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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 정순인

by 탄천사랑 2009. 4. 22.

·「수필문학 - 2009년 3월 호 통권 21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캐나다의 관광도시 밴프에서 빙하지대인 아이스 필드로 가는 93번 도로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 불리는 구간이 있다.
만년설을 인 웅장한 로키가 손에 닿을 듯하고, 
이슬같이 맑은 보우 호수가 여행객의 발길을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다워 그렇게 불린다.

내가 그곳에 간 것은 작년 이맘때, 3월이었다.
캐나다에 이민 간 질녀가 한 번 다녀가라는 말을 진작 했지만 쉽게 마음을 내지 못했다.
그 아이가 사는 에어드릭은 일 년 중에 반이 겨울이라고 하니 
추운 날씨와 긴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야 하는 게 무리일 것 같고,
무엇보다도 성치 않은 몸이라 폐가 되면 어쩌나 싶은 염려 때문이었다.

망설이다가 마음을 낸 것은 
'혼자서 지내지 말고 한 달만이라도 함께 지내요.
 햇빛 쨍한 날이면 집에서도 로키산맥이 보여 수필이 절로 나올 거예요'라는 전화를 재차 받고 나서였다.
그날따라 그리움이 불꽃처럼 일었다.
아마도 적막한 집안에 뛰어든 스산한 바람 소리 탓이었을 것이다.

여행 가방을 챙겼고, 캘거리 공항에서 우리는 만났다.
처음 며칠은 밀린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밥을 먹으면서도 깔깔대고, 
하루걸러 눈이 오는 날씨가 낭만 있다며 
또 다른 날은 지겹다고 툴툴대며 질녀가 말한 로키는 한동안 먼빛으로만 봤다.
그러다가 도로 위의 눈이 말끔하게 녹은 날 일주에 나섰다.

과연 로키였다.
멀리서 보면 폭을 가름할 수 없는 거대한 병풍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들면 태초의 자연이 곳곳에서 꿈틀대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곁에 둔, 찬탄할 수밖에 없는 산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곳을 보면서 감탄하는 눈동자와 달리 
가슴에 서서히 차오르는 것은 로키나 아름다운 길이 아니었다.
봄 아지랑이와 같은 질녀의 사랑, 바로 그 온기였다.
독신인 내가 외로워할까 봐 
걱정하는 질녀와 나의 마음이 이어지는 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리고 행복이었다  (p128)


글 - 정순인 
출처 - 수필문학

 [t-09.04.22.  210403-1657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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