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였나..?
창문을 여니 그곳에 높고 청명한 하늘이 있었다.
그랬다.
어느새 가을이 본연의 제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나무의 이름을 버리고 낙엽으로 자신의 고향인 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은행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며 우수수 노랑잎을 떨구고 있었다.
가을 냄새를 담아 보려는 긴 호흡 속에 달콤함이 있었다.
아마 아파트 사이의 길목길에 서 있는 느릅나무의 향기가 아닌가 해본다.
그 달콤함은 커피를 생각나게 하는 달콤함이었다.
한 달하고도 보름 전으로 생각한다.
이 핑게 저 핑계로 미루던 종합검진을 받았다.
결과는 운동부족에.... 당뇨 초기라는....
의사가 친절하게 설명하며 써 건네준 진단서의 글,
그리고 내려진 아내의 커피 금지령에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사실은.. 병원에서 일려 준 방법대로 시간에 맞춰 금식을 했지만 새벽운동을 나가면서 깜박하고 껌을 씹은 것이다.
이실직고하면 한동안 이어지는 말에 씨가 될 것이기에 함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커피 금지령으로 불똥이 튄 것이다.
"그게.. 말하자면..."
"뭐가요.. 하실 말씀이..?"
"..."
"뜸들이지 마시고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래... 참자, 참어. 싸나이가........,' 그 좋아하는 커피를 마셨다고 뭐라 할까만은, 마음이 편치 못해 선뜻 손이 안 간다.
선한 바람이 책상위에 놓아둔 책 장을 넘기더니 다시 한 장을 넘기려 하고 있었다.
조금씩 보다 접고, 내용을 상상하며 보고, 그리고 또다시 보는 책.
작가는 원고를 주면서 '제목 뒤에 마침표 세 개를 꼭 넣어 주세요.'라며 특별히 부탁했다는 책이다.
아주 오래전, 늦은 가을 비가 주적주적 내리고 있던 날로 기억한다.
오후에 찿아든 오수(午睡)를 떨쳐 버릴 겸 직장에서 멀지 않은 『문예서림』을 찾았다.
제목뒤에 마침표가 가지런히 찍힌 책을 들고 이게 무슨 뜻일까 하며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표지였다.
그리고 작가의 명성보다 좋아하는 음악가 브람스라는 이름만으로 주저없이 구매한 책이었다.
노처녀인 서른아홉의 실내장식가 폴.
육년 동안 함께 지내는 자유분방한 성격인 폴의 연인 로제.
그리고 폴를 사랑하는 스물다섯의 청년 시몽.
어찌 보면 삼류소설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삼각관계를 다른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가랑비처럼 자신도 모르는 순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어야 느낄 수 있다는 행복과 불행, 사랑과 갈등,
순간의 기쁨뒤에 도사리고 있는 슬픔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가 나이 스물넷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소지품을 꼼꼼하게 정돈한 다음 침대 위에 앉았다.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늘밤도 혼자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 역시 그녀에게는,
사람이 잔 흔적이 없는 침대 속에서,
오랜 병이라도 앓은 것처럼 무기력한 평온 속에서 보내야 하는 외로운 밤들의 긴 연속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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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저와 점심 식사를 하지 않으시겠어요?" 시몽이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채 재빨리 말했다.
그녀는 순간 겁이 났다.
그는 그녀가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애써 대화를 잇고 그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 새로운 상황으로 들어가야 하리라.
그녀는 겨우 이렇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안되겠어요. 일이 너무 많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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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그러자 폴은
"무시무시한 선고로군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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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창한 가을날, 폴은 시몽으로부터 콘서트에 함께 가자는 쪽지를 받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 문장을 보고 미소짓던 폴은 문득 생각에 잠긴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는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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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브람스의 콘체르토를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첫 부분이 낭만적이라고 여겼지만 음악 중간에는 듣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음악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닫고 아쉽게 생각했다.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해당 페이지를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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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클럽 옆 테이블에서 그녀는 이따금 일 관계로 만나는, 몇 살 연상의 여자 둘을 만났다.
그들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몽이 그녀에게 춤을 청하려고 일어섰을 때,
"저 여자, 지금 나이가 몇이지?"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그녀는 시몽에게 몸을 기댔다.
모든 것이 망가지고 말았다.
드레스는 그녀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았고,
시몽의 외모는 너무 눈에 띄었으며, 그녀의 삶은 지나치게 비상식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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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본명이「프랑수아즈 쿠아레 (Frangoise Quoirez)」인 작가「프랑수아즈 사강」은 사랑을 믿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예요.
그 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2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3년이라고 해 두죠." 그녀 나이 스물넷에 당당히 사랑을 말한다.
햇살이 잘 드는 창틀에 기대어 바람에 쓸리는 낙엽을 바라본다.
따끈한 차 한잔과 낙엽같은 음악을 듣고 싶은 날이다.
그래...
Johannes Brahms
멀리 나서지 않아도 브람스의 음악을 들으며 주말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는 것,
가을이 주는 행복일 것이다.
그 사이 바람이 책을 덥어 버리고 있었다.
얼마 전 시내를 나갔다 구입한 『에게해의 동쪽』도 좋을 것 같다.
『기차는 8시에 떠났네』
『그리스인 조르바』등의 삽입곡으로 유명한 그리스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고향의 해변을 바라보며 작곡했다는 설명과
첼로와 피아노의 아름다운 하모니가 녹아든 리리시즘의 극치라는 호평을 받고 있는 음악은 어떤가?
낙조가 내리는 바닷가 언덕에 차를 세우고 연인가 함께 차를 마시며....,
[t-11.10.22. 20211013_16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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