일'을 실행하거나 실천하면 선을 그어 지운다.
메모한 포스트잇은 버리지 않고 수첩에 붙이거나 파일에 끼워 간직한다.
'디지로그 다이어리' 100배 활용… 이어령 전 장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디지털 현자(賢者)'답게 디지로그(digilog,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첨단기술) 다이어리를 꺼내 놓았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라이브 스크라이브'라는 스마트펜(메모를 하면 스마트폰이나
PC, 태블릿PC와 연동되는 펜)을 활용해 수많은 책을 펴냈다.
요즘엔 국산 네오스마트펜 '엔투(N2)'와 전용수첩,
아이패드 프로와 전용 애플펜슬등을 연동해 끊임없이 기록하고 또 기록한다.
이 장관이 쓰는 디지로그 다이어리 시스템은
스마트펜으로 전용수첩에 필기하면 그대로 파일로 변환돼 저장된다.
태블릿PC에 글씨를 써도 문서 파일로 저장된다.
"스마트펜으로 전용수첩에 쓰기도 하는 데 요즘엔 시력이 안 좋아져
아이패드 프로에 직접 쓰는 경우가 많아요.
눈 침침하고 수시로 필기하기 쉽지 않은 나이 든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 디지로그 다이어리죠.
내가 쓴 글들을 키워드를 입력해 날짜나 페이지별로 찾아보기도 쉽고요.
덕분에 일주일 분량의 집필을 하루 만에 끝내기도 해요.
집필 작업량을 따지면 20대 때보다 훨씬 많습니다."
전용 수첩과 에버노트앱엔 '알파고' 관련 내용부터 '한국인 이야기' 집필 원고가 데이터베이스화돼 있다.
최근에는 서양의 체스와 동양 바둑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간단한 일기도 띄엄띄엄 보인다.
사적인 내용을 길게 기록하기보단 짤막한 시를 적거나 기억할 만한 구절을 메모하는 수준이다.
"글 쓰는 건 연애와 같아요.
누가 대신해줄 수 없죠.
수시로 글을 쓰는 제겐 디지로그 다이어리가 얼마나 편리한지.
이 안(아이패드)에 8000여권 책이 있고
내 사유들이 데이터베이스화돼 있으니 이것만 있으면 어디든 서재가 되고 도서관이 되죠."
이 전 장관은
"올해는 생과 사, 은둔과 사회, 행과 불행, 따로와 서로의 세계를 오갔던 해"였다며
"올해 중 출간하려고 했던'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를 내년에는 꼭 완성하려고 한다"고 했다.
한 장의 그림, 한 장의 메모로 표현한 날들… 캘리그래퍼 공병각
'가지고 싶다 이 글씨'의 저자이자 인기 캘리그래퍼인 공병각의 다이어리는 스케치북 같다.
다이어리에 스케줄 따위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그날의 기분을 반영한 그림과 메모들로 가득하다.
다이어리도 1권만 고집해 쓰기보단 선물받은 여러 개 다이어리를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대로 의식하지 않고 쓴다.
몰스킨 제품이 많았다.
표지는 모두 그만의 색깔로 리폼했다.
유명한 커피 브랜드 다이어리 앞 표지엔 아예 커다란 스티커를,
모서리엔 빈티지한 멋이 나도록 종이 재질의 마스킹 테이프를 붙였다.
자신의 글씨체로 이름도 큼지막하게 썼다.
"개인적으로 캘린더나 스케줄러가 있는 다이어리는 피해요.
꼭 무언가를 채우지 않아도 되는데 빈칸 남겨둔 것들을 보면 압박감이 느껴지더라고요.
살다 보면 빈칸인 날들도 많잖아요."
다이어리를 챙기지 않은 날에는 메모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 간직했다가 마스킹 테이프를 이용해 다이어리에 붙인다.
다이어리 속엔 유난히 어두운 그림과 메모들이 많이 보인다.
"작년에 엄마가 큰 수술을 받으시고 올해도 계속 치료 중이라 조금 힘들었어요.
사회 전반으로도 우울한 이슈가 많았잖아요."
'Where is my mom'이란 손글씨 아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이 그림은 건강했던 엄마를 그리워하는,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가 담긴 듯했다.
다소 반항적인 문구와 그림도 보였다.
"그때그때 감정들을,
머리에 스치는 생각들을 다이어리에 담아요."
마치 감정의 스케치북을 보는 듯한 그의 다이어리 마지막장엔
이런 메모가 눈에 띄었다.
'돌아보면 아름다운 날.'
글 - 박근희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16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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